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약 후기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약은 그 작용에 따라 마취제, 환각제, 흥분제, 진정제로 분류될 수 있으며 신경계를 억제하는 마취제로는 헤로인, 아편, 모르핀 등이 있어서, 2차 대전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 통증 억제용으로서 의학적 용도 역시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감 증가와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코카인과 매스암페타민(속칭 히로뽕) 등의 흥분제, 각종 환상을 겪게 되는 리세르그산 디에밀아미드(LSD)와...

 ...이게 뭔 짓이람. 여성가족부가 뭐라 하건간에 그냥 리뷰나 가죠.



-흠, 제가 제레미 소울 빠돌이라는 사실을 말해봐야 별로 새롭지는 않겠지만...그래도 OST 너무 좋아요.

 하여간에, 무려 18년이나 된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최신작 스카이림은 발매 이전부터 많은 화제들을 몰고다녔고, 발매 이후에도 천만장 넘게 팔아치우고 2011년 게임관련 수상들을 쓸이하며 명실상부한 대작 시리즈로서의 지위를 굳혔습니다.

 저도...음, 제 취향은 아닐 것 같다고 안 하다가 어느날 계시를 받고 질러 봤습니다. 오블리비언이나 이전 시리즈는 해보진 않았지만 폴아웃 3은 진짜 재밌었는데 거의 같은 게임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죠. 스카이림은 그것과도 다른 게 울티마 시절부터의 고전적인 던전 크롤러(Dungeon Crawler)의 느낌에 더 가깝더군요.

 마을을 방문하고, 대화도 나누고 방대한 맵도 돌아다니고 산도 타고 경치 구경도 하고 하지만, 결국 제일 재밌는 건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괴물들하고 치고박고 싸우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게임의 핵심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도 들었습니다. 물론 90년대와 다르게 던전들은 전혀 미로 같지도 않고 짧고 단순하지만, 싸우는 게 너무 재밌으니까요. 멀리서 활을 쏘건, 마법을 쓰건, 검과 방패를 사용하건, 쌍수검을 쓰건, 혹은 그 모든 것들을 적당이 섞어서 사용하건 직관적인 스킬과 컨트롤 방식 덕에 손쉬우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전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일단 그게 재밌으면 게임 합격점은 되는 건데요....

 물론 그것만이 이 게임의 전부가 아니긴 합니다. 결코 아니죠. 시리즈 자체가 원래 그렇지만, 스카이림 역시 정말 방대한 게임입니다. 설정상 공간보다는 축소되어 있지만 엄청나게 넓은 맵에는 굉장히 많은 등장인물들과 구경할 거리들과 숨겨진 요소들과, 그보다 더 많은 퀘스트들이 널려 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고 10시간쯤 지나면 자기가 퀘스트를 깨나가는 속도보다 퀘스트가 쌓여가는 속도가 무섭도록 더 빠르다는데 경악하게 됩니다. 30시간쯤 지나면 웬만한 게임은 엔딩볼 무렵인데 아직 자기는 가야할 곳, 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죠. 한 200시간 정도는 되야 좀 빠짐없이 깼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어차피 엔딩도 없고, 특정 퀘스트는 무한히 반복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끝도 없지만 말예요.

 또한 공간적 넓이 이외에도, 세계관적으로도 오랜 기간 동안 시리즈가 이어져오면서 많은 배경이야기들을 쌓아낸 게임이기도 하고요. 저는 엘더스크롤이 처음이라 어떤 동네인지 감도 못 잡겠고 뭔 오블리비언 사태니 2세기 시절이니 운운하는 게 뭔 소린지 몰라서 당황했는데 인터넷 뒤져서 이들 세계관은 이런 곳이군 하고 정보 찾아다니고 공부하게까지 만들더라니까요. 불친절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신경쓰지 않아도 좋은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세계관을 눈 돌아가도록 아름다운 경치와, 훌륭한 예술적 디자인들, 끝장나는 사운드, 최고급의 OST와 지금까지 게임에 들어있던 것 중에는 가장 잘 짜여진 축에 드는(물론 실제 사람보다야 월등히 멍청하지만) 인공지능을 가진 NPC로 구현한 게임이기도 합니다. 미리 짜여진 스크립트로 구현된 장면들도 있지만 오히려 그리 짜여져 있지 않은 순간 순간이 더욱더 짜릿한 경우가 나오기도 하고,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처음 접하는 장면 장면 하나가 하나의 새로운 체험으로 느껴지는 게임이기도 합죠. 가령 이런 것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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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겨울이 드리우는 북방지대, 눈보라를 맞으며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드래곤하고 싸우고, 돌아다니다 좀 지치면 밤벌레 소리를 들으며 오로라가 드리우는 밤하늘만 올려다보며 멍하니 서있다가, 분주히 오가는 마을 사람들을 쫓아다녀보고, 퀘스트를 받고, 물건을 훔치고, 결혼하고, 장비를 새로 맞추고, 심심하면 의미없는 살인도 저질러 보고, 새로 얻은 책을 서너 페이지쯤 읽어보고, 길에서 만난 도적을 겁줘서 쫓아보내다 마음이 변해서 쫓아가서 죽이고 옷을 뺏아보기도 하고, 잔뜩 널린 아이템들 중 어느 게 팔면 더 비쌀까 챙길 걸 고민하기도 하고, 자물쇠를 따려다 마지막 남은 핀을 부러뜨리고 짜증내고, 요리를 하고, 폭포 밑에 뭔가 있을까 헤엄쳐 들어갔다가, 광산을 찾아서 장비 업그레이드, 질겁하게 센 보스 몹하고 피말리게 싸워보기도 하고, 눅눅하게 비가 내리면 맘에 안 들어서 용언으로 하늘이 개게도 만들어 보고, 그리고 길을 따라 걷다 저 멀리 보이는 집에는 뭐가 있을까 무기 빼들고 다가가 보면 뭔가 퀘스트가 하나 더....

