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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원작의 소설과 영화 <로드> 내용누설 있습니다. 사실 내용누설이랄 것까진 없는 작품이나 안 보신 분께선 주의하세요.


작년에 극찬을 받았던 소설 <로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전지구적인 참사가 벌어진 이후의 일을 다루죠. 보통 이런 작품에선 생존자들이 일정한 지역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만.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 단 두 명이 미지의 목적지를 따라 여행하는 형식입니다. 내용이 딱히 복잡하진 않은데, 재앙의 원인이나 과정도 나오지 않고,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도 누구인지 자세한 언급을 피합니다. 소설은 부자가 추위에 떨며 자고,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과정만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마주치는 암담함으로 독자를 나락에 빠뜨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거는 희망을 비추며 서광을 빛내고 끝나죠. 형식이 특이하고, 희망을 제시하는 방법이 참 극적이긴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상 깊진 않았습니다. 설정 언급이 너무 부족해서요.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원작에서 더 나가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원작에 충실한 거고, 나쁘게 보자면 재해석이 없어 심심합니다. 잿빛 세상, 온통 파괴된 도심지, 폐인이 된 생존자들 이미지야 새삼스러울 건 없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개봉한 그 날 이후 장르 영화들이 이런 장면을 수도 없이 보여주었으니까요. 인류애의 타락을 이야기하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도, 마지막에 아들을 내세우며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우려내는 것도 똑같고요. 부자가 거쳐가는 과정도 사소한 몇몇 개만 제외하면 책이랑 흡사하고, 중요한 대사도 겹칩니다. 중요 배우들은 책에서 걸어 나온 듯한데, 비고 몰텐슨, 로버트 듀발의 연기는 좋습니다. 그렇기에 책을 봤을 때처럼 무난하게 봤습니다. 범상한 원작을 따라간 범상한 영화랄까요. (개인적인 기준에서 범상하다는 겁니다)

 

한 가지 큰 차이라면, 소설 막바지에 나왔던 그 장면, 인간이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묘사한 그 장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서양 윤리관으로는 터부시할만한 묘사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책보다는 영화 쪽이 더 대중적이고, 그래서 적절히 추려낸 것일 테죠. 덕분에 마지막에 비쳐야 하는 서광이 약간 바랬다는 느낌. 아울러 중간에 재앙 이전의 화창했던 시절을 잠깐씩 보여주더군요. 예상하기론 마지막에만 회상하는 식으로 보여줄 줄 알았거든요. 아들과 이야기하는 그 남자도 남자 혼자서 온 게 아니라 가족이, 그것도 개까지 몰려서 왔고. 저는 소설대로 가는 게 훨씬 나았다고 봅니다. 가족을 등장시키기보다 아버지를 대신할 남자 한 명만 보여주고, 미래 장면보다 과거 장면으로 끝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게 더 효과적인 수법이라고 봐요. 그래서 굳이 손을 들어주자면 소설 쪽이 괜찮았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완전히 나빴다는 건 아니고요.

 

소설이 심리 묘사로 내면을 중시했다면, 영화는 외적인 이미지에 더 치중합니다. 인물 심리를 전지적 시점으로 묘사하는 소설을 영화가 따라갈 수는 없겠죠. 작중 비고 몰텐슨이 독백으로 현재 심정을 전달하긴 하는데, 약간 부족한 면이 있고요. 허나 이건 소설에 비해 부족하다는 거고, 영화만으로 볼 때 시나리오와 연기는 꽤 좋았습니다. 반면, 황량한 풍경을 묘사하는 데엔 영화가 일가견이 있는데, 특히 회색 바다를 보여줄 때가 그렇더군요. 바다가 파랗지 않아 실망했다는 아들의 말이 마음에 와 닿을 정도. 얼마 안 되는 짧은 역이지만, 장님 노인 역에 로버트 듀발을 캐스팅한 것도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 단번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할까요. 소설에서는 잔잔한 인상의 인물이었는데, 영화에서는 강하게 바뀌었네요.

 

막판에 나온 남자는 가이 피어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가이 피어스더군요. 반가운 얼굴이긴 했는데, 몇 분이나 출현했는지. 언급했다시피 마지막 남자는 수상쩍은 기운도 있어야 하고,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혼자 나오는 게 더 좋았을 텐데요. 그리고 아들의 얼굴을 응시하며 끝을 맺는 엔딩은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처럼 과거 회상은 아니더라도 뭔가 여운이 남는 결말이 좋았을 것 같아요. 물론 영화는 가족을 제시했으니까 그걸로 유종의 미를 남기려고 했을 겁니다. 다만, 부모와 자녀 그리고 개까지 딸린 너무 완전한 가족이라서 기존의 암울함이 갑자기 단절된 느낌입니다. 암울함을 이어가면서도 희망을 주는 방식이 좋았을 텐데. 막판에 상투적인 미국식 엔딩으로 변질된 셈이지요. 그것도 유명배우인 가이 피어스까지 내세우면서요.

 

잔잔한 그 날 이후 형식의 영화를 찾으시거나 원작소설을 재미있게 보신 분이라면 감상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