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충돌은 언제나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인류 역사가 사실 문명 충돌의 연속이기 때문일 겁니다. 인류사가 곧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실제로 역사책을 보면, 무슨 놈의 전쟁과 정복과 침략이 그리 많은지 지긋지긋할 정도입니다. 이런 문명의 충돌은 전혀 다른 세계가 부딪힐수록 파국이 커집니다. 비슷한 문화권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적어도 몸뚱이는 건사합니다. 하지만 거리가 멀거나, 기술 격차가 심하거나, 환경이 다른 문명들의 전쟁은 어느 한쪽을 패망으로 몰아가기 일쑤입니다. 그 결과는 멸망 같은 거창한 단어를 붙이기에 적합하며, 그래서 문명의 침공은 창작물 소재로도 끊임없이 인기를 끕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게다가 SF 쪽에서는 인류 이외에 다른 존재를 내세울 수 있기에 훨씬 잘 나가는 소재입니다. 징그럽지만 영리한 외계인,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무감각한 로봇, 기이한 능력을 부리는 돌연변이 등은 인류와 오랜 싸움을 벌였습니다.


카렐 차페크가 쓴 <도롱뇽과의 전쟁>도 그런 작품입니다. 인류와 도롱뇽이 만나는데, 이들은 흔히 보는 본능적인 양서류가 아닙니다. 키는 작지만 그래도 사람에 미칠 정도입니다. 엄지는 없지만 손가락으로 사물을 움켜쥐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도구를 쓰고 건물을 짓고 작업을 하는 것처럼 도롱뇽도 이게 가능합니다. 일견 우둔한 것 같지만, 지능도 상당히 뛰어납니다. 복잡한 사고로 미래를 예측하고, 매끄러운 발음으로 말도 하고, 자기네끼리 사회 체계를 규정합니다. 인류는 이런 도롱뇽을 만난 이후, 각양각색으로 부려 먹습니다. 진주 채취부터 간척 사업까지 도롱뇽은 인류 사회의 중요한 기반이자 노동력입니다. 하지만 도롱뇽들은 언제까지나 인류의 노동자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주장하고, 인류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결국 불화를 일으킵니다. 비록 전면전을 펼치지 않지만, 전쟁이 벌어질 게 뻔합니다. 제목처럼 도롱뇽, 그러니까 지적인 양성류와의 전쟁이죠.


어찌 보면 좀 깨는 설정이긴 합니다. 카렐 차페크 이전이든 이후든, 다른 종족과의 전쟁 이야기는 SF 세계에서 흔합니다. 그런 종족들은 인류의 안녕을 위협해야 하므로 상당히 호전적으로 나옵니다. 외계인이든, 로봇이든, 돌연변이든 무시무시하고, 멋지고, 경이로워야 합니다. 하지만 작중의 도롱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별로 뽀대도 안 납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도롱뇽이란 동물은 인지도 높은 마스코트가 아닙니다. 비단 도롱뇽만 아니라 양서류 자체가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습니다. 양서류와 자주 헛갈리는 파충류의 인기를 비교하면, 거의 밑바닥 수준입니다. 파충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모방하고, 상징으로 삼습니다. 악어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괴수이며, 괴수물의 모티브로 잘 나갑니다. 도마뱀은 공룡과 닮았다는 이유 때문에 공룡의 대체재로 종종 쓰입니다. 간혹 드래곤으로 탈바꿈하죠. 뱀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북이는 두드러진 등딱지 때문에 어디에서든 돋보입니다.


이에 비해 양서류는 딱히 자랑할 점이 없습니다. 파충류만 아니라 어류, 조류, 포유류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와 두꺼비는 인류와 친숙한 양서류지만, 세계를 침공할 그릇은 못 됩니다. 두꺼비 성운에 사는 개구리 외계인이 침략하는 모 만화가 있지만, 그건 애초에 개그물이자 패러디물입니다. 양서류 자체가 사람 눈에 우스워보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이 놈들은 인류에게 뭔가 전달할 로망이 없습니다. 덩치가 작아 사람을 잡아먹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외모가 폼나는 것도 아닙니다. 특출난 능력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개그물 만화에서 왜 개구리 외계인을 썼는지 알만합니다. 우습고 우둔하고 어리석게 보이니까. 그리 심각한 위협이 아니니까. 양서류 종족은 풍자에 써먹기 좋으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렐 차페크가 왜 하고 많은 동물들 중에 도롱뇽을 차용는지 이해가 갑니다. <도롱뇽과의 전쟁>도 일종의 풍자 희극이니까요. 위협적인 동물 종족을 등장시키면, 해학성이 다소 떨어졌겠죠. 가령, 도롱뇽과의 전쟁이 아니라 '호랑이와의 전쟁'이었다면, 분위기가 많이 달랐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호랑이였다면 그리 우스꽝스러운 노동자조차 되지 않았을 듯.