 탐험하고, 싸우고, 이야기를 읽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경험으로 느껴지는 거죠. 스카이림은 그 모든 부분들의 합이지만, 부분의 합 그 이상으로 느껴질 만큼 유기적이고, 방대하지만 세세하며, 길지만 짧게도 즐길 수 있도록 매우 잘 구성된 게임입니다. 이에는 분명히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세계관과 게임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겠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개선된 부분들과 이 모든 것들을 잘 종합해서 한 덩어리로 뭉쳐낸 노력의 영향이 더 크겠죠.

 워낙에 넓은 게임인지라 잘 보자면 다른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보이는데, 양손에 무기나 마법을 들고 사용하는 건 바이오쇼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거기서와 거의 같은 길찾기 마법 역시 존재하죠. 또한 뉴 베가스에서처럼 두 세력의 대립을 다루고 있으며 어느 한편을 도와 도시를 탈환하는 전개까지도 있고요. 남의 것들도 빌려오면서 잘 단순화시켰고, 물론 참신한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NPC가 죽어도 그 직업을 다른 NPC가 계승한다거나, 전개에 따라서 군주가 바뀌거나, 세세한 퀘스트의 결과가 어떻게 나비효과마냥 다른 것들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 등이요. 허나 이걸 위해서 베데스다는 NPC들의 개성을 약화시키고 같은 목소리를 재탕하는 단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긴 합죠. 그래서, 스카이림에 단점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아쉬운 부분도 좀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아쉬운 것은 퀘스트적으로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선택은, 어떻게 무엇을 갖고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선택이 존재합니다만, 퀘스트로 가자면 상당수의 퀘스트는 이야기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쯤에서 분기점 하나 정도는 넣어주는 게 좋을 텐데 싶은데도 그런 게 상당히 부족한 때가 있어요. 가령 지하창고에서 마검을 찾아낸 뒤에 이걸 (약간의 도덕적 문제를 감수하고) 계속 쓸 수는 있지만, 이걸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서 봉인한다던가 하는 식의, 당연히 있으면 좋을 것이며 만들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듯한 선택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선택권이 있는 퀘스트에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눈치채기 어렵기도 하고요. 하나의 퀘스트에 그 영향이 크든 작든 그래도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선택이 존재했던 폴아웃 3과는 확실히 다른 방향인데,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하기 좀 어렵게 합니다.

 이외에도 여전히 PC용으로는 참 불편한 인터페이스, 그닥 규모가 커지지 못한 전투, 예상대로 수없이 많은 버그들, 좀더 아쉬운 걸로는 아내나 동료들의 개성을 너무 지독할 만큼 주지 않은 것이 있네요. 애초에 대량의 NPC를 등장시켜야 해서 이들을 하향평준화시킨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바이오웨어 수준으로 미주알 고주알 떠드는 것까진 기대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플레이어가 바싹 붙어다녀야 하는 캐릭터에는 좀 더 개성을 부여해줬으면 싶더군요.

 후반부 플레이 역시 좀 심심한 맛이 있습니다. 캐릭터의 성장은 제한이 있으며 돈을 잔뜩 벌어 봐야 별로 쓸 데도 없고, 던전을 탐사한다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거나 혹은 에픽 아이템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 동기 부여가 힘들죠. 물론, 아마도 이건 모드로 해결 가능해질 겁니다만...

 기타 등등, 스카이림은 완벽한 게임은 아닙니다. 반대되는 예를 이야기하자면, 저는 작년에 이미 포탈 2를 해봤고 포탈 2는 정말 단점 없이 만들어낸 게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완벽하다는 건 발전될 구석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 자신의 틀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 완벽하지 않다는 건 곧 발전될 구석이 남아 있다는 뜻이며, 엘더스크롤 시리즈가 완벽하지 않으면서도 야심차고 멋지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가상 세계를 완전하게 구현해내겠다는 그 포부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음 시리즈로 나아갈수록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IT 기술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받아 좀 더 그럴듯한 세계를 꾸려낼 수 있는 시스템과 생각으로 무장한 게임이기 때문이죠. 간단한 예로, 컴퓨터 사양만 더 좋아져도 엘더스크롤이 묘사할 수 있는 세계는 더 복잡하고 더 많은 것들로 가득 들어찬 동네일 수 있게 되는 걸요.

 만약에, 포탈 3이 나온다면 과연 포탈 2보다 나은 게임일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밸브는 능력 있는 집단이지만 확신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18년 전의 엘더스크롤 1편과 작년에 나온 엘더스크롤 5편간의 간극이 하늘과 땅 차이이듯, 18년 후에도 제가 게임을 할지, 엘더스크롤 시리즈가 여전히 나올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엘더스크롤 9편이 나온다면 그건 어떤 게임이 될 수 있을지, 얼마나 더 방대하고 그럴듯한 세상을 그려내려고 할지는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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