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쉐칭이 쓴 <변종>은 해양 테크노 스릴러입니다. 전세계 바다에서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걸 여러 과학자와 군인들이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 자체야 지극히 평범하고, 이런 부류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갑니다. 그럼에도 여러 모로 인상적인 책인데, 우선 규모가 굉장히 방대합니다. 비단 내부 설정만 거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책 두께부터 어마어마합니다. 이게 책인지 베개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두껍거든요. 판형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내용이 그만큼 무지막지하게 길다는 소리입니다. 솔직히 책을 처음 본 순간, 이걸 다 언제 읽나 싶을 정도였네요. 아마 우리나라에 나온 외국 테크노 스릴러 중에서 이만큼 분량이 두꺼운 책도 드물 듯합니다. (테크노 스릴러 이외의 장르 소설 중에서야 당연히 방대한 책이 많지만요.) 입이 떡 벌어지는 책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사건이 쉴틈없이 벌어지고, 등장인물 숫자도 많습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갖가지 조연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남미 연안부터 북유럽 앞바다까지 복잡하게 오갑니다.


등장인물이 이렇게 많은 건 작중 사건이 그만큼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드넓고 서로 연결되어 있죠. 바다의 습격은 어디 한 군데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남미 해안가의 어선, 차가운 북유럽 바다의 탐사선, 심해에서 연구 중인 잠수정, 캐나다 근방의 고래 관광 선박, 망망대해 위의 미국 항공모함까지 연이어 정체불명의 사건에 휘말립니다. 이건 전지구적인 문제이고, 당연히 어느 한 사람의 주도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죠. 게다가 그 습격이라는 게 단순히 사람 몇 명 죽이는 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작중의 배후 세력은 테크노 스릴러에 등장하는 조직치고는 꽤나 거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음모는 그야말로 지구 생태계를 송두리째 바꿀지 모릅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전세계의 전문가들이 합심해야 마땅하겠죠. 국적과 출신과 업종과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는 전지구적인 학술 모임은 독자까지 들뜨게 합니다. 다만, 그런 범세계적 학술 연합이 어디까지나 유럽과 북미 주도라는 건 상당히 아쉬운 구석이더군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는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세계를 차별하는 뉘앙스가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그 자체가 차별 아닐까요. (엑스컴도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가 골고루 참가하는데!)


이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각종 이상 현상을 서술합니다. 갑자기 고래들이 선박을 침몰시키거나, 기괴한 생명체가 수중 카메라에 잡히거나, 심해 서식 생물들이 단체로 육지에 소풍을 나오거나 등등. 그리고 그럴 때마다 꼭 희생자가 생기고, 이게 누적이 되어 전지구적인 학살로 번집니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대규모 희생이 발생합니다. 중반부는 세계 곳곳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이상 현상의 배후를 연구합니다. 다만, 아무리 똑똑해도 어느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은 수시로 벽에 부딪힙니다. 그러는 와중에 습격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드넓은 바다가 선보일 법한 다양한 재앙을 열거합니다. 아마 가장 극적이고 스케일이 큰 부분이 중반부 같네요. 후반부에서는 바다를 연구하는 온갖 학자들이 한데 모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심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통섭적인 시너지를 기대할만하죠. 그리고 이 책은 그런 기대에 충실히 부응합니다. 분자 생물학부터 해양 생태학을 거쳐 SETI 연구까지 인류의 지성이 어디까지 단결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에 탄력을 받아 그 동안 쌓였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쾌감이 한층 더합니다.


