<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은 제목 그대로 핵전쟁 아포칼립스입니다. 배경은 1983년으로서 2차 대전의 여운이 살짝 가시고 냉전이 한창인 시기입니다. 아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나온 독일 소설이죠. 대상 독자층은 청소년 쪽인데, 주인공부터 13살짜리 소년입니다. 21세기 독자가 보기에 이 책은 너무 진부하고, 너무 상투적이고, 너무 뻔할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핵전쟁과 대재앙의 공식을 고스란히 반복하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원자 폭탄이 터지고, 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방사선 낙진 때문에 모든 것이 오염되고, 동식물과 사람들은 참혹하게 죽어가고, 약탈과 폭력과 이기심이 만연하고,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등등. 수많은 핵전쟁 창작물에서 숱하게 써먹은 요소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참신한 발상이라든가, 실험적인 기법이라든가 그런 거 없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소년이라서 뭐 그리 대단한 문학성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롤란트가 1인칭 화자인데, 나이가 어린 만큼 현학적인 사고 대신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압도적인 암울함과 전율을 드러냅니다. 이미 옛날 책이라서 뻔한 내용임에도, 익숙한 요소들의 집합임에도 안타까운 탄성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솔직함, 담백함, 우직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롤란트는 현학적인 비유를 못 하지만, 대신 모든 상황을 독자에게 낱낱이 고합니다. 괜히 우회하거나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화자가 성인이었다면, 자기 연민과 세상의 모순을 좀 더 철학적으로 성찰했겠죠. 하지만 롤란트는 어린 아이고, 어린 아이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직 사고가 여물지 않은 시선이므로 대재앙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서술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더욱 날것처럼, 불편하고 비린 날고기처럼 다가옵니다. 게다가 이 책은 가족의 파멸을 세상의 붕괴와 동일시합니다. 비록 시골 마을이 배경이라 스케일은 비좁지만, 주인공 가족이 몰락하는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어른들의 세상이 부서지는 걸 보는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아요. 그게 특히 평소에 믿고 따랐던 엄마와 아빠의 몰락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세상의 전부 같았던 부모님과 어른들이 허물어지면, 결국 세상의 붕괴와 똑같겠죠.


사실 아이의 세계는 어른에 비해 좁습니다. 아이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세계의 규모와 그에 따른 모순을 생각하지 못해요. 아이의 눈에는 엄마와 아빠, 마을, 이웃들이 전부입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이 급속도로 무너졌습니다. 마을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이웃들은 이기심 때문에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엄마와 아빠마저 고통 속에 몸부림칩니다. 아이 입장에서 그야말로 세상의 붕괴입니다. 아이 입장에서 문명 그 자체가 몰락하는 것보다 마을의 혼란이 훨씬 뼈아플 겁니다. 솔직히 13살짜리가 문명의 깊이나 그런 걸 어찌 알겠어요. 어른들이 몰락하니까 아이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따름이죠. 따라서 1인칭 화자의 시선은 좁지만, 그만큼 생생하게 몰락과 파멸과 공포를 이야기합니다. 아마 주인공이 어른이라면, 약간의 사색이나 철학을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생동감이 덜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아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눈 앞의 상황을 곧이곧대로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무턱대고 과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핵전쟁의 여파가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거든요.


인물의 심정 변화와 행동 묘사도 상당히 생동감 넘칩니다. 대재앙이 닥쳤으니 사람들은 저만 살자고 난리를 부리는데, 그 난리라는 게 그저 물리적인 폭력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어차피 시골 동네니까요. 물리적 폭력도 무섭지만, 더 겁나는 건 여지 없이 깨지는 신뢰입니다. 모두가 도둑이고, 모두가 경찰입니다. 도둑질이 일상화된 마을에서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눈만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세상이라 심적인 피로가 갈수록 쌓입니다. 약탈자보다 도둑이 더 무서운 포스트 아포칼립스인 셈입니다. 폭력보다 도둑질이 더 극성인 마을이라니, 여느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심적인 피로는 강렬한 배신과 과장된 연민, 허망한 비관주의로 이어지고, 이런 감성들이 전개 도중에서 걸핏하면 튀어 나옵니다. 육체적인 고생도 문제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모습이 훨씬 인상적입니다. 물론 마음만 고생이라면 좀 낫겠죠. 그러나 소설은 방사선 환자의 모습을 사진처럼 세세하게 보여줍니다. 살이 녹고, 독소가 퍼지고, 팔다리가 잘리는 걸 여과 없이 묘사합니다.


솔직히 어지간한 성인용 소설도 이렇게 고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비위 약한 독자라면, 읽다가 진저리 치면서 책을 덮을지 모르겠네요. 이게 청소년 소설이라니, 허허 참. 작가가 다양한 방사선 피해를 계속 열거하기 때문에 솔직히 지루할 틈이 없더군요. 얼마나 더 고어해질 수 있는지 한계를 시험하고, 그때마다 부정적인 쾌락을 즐기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아련한 이유는 제목처럼 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부터가 소년이고, 소년 이외에도 여러 아이들과 아기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어른의 죽음보다 훨씬 마음 저립니다. 그 애들은 한창 자라는 중이고, 마땅히 도움의 손길을 받아야 하니까요. 이미 세상풍파를 겪은 어른의 몰락과 이제 피어보지도 못한 아이의 붕괴는 당연히 다르겠죠. 만약 아이를 키우는 독자라면,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한층 더 한탄할 것 같습니다. 엄마든 아빠든 이모든 삼촌이든 간에 돌봐야 할 아이가 생기면, 누구나 책임감을 느끼기 마련일 테죠. 그렇게 책임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이 책을 보면, 아이들의 죽음이 그냥 픽션으로만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세상과 어른을 향해 내뱉는 분노의 목소리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 네, 세상을 이렇게 만든 이들은 어른들이죠. 아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어른들은 후손을 위해 풍요롭고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전쟁을 막지 못했고, 모두가 문명의 끝자락에 몰렸고, 결국 아이들은 분노합니다. 아이들의 분노가 어른들의 귓가에 사무쳐요. 이것 역시 픽션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요즘 신문을 보니까 난민 아이들이 포켓몬 그림을 들고, 자기에게도 관심을 좀 보여달라고 애원하더군요.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누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누가 그 아이들을 그 지경에 몰아넣었을까요. 왜 사람들은 입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치면서 그런 아이들을 돕지 않을까요. 정의에 불타는 사람들, 눈 앞의 꼴보기 싫은 것들을 아주 열심히 물어뜯는 사람들이 많고 많습니다. 자기가 보기 싫은 것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득달같이 물어뜯어요. 그런 사람들은 왜 난민 아이들을 못 볼까요. 어른들의 머릿속에는 왜 깨끗한 환경보다 이윤 축적과 팽창과 착취만 들어있을까요. 아니, 뭐, 난민 아이들은 너무 거창하고 먼 이야기죠. 그렇다면 시선을 살~짝 돌려도 됩니다. 당장 미세먼지와 오존 주의보 때문에 놀이터에도 못 놀러가는 우리나라 아이들도 숱하니까요.


솔직히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서 별 기대를 안 하고 읽었는데, 웬만한 성인용 종말 소설을 뺨치도록 암울하네요.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많고요. 주인공과 문체만 청소년용이지, 줄거리와 묘사와 주제는 갈 데까지 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