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만화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를 보다 생각한 건데, SF 단편들은 캐릭터가 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요즘에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1900년대 중반에는 그런 작가들이 많았던 듯. 가령, 어느 한 작가가 하나의 세계관 혹은 아이디어로 일련의 단편을 쓸 경우가 있죠. 그럴 때 각 단편에 나오는 인물 성격이 사실은 비슷하다는 겁니다. 이런 단편들은 이야기 구성이나 인물 구도보다 설정과 아이디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캐릭터가 묻힌다는 평가가 대부분이고요. 혹은 작가가 설정을 위해 캐릭터를 고의로 묻는 게 아니라 실력이 없어 못 만드는 거란 비판도 있습니다. 글솜씨가 뛰어나기보다 아이디어만 빛나는 경우가 많아서 캐릭터를 창조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거죠. 대개 이런 비판은 SF 소설은 일반 문학보다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고요. 그리고 가끔은 단편만이 아니라 장편에서도 이런 사례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작가들이 정말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도 확신하기 힘들고요. 분명한 건 이러한 작품들을 찾는 독자는 말 그대로 캐릭터보다 설정을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로봇 3원칙을 제시한 아시모프는 그랜드 마스터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가끔 이런 일로 도마에 오릅니다. 확실히 장편에 나오는 인물들이 좀 비슷한 구석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아시모프는 장편보다 단편에 강한 작가고, 단편의 경우는 인물 구성에 크게 모난 부분이 없습니다. 로봇 3원칙을 설명하거나 멀티백의 작동 논리를 설명하느라 인물에 할애할 지면이 좀 적을 뿐이죠. 아시모프가 캐릭터를 못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풍자소설인 <흰 눈 사이로 달리는 기분>을 권유하겠습니다. 얼마나 독창적이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들 수 있는지 여지없이 보여주죠. 또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인 아서 클라크는, 음… 확실히 캐릭터에 신경을 안 쓰는 것 같긴 합니다. 허나 클라크가 쓰는 책은 우주의 경이에 인간이 압도 당하는 구도이므로 캐릭터가 튀면 오히려 주제를 벗어날 겁니다. 아니면 반대로 튀는 캐릭터를 만들어봤자 결국 신적인 우주에 빨려 들어가기에 애써 인물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고요. 로버트 하인라인이야 톡톡 튀는 캐릭터 열전을 펼칩니다만, 앞선 두 작가와 다르게 일련의 아이디어나 설정을 나열한다고 볼 수는 없죠.

 

마이클 클라이튼이나 톰 클랜시, 로빈 쿡 같은 작가들 또한 이 범주에 들어가죠. 마이클 클라이튼은 상업주의 과학을 꾸준히 비판하는데, 덕분에 인물 구도가 딱 정해져 있습니다. 양심적인 과학자가 모험을 겪는 주인공, 이익에만 몰두하는 기업가가 사건을 벌리고 비참한 최후를 맡는 악당, 그리고 기타 그렇고 그런 인물들. 그냥 비슷한 것도 아니고 아예 똑같아서 주연 과학자나 기업가를 바꿔도 이야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 톰 클랜시는 그래도 다양한 인물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정치/밀리터리 묘사에 치우쳐서 별로 티가 안 난다는 게 문제입니다. 안 그래도 뻣뻣하기 마련인 정치가나 군인들이 주연인 데다가 이들을 너무 현실적으로 그리기에 어쩔 때는 밋밋하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잭 라이언은 시리즈를 진행할 때마다 계속 성장하니까 다행일까요. 클라이튼에게는 이런 주인공마저 없으니까요. 로빈 쿡이나 존 그리샴은 별로 읽어본 게 많지 않아 평가는 못 하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클라이튼이나 클랜시와 같이 시리즈로 묶여서 평가를 받으니 아마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이런 작가군에 원하는 건 해당 분야의 지식을 이용한 설정이지 독창적인 캐릭터는 아니죠. 클라이튼은 최신의 과학 이슈, 톰 클랜시는 정치/군사, 로빈 쿡은 의학, 존 그리샴은 법률 등 자기 분야에서는 '빠삭한' 작가들이니까요.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 신화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코즈믹 호러를 시험하기 위한 '틀' 또한 만들었습니다. 우주적 공포를 묘사하기 위해 이 작가는 매번 똑같은 사건, 똑같은 전개, 똑같은 주인공을 사용합니다. 주인공은 항상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며, 이야기 방식은 회고이고,
 설명하는 말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각 단편들의 주인공을 서로 바꿔도 이상이 없을 만큼 판박이죠. 허나 러브크래프트 역시 아서 클라크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우주의 경이를 다루기 때문에 주인공이 튈래야 튈 수 없을 겁니다. 튀는 주인공은 분위기를 해칠지도 모르며,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차피 우주적 공포 앞에 무릎을 꿇고 마니까요. 이런 점에서 아서 클라크와 상반되면서도 같은 주제를 다루는 셈이죠. 절친한 펜팔이기도 한 로버트 하워드는 코난 단편을 썼는데, 우리나라에도 완역본으로 몇 편이 들어왔습니다. 대개 코난이 개인주의적으로 모험을 하고, 괴물과 싸우고, 결국 보물과 여자를 얻는다는 식으로 끝나는 편입니다. 코난의 위치, 모험 배경, 주변 인물들이 수시로 달라지긴 하는데, 역시나 인물 구성은 그렇게 독특한 편이 아닙니다. 코난 단편에서 중요한 건 괴물과 그 괴물을 묘사하는 작가의 글솜씨이며, 어차피 중요한 일은 코난이 혼자 다 해먹기 때문에 주변 인물이 그렇게나 튈 필요는 없어요. 뭐, 코난과 인연을 맺는 아가씨들은 성격이 각기 다르긴 합니다만, 어차피 역할은 거기서 거기….

 

인물은 분명히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허나 작품에 따라 또는 장르에 따라 인물을 활용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죠. 위에서 든 사례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