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셜록 홈즈의 매력이라고 하면, 뛰어난 관찰력과 엄밀한 논리를 꼽을 겁니다. 허나 여기에 꼭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는데, 괴팍한 인간성이 그것이죠. 홈즈의 기괴한 성격은 이 인물이 추리 밖에 모르는 수사 기계라는 걸 강조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형사나 탐정을 데려와도 홈즈가 우월해 보이는 이유는 사실 이 사람에겐 추리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결혼, 재산, 좋은 저택 등 일반인의 행복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인생과 육체가 망가져도 상관 안 합니다. 사건이 없으면 의사 동료인 왓슨이 아무리 화를 내도 집에만 틀어박혀 약물을 한다는 거야 이미 진부할 정도로 유명한 사례고요. 훌륭한 추리만 할 수 있다면요.

 

그나마 후기 단편들로 가면 성격이 좀 원만해지긴 합니다만, 애초 셜록 홈즈의 컨셉은 넌더리를 낼 만한 재수 없는 인간이었던 거죠. 데뷔작인 <주홍빛 연구>에 보면 거의 인간 말종까지는 아니더라도 왓슨이 처음 홈즈를 만나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상세히 나옵니다. 그리고 중기 단편에서 홈즈의 전형이 완성되기 전까지 저런 성격 묘사가 여러 차례 반복되고요. 우리나라에선 오랫동안 이 시리즈의 완역본이 나오지 않은 탓에 홈즈의 성격이 그랬다는 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홈즈하면 으레 정의의 사도나 범죄와 싸우는 용사쯤으로 대접했죠. 그러니까 홈즈의 인간성은 뛰어난 관찰력만큼이나 작품의 중요 요소입니다. 느긋하고 유머 넘치고 다정다감한 홈즈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이미 홈즈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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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리치가 찍은 <셜록 홈즈>의 홈즈가 낯설어 보인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는 그간 그렇게까지 잘 다루지 않았던 홈즈의 괴팍함에 초점을 맞춥니다. 수사하는 데만 골몰해서 외모도 가꾸지 않고, 집안도 엉망입니다. 머리는 항상 부스스하고, 수염도 텁수룩하죠.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에게도 쓴 소리만 하기 일쑤고, 사람이 있건 말건 집안에서 총질까지 해댑니다. 사건이 없어 우울증을 겪자 별별 약물을 다 복용합니다. 자잘한 사건들이야 많으나 홈즈는 좀 더 독특하고 이상한 사건을 원하기에 평범한 것들은 그저 경찰 소관으로 떠넘깁니다. 배역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은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만큼 추리에 중독된 매니아를 연기하는 데 이 배우의 경험이 중요했을 테니까요. 이 작품의 주무기는 그런 홈즈와 동일시된 로버트 다우니의 코믹하고도 진중한 개인기입니다. 배우 연기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여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영화 전체가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작품이 배우의 개인기에만 주목한 나머지 다른 부분을 간과했다는 겁니다. 사소한 것 하나로 그 사건의 전체를 그려가는 홈즈의 관찰력은 괴팍한 성격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관찰력과 괴팍함이 만나 작품 첫머리에서 홈즈라는 인물을 완성하고 결말까지 죽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할까요. 허나 이 영화에선 그런 관찰력이 빛나는 때가 없습니다. 작중에서 홈즈가 혼자 중얼거리며 관찰하고 그 결과를 말해주는 장면이 나오긴 합니다만. 대개 액션장면에서 그러기 때문에 홈즈의 관찰보다는 액션이 더 중요하게 튀고, 결국 관객은 두뇌 플레이보다 민첩한 몸놀림이나 날랜 격투 실력만 인상에 남습니다. 정적인 사무실이나 범죄 현장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해야 주목을 받을 텐데, 사방에서 총알이 튀고 악당들이 달려드는 와중에 중얼거리고 있으니 관객한테는 어디 그게 제대로 들릴 턱이 있나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보이는 법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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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블랙우드 묘지를 사례로 들겠습니다. 소설 속 홈즈라면 아마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몇몇 물건에 달라붙어 집요하게 관찰을 하겠죠. 다른 경찰들은 허우대가 멀쩡한 양반이 왜 저러나 싶어서 쳐다볼 테고요. 그 뒤엔 레스트레이드와 왓슨에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두 명 모두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을 할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놓친 단서를 거론하며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겠지요. 허나 영화는 홈즈의 수사를 잠깐만 보여준 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지나가 버립니다. 후반부에 그 동안 조사한 바를 낱낱이 털어놓기는 하는데,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범인이 밝혀져 도망치고, 서로 쫓고 쫓기는 와중에 일일이 설명을 붙여봐야 관객들이 귀를 기울일 턱이 없죠. 정신만 더 산란해질 뿐. 그나마 홈즈가 정적인 가운데서 관찰력을 뽐내는 게 메리 모스턴과 만나는 자리에서였는데, 이 때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영화에 나오는 홈즈는 추리력을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한 반쪽인 셈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영화만의 설정을 몇 가지 더 집어넣는데, 아이린 애들러가 그렇습니다. 