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활에 대한 논쟁이 조금 과열되는 것 같아 정리할 겸 적어봅니다.
주로 조선의 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조선은 왜 활을 숭상했을까?
북방계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태조의 활솜씨 덕도 있겠지만, 다른 한가지 이유는 바로 공자 때문입니다.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공자왈, 군자는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 다만 활쏘기는 예외다.)
논어에 나오는 얘깁니다. 중국서 개봉한 영화 공자에도 보면 공자가 활 땡기는 모습이 나오죠.
원래 공자는 전쟁을 무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활쏘기는 군자의 6 예의 한가지로 꼽았습니다.
성리학빠였던 조선 양반들에게 귀가 트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겠죠.
조금 골때리는 얘기긴 한데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2 조선시대 최고의 활은 흑각궁?
조선 최고의 활은 각궁입니다. 흑각궁은 각궁의 일종입니다.
재료로 쓰인 뿔이 검은 색이면 흑각궁, 흰색이면 백각궁, 노란색이면 황각궁과 같은 식입니다.
각궁은 뿔로만 만드는 것은 아니고 소뿔과 뽕나무, 대나무, 소힘줄, 벚나무껍질 등을 접착제로 붙여서 제조하는데
역시 주 재료는 물소의 뿔입니다. 제대로 된 각궁 하나를 만드는 데 물소 뿔 2개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럼 이 물소 뿔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중국 강남, 오키나와, 일본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기르는 아시아 물소가 까만색이죠.
청나라때 우리나라를 견제하느라 한때 이 물소뿔의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 각궁을 가져다가 몰래 베껴서 만들어보려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얘기도 있고
청나라 조정이 물소뿔 쪼갠 건 정작 단속을 안해서 조각조각 쪼개서 수입을 했다던가.. 뭐 재밌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3 양반들은 다들 집에 각궁 하나씩 있었나?
위에 적은 것처럼 물소뿔은 수입품이고 엄청 귀합니다. 당연히 아무나 각궁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후궁(帿弓)입니다. 후궁은 물소뿔 쪼가리를 이용해서 만드는 활입니다.
정확히는 물소뿔의 조각을 활 안쪽에 덧대고 나머지 부분은 뽕나무로 물소뿔을 대체하는 방식입니다.
기록이 나오는 건 중종 때부터인데 성능은 거의 흑각궁에 근접해서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실질적으로 조선의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각궁은 바로 이 후궁입니다.
특히 청나라가 물소뿔을 금수시키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군용활 중에도 상당수가 후궁이었습니다.
후궁 다음으로 치는 것은 향각궁. 이름에 '鄕'자가 들어가면 대게 신토불이죠. (향악??)
향각궁은 조선 토박이 소의 뿔로 만든 활인데 성능은 각궁이나 후궁에 비해 한수 아래의 평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흑각궁, 후궁, 향각궁까지가 흔히 말하는 조선 각궁입니다.
그 다음 유명한 활은 교자궁입니다. 교자궁은 한마디로 정의됩니다. 합성목궁.
두가지 이상의 목재를 심줄로 조여서 만드는 활인데 대량생산해서 각궁과 함께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일본 전통활이 바로 이 교자궁입니다.
그 밖에 녹각궁, 죽궁, 목궁 등이 있는데 차례로 설명하자면
녹각궁은 사슴뿔 활인데 장점은 딱 하납니다. 긴 뿔을 통짜로 쓰기 때문에 사용중에 잘 안 갈라진다고 합니다.
죽궁은 대나무활로 습기에 강해서 왜구들이 많이 썼고 성능은 그럭저럭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궁은 그냥 나무활인데 성능이 후달려서 왕이 제발 이거 좀 쓰지 말라고 전교할 정도였답니다.
