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4세기 초에 활을 주력으로 하던 영국군과 조선군이 만나 직접 교전을 벌이게 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선 왕조의 궁사들은 영국장궁을 보고 원시적인 형태의 활이라고 비웃었을 것이고, 잉글랜드 보우맨들은 조선 각궁을 보고 장난감같은 활이라고 놀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래 글에서도 썼다시피 잉글랜드 군의 주력 무기인 잉글리시 롱 보우는 주목(朱木 Yew)으로 만듭니다. 기술적으로는 단순한 형태인 직궁(直弓)에 속하고, 활의 형태는 가운데 힘을 받는 부분이 약 4cm정도로 굵게 만들고, 양끝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가늘어집니다. 장궁의 길이는 5피트에서 6파트로 활을 쏘는 궁사들의 키보다 큰대 반해 조선각궁은 다양한 활의 형태를 보여주는 동양권의 내에서도 짧은 편에 속하는 단궁입니다. 형태는 뒤집어진 원의 모양으로 극단적인 만궁에 속하죠. 아직까지 한국의 각궁을 접해보지 못한 유럽의 군사사가들은 십자군 원정때 유럽 기사단을 공포에 떨게 만든 투르크(터키)의 활을 일류로 꼽고 있는 모양이지만 중세 한국의 각궁은 터키의 합성궁보다도 만곡도가 높으며 이 때문에 위력이 세계 일류급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장궁(long bow)는 주목을 통째로 켜서 만듭니다. 나무 한가운데의 부드러운 부분과 바깥쪽의 단단한 부분을 적당한 비율로 조절해서 탄력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제작됩니다. 활을 당기는데 소요되는 힘은 일반적인 것이 60파운드 정도(1파운드는 0.45kg) 경우에 따라서는 70~80파운드, 심할때는 110파운드 이상 올라갑니다. 물론 조선 각궁의 경우도 정량전과 같이 길이가 130cm에 달하고 당기는데 드는 힘이 100파운드 이상인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궁도에 사용되는 흑각궁의 경우는 50파운드 정도이므로, 영국 장궁은 조선 각궁에 비해 쏘는데 엄청나게 힘이 많이 드는 활입니다. 하지만 당기는데 드는 힘이 많다고 활의 위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장궁은 단일궁인 관계로 활의 효율이 높지 못해 시위를 당길 때 드는 힘을 100% 모두 화살이 받지 못하고 낭비되는 에너지가 15~30%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나 중국, 터키등에서 재료도 구하기 힘들고 만들기도 힘든 합성 재질의 활(물소뿔과 힘줄, 물고기의 부레로 만든 풀, 아교 등등의 소재와 8가지의 서로 다른 나무 재질을 합쳐서 만드는 활)을 만드는 이유가 바로 활의 효율 때문이죠. 조선시대 오리지날 각궁의 경우, 활의 효율이 장궁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합니다.

영국식 장궁 36kg의 활이 내는 화살 초속 = 합성궁(우리나라 각궁류)의 27kg의 화살 초속

이라고 합니다. 같은 35파운드활 혹은 40파운드 활이라고해도 각궁이나 합성궁이 더 화살 초속이 빠르다는 이야기죠. 다시말해 각궁의 에너지 효율이 더 좋은 셈이고, 같은 힘으로 쏘면 각궁이 더 멀리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합성궁과 단일궁의 사거리 차이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는데, 1795년 영국에서의 궁술 대회에서 투르크의 대사의 비서인 마흐모드 에펜디(Mahmoud Effendi)가 투르크의 전통 합성궁으로 화살을 482야드(약 440.7m)를 쏘자 최대사거리 200~300미터인 장궁에 익숙해져있던 그 지역의 궁수들이 기겁을 했다고 합니다. 그 투르크 인은 그가 쏜 것이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투르크의 술탄(Sultan) 셀림(Selim - 오스만 투르크의 제 9대 술탄 '냉혹자' 셀림 1세[제위 1512∼20])은 거의 그 두 배를 쏘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이죠. 최근에 미국인 장궁 사수들에 의해 마흐모드의 기록은 자주 깨지고 있지만, 만약 셀림이 정말로 972야드(약 888.8m)를 쏘았다면, 그는 여전히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규정 방식에 따른 화살 멀리 쏘기의 미국 기록은 1949년의 잭 스튜어트(Jack Stewart)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640야드(약 585.2m)라는 군요.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나라의 각궁의 경우, 장거리용 화살인 편전(便殿)을 1000보(1200미터) 까지 날렸다는 기록이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장궁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거리죠. 그런데 명심하실 것은 위의 놀라운 사거리는 전부 화살이 날아가는 최대 사거리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활들은 결단코 요즘의 저격총처럼 800~1000미터 밖에서도 사람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날아가서 떨어지는 거리(전문용어로는 비거리飛距離 라고 함)' 라는 것이지요.

영국 장궁의 최대사거리는 평가하는 사람마다 달라서 180~300야드(270미터) 정도로, 최대사거리 약 340~360m 라고 훈련 책자에 명기되어 있던 조선 각궁보다 짧은 편이지만, 장궁은 기사단의 갑옷을 근거리에서 확실하게 관통하기 위해 개발된 활이기 때문에 6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의 관통력은 장궁이 훨씬 우수합니다. 조선 각궁의 경우에는, 말이나 유럽의 기사와 같은 중장기병, 혹은 중장보병을 향해 발사할 때는 굵고 무겁고, 끝이 날카로운 화살촉을 이용해서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이 경우, 최대사거리는 약 200~ 250 미터 정도로 줄어들게 되죠. 연발사격 속도는 영국 장궁이 평균적으로 1분에 12발이었는데 조선 각궁의 경우, 15~ 16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십수년 이상의 세월을 활만 쏴온 전문 궁사들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영국 장궁과 조선 각궁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한 활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파괴력에서는 영국 장궁이 앞서고 사정거리에서는 조선 각궁이 앞섭니다. 이는 양측의 활이 주어진 여건, 다시 말하면 영국의 경우 보병들이 중장갑의 기사들을 격파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조선 각궁의 경우 보병뿐 아니라 기병까지 사용하기 쉬운 형태로 발전해왔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술적으로는 분명 합성궁인 조선의 각궁이 월등히 앞서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가격대 효과비라는 면에서는 조선 각궁처럼 복잡한 제작 과정과 다양한 재료가 필요 없는 장궁이 유리합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영국의 장궁과 조선의 각궁이 모두 보세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영국 장궁의 경우, 재료가 되는 주목은 주로 수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산 주목의 질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조선 각궁 역시 마찬가지여서 합성궁인 조선 각궁의 주재료 중 하나인 물소뿔 역시 현재의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물소가 서식하지 않기 때문이죠.

넌 내 사정권 안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