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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사냥하는 '과학자들'이지만, 과학자라고 인지하는 관객은 거의 없는 듯.]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는 1984년 이반 라이트만이 감독한 유령 퇴치물입니다. 유령이 나오니까 좀 으스스할 거고, 주술에 마법에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좀 다르죠. 분위기도 무섭다기보다는 유쾌한 편이고, 저 유명한 주제곡부터가 굉장히 신이 납니다. 고대의 주문서나 부적, 성물 등을 내세워 악귀를 몰아내는 자들과 달리 이 유령 사냥꾼들은 광선총을 사용해 일종의 전자장을 만들어 유령을 가둡니다. 여타 SF에 나오는 광선총과는 좀 다르지만, 여하튼 생긴 모습이나 효과는 영락없이 그렇죠. 아마 광선총을 쏴서 유령을 잡는 얼마 안 되는 인물일 듯. 고스트 버스터즈가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건 이들이 애초에 과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심령 현상을 공부하다 말도 안 된다며 쫓겨났고, 그 이후로도 있는 돈 없는 돈 긁어서 연구를 진행했죠. 결국 유령을 물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이후에는 유령 사냥으로 이름을 떨치며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한테 유령 사냥은 정의의 수호나 인류 보호, 악귀에 대한 복수 이런 것들과도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연구이긴 한데, 반 헬싱 같은 교수가 초자연적 존재를 탐구하는 거랑도 성격이 좀 다르고요. 대학 교수의 상업적 연구 프로젝트랄까.

 

사실 이들이 과학자로 연구하는 장면은 영화 초반에만 나오고, 동명의 다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도 딱히 비중 있게 등장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대학 연구진이었다는 사실은 곧잘 잊혀집니다. 만약 이들의 과학자적인 면모를 좀 부각시켰다면 더욱 특이한 캐릭터들이 되었겠지만, 원래 의도했던 작품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도 같습니다. 코미디를 가미한 호러 영화인데, 진지한 과학자가 3명이나 주연으로 나오면 코미디를 많이 희석했겠죠. 거기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볼거리와 액션에 초점을 맞추기에 연구실의 과학자보다 사냥터의 사냥꾼이 더 필요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사냥꾼으로써 뛰어나다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학자 태생이고, 육체적으로는 평범한 일반인과 다를 게 없거든요. 그저 광선총 들고 다니다가 재수가 좋으면 유령을 가두는 것뿐. 악귀와 싸우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지라 서로 신호가 안 맞아 실수할 때도 많고, 작전이나 전략도 초라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차라리 고스트 버스터즈는 장비 개발 및 유령 연구만 하고, 전문 훈련을 받은 경찰이나 특공대에게 사냥을 맡기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느 물리학자가 레일건을 만들었다고 해서 꼭 그 학자가 전장에 나가 레일건을 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일은 군인들에게 맡겨두면 충분하죠. 이럴 경우에 고스트 버스터즈는 연구실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영화는 무진장 재미가 없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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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려한 광선총 효과가 나오는 것도 이들이 SF 캐릭터에 가깝기 때문이죠.]

 

장르는 판타지입니다만, 흔히 SF에 나오는 과학자와는 약간 다릅니다. 우선 빌 머레이가 연기한 피터 뱅크만. 빌 머레이 캐릭터를 연상하면 딱 떠오르겠지만, 좀 능청스러운 사기꾼 정도? 이 배우가 아무리 연기 폭이 넓어도 흰 가운 입고 안경을 쓴 채 진리를 찾아 공부하는 모습은 떠올리기 어렵겠죠. 유령 사냥꾼 4인방 중 실질적인 주인공이기도 하고, 팀을 이끄는 리더 모습을 보일 때도 많으나 대학 교수 타입과는 벽을 좀 쌓고 다닙니다. 이는 레이 스탠츠 역시 마찬가지. 덜 능글맞은 대신 그만큼 순진한데 순진함이 바보스러움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논리적인 면모는 별로. 그래도 장비 개발에 별 관여를 안 하는 피터보다는 기기를 자주 만지작거리는 공대생 같은 장면이 많습니다. 이곤 스팽글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과학자로 똑똑한 두뇌, 유일한 안경, 흰 가운까지 전부 갖추었습니다. 유령 사냥꾼 4인방의 두뇌. 그렇다고 육체적 능력이 피터나 레이보다 떨어지는 건 아니니 4인방 중 머리로 보나 몸으로 보나 완전체.(?) 윈스턴 체드모어는 글쎄요, 4인방 중 유일하게 과학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유일한 흑인이죠. 뭐, 인종 차별 문제를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등장 비중으로 보면 레이, 이곤, 윈스턴이 모두 거기서 거기거든요. 전부 다 과학자면 좀 그러니까 일반인을 한 명 끼웠나 보죠. 허나 작중 묘사를 보면 과학자든 일반인이든 유령 사냥꾼으로서 역할은 별로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영화 속편을 보면 도심지 유령을 죄다 잡은 탓에 실업자가 된 고스트 버스터즈가 나옵니다. 피터는 심령 TV쇼를 진행하고, 레이와 윈스턴은 아이들 깜짝파티에 출현하죠. 대학물까지 먹은 사람들이 왜 저러나 싶기도 한데, 다시 대학으로 되돌아가 연구를 하는 사람은 이곤뿐입니다. 교수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걸 반영하는 현실 고발은 아닐 테고, 윈스턴을 빼면 다들 박사 학위도 있을 텐데, 엉터리 심령사 취급을 받거나 아이들 생일 파티에 나가 놀아주는 걸 보면 좀. 역시나 영화 분위기 때문에 이들에게 과학자란 역할을 부여하지 못한 걸까요. 성격이나 역할이 이렇게 모호할 바에야 차라리 과학자 역할은 이곤 하나에게 몰아버리고, 나머지는 죄다 다른 직업으로 구성했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머리 쓰는 일은 이곤만 하면 되고, 레이를 일반 기술자 정도로 만들면 충분히 조수가 될 수 있겠죠. 피터나 윈스턴은 아무리 봐도 머리 쓰는 일이 없으니까 몸 쓰는 직업으로 구성했어도 되었을 테고요. 소방관이나 경찰, 혹은 진짜 사냥꾼도 좋았을 테고요. 밑바닥 인생(?)을 그리는 캐릭터로 막일 노동자로 설정해도 될 테고. 그러면 성격과 직업이 어울려 4명 모두에게 충분한 개성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3명 모두 과학자로 설정하는 대신 연구 분야를 다르게 하든지요. 원래 유령 분야를 연구하는 건 이곤 혼자였는데, 나머지 2명도 연구비 타기가 만만치 않아 이곤에게 지식으로 힘을 보태면서 유령 사냥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듣자하니 2012년에 <고스트 버스터즈>가 새로이 개봉한다고 합니다. 단순한 리메이크가 될지, 설정을 새로 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새로 만드는 김에 인물 구성을 위와 같이 바꿔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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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는 심리학, 이반은 유령학(?), 레이는 공학…. 이런 식으로 구성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