몇몇 기록들에 나오는 언급을 보면 각궁은 주로 군용으로 징발되고 민간에서 쓰이는 활은 거의 목궁이나 죽궁이었으며
월과군기라고 해서 지방관청들은 의무적으로 활을 제조해 중앙정부에 납품해야 했다고 합니다.
#4 쇠로 만든 활도 있다던데..
조선 활에 대한 논쟁이 붙으면 꼭 나오는 얘기가 쇠활, 즉 철궁 얘깁니다.
철궁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철궁은 실전에 쓰라고 만든 활이 아니고 힘자랑 할려고 만든 물건입니다.
실전에 사용된 기록도 없거니와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쓸모가 없거든요. 차라리 각궁을 쓰고 말지.
조선 활 논쟁에서 육량전와 예궁 얘기도 빼놓을 없습니다.
육량전은 화살이 여섯냥이라고 해서 육량전입니다. 육량이면 200그램이 넘는데 엄청 무거운 화살이죠.
이걸 어디다 썼을까요? 바로 무과 시험볼때 썼습니다.
이걸로 과녁 맞췄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허공에 쏴서 얼마나 멀리 나가나 거리 재는데 썼습니다.
즉, 용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육량전입니다. 50보 넘게 날리면 힘 좋다는 얘기 들었다고 합니다.
예궁에 관한 얘기는 사이즈 때문에 주로 나옵니다. 예궁 중에 크기가 250cm에 육박하는 활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활은 활대가 탄성체이므로 크기가 클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그런데 이름 그대로 예궁은 예식때 장식용으로 쓰려고 만든 겁니다.
실전에 예궁을 당겨서 쓴다는 것도 넌센스고 만들어진 숫자도 워낙 적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철궁, 육량전, 예궁 모두 실전용이 아닙니다.
#5 활의 가격은 집 한채?
권무석씨라고 전통 각궁장인 어르신이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옵니다.
활 값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계속 쌀 세 가마라는 겁니다. (요즘 쌀 세 가마는....)
뭐 다른 기록에는 흑각궁이 쌀 2석7두5승, 향각궁이 쌀2석 정도 했다고 하니
좀 괜찮은 물건이 세가마 정도라고 보면 얼추 맞을 것 같습니다.
쌀 세 가마의 경제적 가치는 알아서들 찾아보시길.
#6 조선은 전군이 활로 무장했나?
활과 관련해서 참고할만한 사료는 크게 세 가지 종류입니다.
첫번째는 왕실이나 양반의 저작물들, 대표적으로 승정원 일기같은 부류입니다. 여기서는 활을 어떻게 갖고놀았는지 주로 나옵니다.
두번째는 실록. 왕이 한 짓들을 적어놓는 책이다보니 왕명으로 새로운 병기를 제조한 기록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세번째는 만기요람. 이 책은 군사물자현황 및 군사배치 및 작전준비현황을 왕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1808년에 왕의 지시로 저술된 책입니다. 당대의 군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세부사항을 알기엔 좋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조금 어렵고, 만기요람이 종합적인 자료죠.
다음은 만기요람에 수록된 5군영의 활 보유량입니다.
- 훈련도감 : 총 10,558장, 이 중 흑각군궁 4,549장, 흑각후궁 401장, 교자궁 4,382장, 향각궁 125장, 별조착칠궁 32장, 죽궁 667장, 회목궁 100장, 마채궁 200장.
- 금위영 : 총 6,781장, 이 중에 흑각장궁 989장, 흑각군궁 347장, 흑각육냥궁 15장, 흑각평궁 104장, 흑각후궁 490장, 칠교자궁 170장, 교자장궁 696장, 교자궁 2,682장, 죽교자장궁 1,201장, 회목궁 87장, 노흑각대궁 15장, 노교자대궁 216장, 수노궁 499장, 궁노 239좌.