사실 설정 자체는 뭐 그리 특이할 거 없습니다. 이제껏 다른 SF 소설에서 여러 번 반복했던 설정을 다시 활용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건 발상의 참신함이 아니라 섬세한 고증입니다. 도대체 작가의 고증과 지식 나열이 어디까지 맞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작은 수중 로봇부터 거대 항공모함에 이르기까지, 북유럽의 생물 단과 대학부터 미국의 핵심 보안 권력까지 별별 전문적인 분야가 정신 없이 등장합니다. 범지구적인 인류 위기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군인들도 방관하지 않습니다. 중반부가 넘어가면, 열강들의 안보 기관도 대대적인 문제 해결에 돌입하죠. 그 와중에 속속들이 튀어나오는 지식들은 모두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특히, 해양 생태 쪽에서는 작가가 아예 주입식 강의를 늘어놓는 듯한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책은 전반적으로 흥미 위주이고 작가가 알기 쉽게 결론을 종합해줍니다. 뭐 그리 막히는 느낌은 없습니다. 피터 왓츠의 하드 SF 소설마냥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별별 인물들이 죄다 나오지만, 그 중에서 주연 과학자 중 하나인 레온 아나워크의 경력이 제일 눈에 들어오더군요. 사실상 이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비중도 그나마 제일 많고요. 게다가 이누이트 출신의 캐나다 학자라서 부족민들의 이야기도 자주 나옵니다. 자연과 벗하고 영혼을 존중하라는 부족민의 격언도 이따금씩 흐릅니다. 그리고 그런 격언들이 현재 해양 생태, 그러니까 폐기물이 쌓이고, 생물 자원이 줄어들고, 기온 변화가 심해지는 해양 생태와 맞물립니다. 결론은 자연 보호에 동참하자는 뻔한 구호입니다. 뻔한 소리라고 해도 한 번쯤 곱씹을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다만, 너무 교과서적이라고 할까요. 작가는 통렬하게 문제를 지적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냥 전형적인 주장에 그칠 뿐, 그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테크노 스릴러 소설에서 원대한 비전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나열하는 지식에 비해 인식의 확장이 한참 못 미치는 건 너무 아쉽더군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충분하니까…. 나무랄 건 없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면, 드디어 사건의 배후가 드러납니다. 동시에 작가는 인간 위주의 시각에서 탈피하라고 주장합니다. 중반부까지는 그래도 테크노 스릴러로 볼 수 있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 본격적인 SF 장르로 돋움합니다. 작가가 하드 SF 소설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섬세한 고증으로 발상을 뒷받침하지만, 인식 영역까지 확장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설정은 SF지만, 분위기는 테크노 스릴러라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라는 주장은 꽤나 상투적입니다. 소설 속 SETI 연구원의 말은 틀리지 않지만, 이미 여타 SF 소설에서 하도 들어온 내용이라서 진부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전복적인 사고를 주장하는 것치고 소설 줄거리는 그에 미치지 않습니다. 이왕 인간 중심주의를 탈피하는 김에 좀 더 전복적인 전개로 나갔으면 어떨까 싶네요. SF의 가장 큰 특징이 그거 아닙니까. 세상 뒤집기. 밥상처럼 엎어지고 무너지는 구세대 질서.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혁신으로 치닫지 않습니다. 그냥 기존의 질서에 약간의 새로움을 보태는 정도입니다. 이 책은 학자와 군인의 활약을 흥미 위주로 바라보는 쪽에 가까워요. 교훈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게다가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사이언스 픽션 언급은 차라리 빼는 게 낫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작중의 사건을 기존 사이언스 픽션에 비유해서 설명하는데요. 가만히 보면, 작가가 사이언스 픽션을 그리 잘 아는 것 같지 않더군요. 작중에 언급하는 작품은 대부분이 유명세 높은 대중 매체입니다. 인간 중심 사고를 탈피하라고 주장할 정도면, 좀 더 심도 있는 작품을 근거로 삼아야 할 텐데…. 그냥 대중 매체만 줄줄 늘어놓는 게 역효과를 일으킵니다.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그저 깝친다고 할까요. 그 탓에 소설이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다소 가벼워 보입니다. 아니, 기왕 미지와의 조우와 사이언스 픽션을 비유한다면, 적어도 <솔라리스>나 <스타메이커> 정도는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소설 자체는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자꾸 하고 싶지만, 이야기 전개와 세부적인 비유는 거기에 걸맞지 않습니다. 사건 전개와 세심한 고증만큼 주제까지 제대로 전달했으면 좋았을 텐데, 작가가 그런 것까지 욕심을 내지 않네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이 책은 무슨 철학 서적을 방불케 하는 두께지만, 워낙 재미있게 읽었으니까요. 좀 더 전복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죠. 뭐, 이 책은 <중력의 임무>나 <블라인드 사이트> 같은 작품이 될 마음은 없는 듯하니까요.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각 개인의 인생사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여유롭고 풍류적인 요한손, 정체성 문제로 방황하는 아나워크, 세계 최고를 노리는 주디스 리 등등의 인생살이도 볼만합니다. 너무 기술적인 내용만 보는 것도 지치는 일이죠. 특히, 호젓하고 넉넉한 요한손과 다급하고 불안정한 아나워크의 인생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노르웨이 생물학자인 요한손은 뭐 이런 학자가 다 있나 싶었네요. 작중에서 거의 완벽한 엄친아로 나오는데, 학벌 좋고, 잘 생겼고, 매너 뛰어나고, 지식만 아니라 지혜도 빛나고,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겸비했고, 여자도 잘 꼬이고, 포도주와 치즈의 부드러운 조화도 즐길 줄 알고, 요리도 끝내주고, 먹방도 잘 하고, 주말에는 호숫가 별장에서 우주를 음미하고…. 아니, 이 양반이 정말 삭막한 북유럽 출신이 맞는지? 가히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주인공 아닙니까. 해양 연구가 아니라 우주 탐사를 맡겨도 그럴 듯하겠네요. 그럼에도 요한손만 너무 튄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만큼 작가가 다양한 인물에게 조명을 비추고, 전세계적인 사건 발생에 신경을 쏟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지식의 연대가 느껴지는 책이에요.


<변종>은 너무 두꺼운 양 때문에 질릴 수 있지만, 그래도 테크노 스릴러다운 재미를 보장하는 소설입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테크노 스릴러다운 재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전통적인 인식의 전환을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걸 기대하면 오히려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걸 감안한다면, 피서철에 읽기에 딱 좋은 책입니다. 환경 보호와 외계 지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뻔하지만, 장점이 단점을 덮고도 남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바다를 바라보며 해양 테크노 스릴러를 읽는 것도 괜찮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