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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의 플레이가 인상적입니다.]


요즘 <디어 에스더>란 어드벤처 게임이 화제인가 봅니다. 플레이 타임은 기껏해야 2시간을 못 넘길 정도로 짧은데, 대신 형식이 참 파격적입니다. 어느 한 남성이 외딴 섬을 돌아다니며, 에스더란 여인에게 편지를 낭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요. 유저는 이 남성을 조종해서 섬 여기저기를 탐사해야 합니다. 희한한 건 그 와중에 적과 싸우거나, NPC와 만나거나, 동료가 생기거나, 아이템을 얻거나, 기타 등등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게임이라면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런 요소를 애당초 구현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섬에는 주인공 남성 한 명뿐입니다. 그 남성이 하는 일이라곤 사방을 쏘다니며 에스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전부입니다. 게임은 조작하는 게 재미인 매체인데, 유저의 조작을 극단적으로 제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게임을 왜 하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섬의 풍경을 바라보며, 음악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듣는 데 있습니다. 소스 모드 엔진으로 만든 자연 환경은 크라이엔진이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자랑합니다. 잔잔히 밀려오는 물결, 아스라이 비치는 햇살, 휘날리는 잡초, 흐릿한 원경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집니다. 아무데서나 스크린샷 찍으면 곧 바탕화면이 나올 수준이에요. 특히, 3장에서 동굴 탐사를 할 때는 동굴 종유석에 비치는 푸른 빛이 꽤나 판타지처럼 신비롭습니다. 배경음악도 일품이라 애잔하면서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잘 연출합니다. 절벽이나 풀밭에 그냥 우두커니 서서 음악만 들어도 될 정도. 게임치고 그래픽과 배경음악이 안 중요한 작품은 없겠습니다만. 풍경과 음악을 살리려고 고의적으로 조작을 축소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게임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합니다.

 

한편으로 주인공이 에스더에게 들려주는 편지 내용은 꽤나 시적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게임을 안 해보고 공략 영상만 참조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저 리뷰와 코멘트를 참조하면 글이 참 서정적이라는 듯. 이 역시 풍경과 음악과 잘 어울려 게임 분위기를 스산하게 만들어갑니다. 또한 편지 내용은 단순히 시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단서도 던져줍니다. 특정 지역에 도달하면 흘러나오는 식인데, 가끔은 무작위로 나올 때도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대사라고는 이거밖에 없으므로 이 남성이 도대체 왜 섬에서 홀로 방황하는지 알아낼 얼마 안 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다만, 편지 내용으로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고, 모호한 구석도 많아서 유저는 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밝힐 수가 없지요. 열린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유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 듯합니다. 애잔한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면 비교가 되려나.

 

그러니까 이 작품은 오로지 자연 풍경과 배경음악, 서간문으로 된 플롯만 내세우는 게임입니다. 이거 말고 다른 요소는 없다고 봐도 됩니다. 어드벤처 형식이지만 다른 인물과 대화하거나 퍼즐을 풀거나 하는 과정은 없습니다. 허나 이런 단점 덕분에 유저가 느끼는 몰입감이 다른 게임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이 세상에 오직 자신만 존재하기에 구태여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눈 앞에 펼쳐진 섬과 가끔씩 들리는 음악을 오롯이 즐기면 됩니다. 주인공이 이따금 꺼내는 이야기는 유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실 달리 할 일도 없기 때문에) 유저는 주인공의 대사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어요. 치고 박고 싸우는 액션과 머리 쓰는 퍼즐이 이야기를 방해하는 요소라면, 이 게임은 이야기를 최대한 즐길 수 있는 환경을 구성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게임 소개를 보고, ‘뭐 이런 게 다 있나싶었습니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나 듣는 게임이라니, 이거야말로 비디오 노블 아닙니까. 어드벤처 게임은 몰락한 지 오래이고, 요즘 같은 시대에 과연 이런 물건이 팔릴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멀티 플레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볼륨이 방대하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걱정과 달리 게임 사이트 등의 리뷰는 호의적입니다. 유명 사이트 대부분이 1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주었고, 그 중에는 거의 만점을 주는 곳도 있습니다. 평가만 좋은 게 아니라 판매도 잘 되어서 인디 게임치고는 매출도 높다고 하고요. 아마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매력인가 봅니다. 전통적인 게임 선입견을 잠시 접어두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엔딩을 보는 순간, 책장을 덮은 것 같은 여운이 생긴다고 하네요.