- 어영청 : 총 11,924장, 이 중에 후궁 1,990장, 장궁 1,934장, 부장궁 7장, 궁노목궁 163장, 궁노각궁 4장, 목전궁 11장, 피교자궁 67장, 회목궁 35장, 교자궁및 노등자궁 2장, 대궁 3장, 향각평궁 12장, 황각평궁 1장, 죽교자궁 2,525장, 죽궁 257장, 흑각노궁 12장, 칠교자궁 350장, 교자궁 4,551장.
- 총융총 : 총 1,091장, 이 중에 흑각궁 552장, 장궁 105장, 향각궁 5장, 흑각궁노궁 2장, 교자궁노궁 52장.
- 용호영 : 총 수량은 없고 흑각별장궁 740장, 흑각장궁 142장, 후궁 30장, 6냥궁 5장, 교자궁 760장.
도합하면 최소 3만2000장 이상.
만기요람이 기록된 1808년은 이미 조선 군대의 총기 무장 비율이 상당히 높아진 시절입니다.
동 사료의 기록만 해도 5군영 총기 보유량은 3만3904정. 활보다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 말은 총이 일반화되지 않은 더 이전 시대엔 활이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봐도 된다는 뜻이죠.
그래서인지 중세 조선의 활 보유량은 대부분 최소 5만장 정도로들 추산하시더군요.
전군 궁수화는 아니더라도,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특히 시험쳐서 뽑는 군관들은 백프로 궁수라고 보면 맞죠.
또 만기요람의 숫자로 대강 추산해보면 삼분지 일정도가 각궁이고 나머지는 나무를 쓰는 활인데
나무활 중에도 목궁이나 죽궁은 비율이 낮고 대부분 교자궁입니다. 즉, 상당히 고급활의 비중이 높습니다.
#7 한번 만든 활은 얼마나 썼을까?
만기요람에 간략하게나마 실려있습니다.
후궁, 교자궁 모두 공히 8년이 연한입니다. 즉, 만들어서 8년이 넘은 활은 폐기해도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비싼 각궁은 치장물자로 넣어두고 평시엔 나무활만 썼다고 해도 뭐 2-30년씩 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각궁의 경우 가장 큰 문제는 갈라진다는 점이죠.
각궁의 접착제로는 어교(민어 부레를 녹인 풀)을 썼는데 천연접착제는 습기에 엄청 약합니다.
물을 먹으면 쩍쩍 갈라지죠. 특히 조각조각 이어붙인 후궁 같은 것들은 장마에 아주 취약합니다.
그래서인지 훈련도감 기병들은 후궁 한자루와 습기에 상대적으로 강한 교자궁 한자루,
도합 두 자루씩 갖고다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8 활은 장인 한사람이 일년에 몇 개나 만들 수 있나?
위에 적었던 각궁장 권무석 선생님의 언급이 있습니다. 재료 말리는데 석달, 다시 가공하는데 일년 걸립니다.
숙달된 장인이 일년에 50개 정도씩 만드는데 이는 조선시대나 현재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9 영화에서 나오는 화살비.. 과연 가능했을까?
이 역시 조선군대의 보급에 관한 기준이 실려있는 만기요람을 참조해보면 대강 추론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대로 보급이 됐는지에 대해선 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만기요람에 따르면 기병을 대상으로 장전20대, 편전15대가 보급기준입니다.
(만기요람에서 보병은 활보단 주로 총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급기준은 출정해서 1회 교전에 써먹을 숫자로 잡게 마련이죠.
훈련도감의 활이 1만정이니 작정하고 활 1정당 35발씩 몰아서 쐈다면 35만발의 화살을 쏟아부을 수 있겠군요.
국궁의 연사속도는 분당 15-20발. 숙달된 궁수라면 2분 안에 35발을 모두 날려보냅니다.
(참고로 서양장궁의 연사속도는 분당 10발정도라고 합니다.)
만약 방패나 갑주를 제대로 장비하지 않은 적이라면 괴멸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적을 텐데 이게 조선 활의 주된 위력입니다.
