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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다 쓰는 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몇 자 적어봅니다.

 

온라인 FPS 게임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저격수가 로망스러운 병과란 말은 흔히 듣습니다. 국산 온라인 게임을 주로 소비하는 청소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성인들도 별로 다른 것 같지는 않더군요. 통계를 들라고 하면 못 들겠지만, 전반적인 사고 방식은 그런 듯합니다. 하다못해 클래스는 일반 소총수라도 들고 가는 총은 스코프 달린 저격소총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창작물들을 봐도 일반 소총수나 무전병, 정찰병, 의무병보다 저격수에게 더 많은 비중을 주는 게 흔할 정도. 전쟁영화에서도 저격 장면을 가장 박진감 넘치게 찍는 경우가 많고요.

 

그렇다면 저격수가 왜 저렇게 낭만 넘치는 병과가 된 걸까요. 답은 물론 '멋지니까'입니다. 하지만 왜 하필 다른 병과도 아니고 저격수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FPS 플레이어나 창작물들은 저격수를 마치 판타지의 소드 마스터 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소드 마스터의 특징이라면, 혼자서 엄청난 군대를 쓸어버린다는 거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아크 메이지 아니면 같은 소드 마스터일 뿐. 저격수는 혼자서 군대를 날려버릴 힘이 없습니다만, 막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아무리 소총수가 많아도, 그 뒤에 기갑부대가 버틴다 해도, 정밀 타격 기술이 발달해도 저격수가 한 번 뜨면 꽤나 고역입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총알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함부로 진군할 수는 없겠죠. 상대 저격수를 없애기 위해서 그 지역 일대를 날리지 않으려면, 해법은 같은 아군 저격수를 투입하는 방법이 유일합니다.

 

장비의 급격한 발달로 오늘날 전장에서 일개 보병이 많은 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격수는 단독으로 많을 적을 일시에 처치하지는 못할망정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병과일 겁니다. 아마 이것이 저격수가 각광을 받은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한 사람의 힘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대 전쟁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예외라고 할까요. 대물 저격총으로 혼자서 기갑부대를 날려버리면 금상첨화. (부사수가 동행한다거나 호위 소총수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은 로망스럽지 않으므로 제외하고.) 전투기 조종사도 혼자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저격소총과 전투기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비교가 불가합니다.

 

더불어 말하자면, 고독한 총잡이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병과이기도 하죠. 특성상 잠입/잠복이 필수적인데, 이렇다 보니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결국 작품의 주인공이 될 만한 고독감을 표현하기 좋습니다. 어디로 침투해서 무슨 장군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합시다. 적진으로 혼자 떠나야겠죠. 도와줄 이가 없으니 함부로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고,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합니다. 목숨을 건 단독 임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기에 전우 따위는 사치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국가를 지킨다는 사명 아래 외로움을 친구 삼아 사지(地)로 들어갑니다. 이 정도면 가히 로망 아닌가요. 특히, 대인 관계 형성 능력이 아직 발현 중인 청소년층에게 이런 고독감은 감정이입하기 쉬운 장치일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리 전투력이 높고, 고독하다 하더라도 수가 많아서야 재미 없죠. 소드 마스터가 붕어빵 찍어내듯 마구잡이로 쏟아진다면 아마 그 작품을 보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엘리트 군인이어야 하고, 저격수는 사실상 그렇습니다. 한 부대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니 필연적으로 숫자가 적고,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귀족적인 희열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자네 뿐일세!" 같은 대사를 상부에서 읊어주면 얼마나 멋집니까. 흠흠.

 

뭐,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상대를 염탐하는 근원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병과죠. '난 저 놈을 보지만, 저 놈은 나를 못 본다.' 은밀하게 엿보는 것이 인간의 욕구 중 하나라는 거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투명인간이 남을 엿보거나 여성의 알몸을 염탐하는 SF 작품이 괜히 많은 게 아니죠. 사실 이는 사냥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심리라고 합니다. 숲 속에서 혼자 망원경 들여다 보며 사냥감을 기다리는 행위는 저런 욕망을 달래기에 사냥에 중독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격수의 시초는 사냥꾼들 중 명사수만 골라서 군인으로 뽑은 거였으니. 참으로 희한(?)한 데 뿌리를 둔 병과라고도 하겠습니다.

 

대략 이런 이유 때문에 저격수가 주인공급으로 대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마 병과 체계에 큰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그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