 

<디어 에스더>를 보며 새삼 든 생각인데, 어드벤처 게임의 장점은 몽환적이면서도 스케일이 큰 연출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하드웨어 시스템에 한계가 있어서 커다란 스케일(웅장한 그래픽)’뛰어난 액션을 동시에 구현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텍스트 위주의 어드벤처 게임은 남는 자원을 모조리 그래픽에 쏟아 부을 수 있었어요. 요즘에는 시스템이 발달해서 스케일과 액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죠. 하지만 아직까지도 연출 면에서 어드벤처 게임을 따라갈 건 없다고 봅니다. 전투와 액션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결국 게임은 그쪽에 수렴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자극적인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고, 화면 연출보다는 액션이 더 역동적이잖아요. 반면, 어드벤처 게임은 순수하게 연출 쪽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교해보면 쉽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플레인 스케이프: 토먼트>, <아이스윈드 데일>은 서로 엇비슷한 게임입니다. 이 중에 <토먼트>는 거의 플롯 위주의 게임이기에 전투가 상당히 쉽습니다. 세 게임 중 난이도는 제일 낮을 걸요. <발더스>는 전투도 하지만 그보다 플롯 쪽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적절한 난이도를 갖추었죠. <아이스윈드 데일>은 처음부터 전투를 위한 게임입니다. 그래서 난이도가 높으며, 대신에 플롯이라고 할 만한 건 다른 두 게임보다 크게 부족합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야 방대한 플롯이지만, 저 두 게임과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겁니다. 비록 이 게임들은 롤플레잉이지만, 텍스트와 전투의 비중을 논하기에 적절해서 예를 들어 봤습니다.

 

그렇기에 <디어 에스더> 같은 게임이 호평 받았다는 게 퍽 반갑습니다. 예전에도 논의한 적이 있는데, 요즘 어드벤처 게임은 예전만큼 수작이 쏟아지지 않아요. 설사 수작이 나와도 액션과 퍼즐에 치우친 경우가 많죠. 이야기의 맛을 살린 게임이 줄었다고 할까요. 게임의 플롯 자체야 발전하는 추세입니다. 블록버스터 경향이 증가하면서 스핀 오프로 소설이나 코믹스도 나오고, 특히 오픈 월드를 표방한 MMORPG들은 방대한 텍스트를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롤플레잉 게임은 역으로 텍스트를 꼭 보지 않아도 별 지장 없습니다. 어차피 이야기 잘 읽어준다고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경험치나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싸워 처치해야 하죠. 이야기라는 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요소에 불과합니다. , 텍스트의 양 자체는 더 많아졌으나 플롯이 게임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약합니다.

 

대개 잘 만든 게임은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하다는 수식어가 붙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한 권의 단편 소설을 읽은 느낌에 가까워요. 그 정도로 비주얼이나 사운드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위에서 칭찬했던 아름다운 자연이나 훌륭한 배경음악도 결국 이야기의 상상력을 돋우는 역할이라고 봐요. 이런 게임이 단편 소설을 넘어 장편 소설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구성이 희한해서 이걸 장편으로 늘리긴 어려울 것도 같고요. 어느 정도 볼륨이 있는 게임은 플레이 시간이 30시간 정도 되죠. , 30시간 동안 쏘다니기만 하고 주인공 주절거리는 말만 듣는다면, 좀 지루할지도? 이런 걸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문제인 듯합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다면, 새로운 어드벤처 장르가 탄생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텐데.

 

사실 어드벤처 게임의 회생을 논하기에는 <디어 에스더>보다 <앨런 웨이크> 같은 작품이 더 나을 겁니다. 이쪽이야말로 정통 어드벤처에 가깝고 평가도 더 좋으니까요. <디어 에스더>는 실험작에 가깝고, 판매는 좀 잘 되었을지언정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하긴 이릅니다. 원작이 포츠머스 대학의 과제에 불과했으니까요. 그걸 고급스럽게 다듬어 상용화한 것뿐이죠. 인디 게임인 만큼 블록버스터들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고요. 허나 그럼에도 그 독특한 형식 때문에 새로운 어드벤처 장르를 구축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군요. 아직까지야 조심스럽게 예견만 하는 수준이고, 혹은 저 혼자만 그렇게 착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요. 여하튼 공략 동영상을 잠깐 봤을 뿐인데도 풍경과 음악,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