^^
버리기 아깝다기보다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신다면 이해가 가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한 집안에서 같은 불로 한 밥을 먹는 '식구' 라는 개념과, 지나가는 나그네나 식객등... & '생구'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식구는 아실거고... 식객이나 나그네들은 그집 식구가 먹는 불로 한 밥은 먹질 못햇습니다. 딴 솥에 한 밥을 먹어야 하죠. 그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불씨로 한 밥은 그 집안의 식구들만 먹어야 했답니다. (무슨 복... 뭐 어쩌고 저쩌고 하더군요)
그리고 '생구'는 그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지만 종이나 노비... 등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 소도 '생구'라고 칭했더군요.
이만큼 소를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함부로 소는 잡지 못했지만, 만약 잡았다면 남김없이 먹었다네요......
흔히 중세 활 이야기가 나오면 성능만 나열하고 그치고 마는데, 운용 전술까지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기를 이야기할 때는 당시 사회상이나 전술 교리 등도 살펴봐야 할 텐데, 대부분은 위력이 강하니까 짱 세다! 소리만 하는군요.
소 도축에 관한 글을 하나 긁어옵니다.
“통계를 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饋, 군사들에게 음
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成均館)과 한양 5부(部)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역, 돌베개, 2003, 81면)
Panzer // 그렇군요. 불쌍한 소들.
곰늑대 // 유지보수가 그런대로 잘 됐을 거라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료도 있죠. 예를 들어 만기요람을 보면 병사들에게 무기와 갑옷을 지급하고 그것을 분실하거나 손질을 제대로 안했을 때 어떤 처벌을 내리는지에 세세히 적혀있습니다. 임란을 거치며 세워진 훈련도감이나 어영청은 직업군인들로 구성된 상비군이죠. 따라서 개인 장비의 유지보수에 대한 책임이 명확합니다. 전쟁도 안하는데 직업군인들이 뭐하겠습니까. 기름치고 조이고 닦고 그러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 군대가 근대 서양군대처럼 잘 편성된 부대였냐면 그건 또 아닙니다. 예를 들어 1800년대 말 기록에 상비친군 5000여명, 향정군 3만5000명 등이 잡혀있는데 모두 존재할 수 없는 허구 숫자들입니다. 고종대에 이르러 서류상 병력을 모두 합치면 110만명에 달하는데 그 엄청난 병력이 구름처럼 증발하죠. 특히 지방군의 경우 '알수없다'는 것이 답입니다. 수륙군기집물 같은 기록을 보면 지방관아에서 활줄을 갈고 시위를 손질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런 기록이 광범위하게 발견되는게 아니라 아주 드물게 나타납니다. 결국 1.상비군인 중앙군은 비교적 관리가 됐지만 2.지방군은 관리실태가 모두 제각각이었고 3.속오군 같은 예비대를 위한 장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손질을 열심히 했건 안했건 조선 활에 의한 전과를 찾아보면 그 기록은 넘쳐납니다.
보물 1334호인 의병진군공책 같은 자료를 보면 임란때 왜군을 상대로 의병들이 거둔 전과를 무기종류별로 구분해 기록해놓았는데 예를 들어 의병장 우배선이 거둔 전과는 참살(칼) 9건, 사살(활) 26건, 작살(도리깨 등 둔기) 11건으로 총 46건입니다. 활에 의한 전과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요. 또 다른 의병인 장몽기라는 인물을 보면 참살 5건, 사살 33건, 작살 13건으로 전체 51건 중에 활로 쏴죽인 게 33건입니다. 아시다시피 의병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죠. 그런데도 활을 저 정도로 다뤘다는 얘깁니다. ^^
제가 알고 있기로, 활만들때 쓰는 아교는 일반아교가 아닌 어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교는 소가죽으로 만든다면 어교는 민어 부레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교보다 습기에 훨씬 강하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쓸만한 양의 민어부레를 모으기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