카렐 차페크는 기자이자,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입니다. 한편으로 사상가이기도 하죠. 그리고 <도롱뇽과의 전쟁>은 그런 기자, 소설가, 희곡 작가, 사상가로서의 여러 면모가 녹은 작품입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지만, 곳곳에서 인터뷰, 보도, 서기문, 인용문이 끼어듭니다. 특히 이런 언론 보도는 2장 '문명을 향하여'에서 두드러집니다. 본인이 기자였으므로 이런 수완을 십분 발휘했을 겁니다. 희곡 작가이기 때문에 연극적인 분위기도 돋보입니다. 대사와 간단한 행동 묘사만으로 진행하는 부분은 정말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인간과 도롱뇽이 떠벌이거나, 사람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적 기법은 세상을 풍자하고 인류 개개인을 주목하는 시선으로 이어집니다. 이 책은 1936년에 나왔는데,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이전이고 한창 파시즘이 커가는 중이었죠. 기자였던 차페크는 세계 돌아가는 정황이 눈에 보였을 거고, 이를 좌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전쟁과 파시즘을 경계하기 위해 한 편의 풍자극을 발표했고, 그게 바로 <도롱뇽과의 전쟁>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풍자극으로 만들려면 뭔가 우둔하고 우스꽝스러운 종족이 나와야 합니다. 비장하고 참혹한 설정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그러면 전쟁과 파시즘을 성토하는 주제에 효율적이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차페크 본인이 좀 희극적인 성격이었고요. 그래서 고른 동물이 도롱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개구리나 두꺼비가 아닌 이유는 손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죠. 전쟁을 하려면 무기를 들어야 하고, 무기를 들려면 손이 필요합니다. 개구리의 손으로 총을 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도롱뇽 손이라고 편리할 건 없지만, 그래도 도구를 쥐기에는 개구리보다 낫습니다. 게다가 개구리와 두꺼비는 뒷다리가 너무 길어서 직립보행을 하면 어색해 보입니다. 도롱뇽은 비록 다리가 짧아도 직립보행한다고 설정할 수 있죠. 개구리를 인간형으로 바꾸려면 모 개그 만화처럼 인간화를 시켜야 하는데, 이건 너무 멀리 나가는 설정입니다. 어느 정도 진지함을 유지하면서 희극적으로 꾸미려면 도롱뇽만한 게 없습니다.


첫머리에서 지적했듯 문명의 충돌은 환경과의 격차가 클수록 더욱 놀랍습니다. 차페크는 그래서 해양 종족을 적으로 내보냈을 겁니다. 육지 인간과 바다 양서류의 싸움은 상당히 대조적이니까요. 서로 서식 환경이 딴판이니,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겠습니까. 작중에서도 두 종족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은 바닷속에서 숨 쉴 수 없고, 도롱뇽도 육지에서 말라 죽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거나, 도롱뇽이 물을 끼얹으면서 잠시 육지로 나올 뿐입니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으니까 양보 또한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땅이 필요하고, 도롱뇽에게는 해안이 필요합니다. 남은 건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뿐입니다. 만약 소설의 적대 종족이 어류나 포유류였다면 이런 대비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류 종족은 어차피 해저에 사니까 해안을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포유류 종족은 땅에 사니까 육지 대 바다라는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어렵습니다. 아, 어류 종족은 손이 없어서 총도 못 쏘겠군요.


줄곧 풍자물이라고 말했지만, <도롱뇽과의 전쟁>은 나름대로 충실하게 설정을 전개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지적으로 발달했는지, 왜 그 동안 인류와 마주치지 못했는지, 무리 내부의 삶은 어떠한지 살펴봅니다. 그런 설정조차 해학적이고, 사실 하드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논리정연한 부분도 있습니다. 풍자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가상의 종족으로서 소임을 다합니다. 좀 더 생물학적으로 파고 들었다면 좋겠지만, 너무 딱딱하게 쓰면 본래 목적인 해학성을 잃었겠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답게 도롱뇽 종족을 그저 전쟁으로만 비유하지 않습니다. 노동 문제, 인종차별, 소수를 향한 횡포, 파벌 싸움, 종교 논쟁까지 가상 종족을 이용해 들출 만한 사회 문제는 죄다 건드립니다. 단순히 사회적 약자나 약소 민족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만연하고 앞으로도 그럴 온갖 문제를 거론합니다. 한편으로는 옛날 소설이 제기한 문제를 보고 아직도 공감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군요. 몇 백 년 이후에도 그렇게 될지.


카렐 차페크가 어떤 생각으로 하필 도롱뇽을 골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와 크게 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문제 제기와 날카로운 시선도 대단하지만, 적대 종족 역시 딱 맞게 설정한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