본래 아이린 애들러는 <보헤미안 왕국의 스캔들> 사건에서 스쳐 지나간 이후로 다시는 볼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꾸준히 만나고, 심지어 홈즈와 아이린이 서로 좋아합니다. 에, 다시 말하지만 홈즈가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 남자가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안 보이고 추리에만 열광하기 때문입니다. 그 냉철하던 추리 기계가 사랑에 휘둘리는 꼴이 되었군요. 그리고 사건 현장에서 왓슨과 농담하는 장면들은 너무 여유가 넘칩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 골리는 걸 좋아하긴 하나 사건 현장에서는 진지한 사람이었는데요. 인물이 좀 가벼워졌고, 덕분에 이 인물이 다루는 사건들조차 좀 가볍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메리 모스턴 같은 일반인에게조차 변장을 들키는 장면은 뭐라고 할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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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왓슨은 본래 평범한 의사에 불과했는데, 홈즈와 같이 다녔다는 설정 때문인지 추리력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격투 실력이 최고입니다.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이제는 몇 명이 달려들던 놀란 격투기로 다 물리칩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액션 히어로. 결혼 때문에 홈즈를 멀리하는 건 원작과 정반대인데, 소설에선 결혼생활 중이라도 홈즈가 요청만 하면 흔쾌히 달려나갔습니다. 돌보던 환자가 있어도 다른 의사에게 맡기고, 아내가 독수공방해도 아랑곳 않고 범죄 현장으로 뛰쳐나갔죠. 그랬던 왓슨이 결혼한다고 베이커가 하숙집을 떠나려 하니 소설과 다르게 홈즈가 왓슨에게 계속 집착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소설 속에서도 왓슨에게 섭섭함을 드러내긴 하나 이 정도로 달라붙지는 않았는데요. 결혼 상대인 메리 모스턴은 <네 사람의 서명> 사건에서 처음 만나고 이 때는 <보헤미안 왕국의 스캔들> 사건이 터지기 훨씬 이전이니 시간대가 뒤죽박죽인 셈입니다. 평행세계라고 봐야죠. 가끔은 원래의 셜록 홈즈를 영화에서 홈즈와 왓슨으로 나눈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홈즈를 이론가라고 놀리며 탐정의 수사를 비웃는 방해꾼이자 미워할 수 없는 조력자인데, 영화에서는 평범한 조력자로 나옵니다. 그래도 막판에 공을 세우긴 하네요. 아마 홈즈를 때리는 장면에서는 진짜 주먹에 감정이 실렸을 듯. 그간 홈즈가 수사를 하며 런던 경시청을 비웃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아이린 애들러는 외모가 예쁘고 속은 강하다는 원작과 맞긴 한데, 갑자기 웬 전문 도둑으로 나와서 놀랐습니다. 탐정의 맞수로는 괴도가 나오는 게 좋지만, 설마 아이린을 그렇게 만들 줄 몰랐네요. 메리 모스턴은 의지 강한 여성 딱 거기까지입니다. 원작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심지 굳은 여성이나 영화에선 왓슨과 결혼한다는 것 외에 공통점은 별로. 허나 아이린 외에는 거의 파악하지 못한 홈즈의 변장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대단하군요. 이 작품의 홈즈가 좀 허술한 인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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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원작에서 나왔던 사소한 인물들이 소소하게 나오긴 합니다만. 소설을 깊이 읽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채기 쉽지 않습니다. 사건에 별 영향을 주지도 않고요. 제일 마지막에 홈즈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기대하는 그 누군가가 나오긴 하는데, 워낙 유명인사라서 출현이 별로 놀랍지는 않습니다. 나올 사람이 나왔다 정도? 분위기나 배경 그림은 꽤 그럴 듯합니다. 런던의 음울하고 칙칙한 면만을 강조해 주술이나 흑마법이 어색하지 않은 배경이네요. 허나 모르는 사람 눈에 과학은 마법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 완전히 판타지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빅토리아 시기 SF라고 볼 수도 있겠고요. 홈즈에게 바이올린 취미가 있다는 설정 때문인지 배경음악도 그런 쪽이고요. 작곡가는 한스 짐머인데, 흔히 기대했던 웅장한 군대 행직곡풍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트레이드 마크인 사슴 사냥 모자나 구부러진 담배 파이프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데, 원래 이것들은 삽화나 연극 등을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코난 도일은 홈즈가 사냥 모자를 쓴다든가 구부러진 파이프를 피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죠. 오히려 추리에만 신경 쓴다면 영화처럼 부스스해서 다니는 게 맞을 겁니다. 다만, 외형은 소설과 완전히 딴판. 깡마르고 높다란 키에 매서운 표정, 기이하게 큰 머리가 홈즈의 특징인데, 로버트 다우니와는 정반대죠. 하지만 사람은 겉보다 속이 중요한 법이니까 외모야 어쨌건 상관 없겠죠. (이 영화의 홈즈는 알맹이도 좀 부족해서 문제지만요) 바이올린을 손가락으로만 퉁기는 설정은 재치 있는 변화라고 봅니다.

 

이것도 원작 코믹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엔딩 크레딧에는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만 나옵니다. 원작 코믹스보다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빌려온 캐릭터가 맞네요. 다만, 성격이 다들 완전히 바뀌었고, 시간대도 뒤섞인 평행세계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로버트 다우니의 연기가 재미있어서 나름대로 잘 보긴 했습니다만. 셜록 홈즈 타이틀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에 속편도 나온다고 하던데, 액션 비중을 줄이고 홈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으면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