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지도 모르지만 동방 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모르는 게 약입니다). 개인적으로 그거에 약간 관심이
있습니다만... 스타워즈의 외전격이라는 EU에 대해 알게 되니 동방 쪽에 비해서 참 부럽게 느껴지더군요.

하나의 작품을 토대로 수많은 작가들이 참가하여 널리 퍼져나가는 세계관이라니. 생각만 해도 멋진 일입
니다. 각기 다른 주제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축을 공유하면서 축을 더욱 보강하고 근사하
게 바꾼다는 건 창작의 이상적인 형태 중에 하나겠죠. 

제가 스타워즈를 잘 모르면서도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우선 창작자들이 원래 작품을 충분히 존중하고 자기 
개성과 작품의 틀을 조화시키려는 고민 속에 창작을 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비슷하게 여러 창작자들이 적극적으로 2차 창작을 시도하는 동방 팬덤에선 작품에 전혀 다르게 접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스타워즈에 비유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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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 베이더가 x질 환자라는 소문이 갑자기 팬들 사이에 퍼집니다. 베이더와 x질 증상의 관계가 작품 속에 
드러난 적은 없지만 아무도 그런 것엔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후로 팬들 사이의 모든 대화와 모든 관련 작품
속에서 베이더는 오직 x질로만 통합니다. 그리고 만성 x질 환자들이 하나 둘 추가되어 x질은 스타워즈의 중
요한 요소이자 팬들의 애정어린 관심사 중 하나가 됩니다. 제다이와 시스의 대립이나 포스의 이치는 먼 옛날 
은하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포스를 이용할 때는 "에네르기파!"라고 외친다는 것이 팬들 
사이에 상식으로 알려집니다. 이런 잘못된 상식이 만연하는 것을 개탄한 원작 팬들이 단전에서 심법으로 포
스를 끌어올린다는 올바른(?) 지식을 전파하고 다닙니다. 물론 팬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치질이기 때문에 그
런 건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일부 열혈 팬들은 제다이들이 눈에서 빔을 쏘고 입에서 바주카를 쏜다는 사실
(...)을 내세워 논쟁을 벌입니다)

사람들은 x질 때문에 스타워즈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하고 x질을 찾아서 스타워즈를 탐구합니다. 원작은 무
시하고 x질만 좋아한다는 비판에 반성하여 모든 스타워즈 작품을 섭렵하며 x질의 증거를 찾습니다. 그리고 
ep6에서 다스 베이더가 황제를 집어던지고 루크를 구하는 장면에선 개연성이 없다고 모든 팬들이 비웃습니
다. (그들 중에 ep5를 후반까지 본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원작 설정을 존중하는 일부 팬들은 루크
에 대한 베이더의 동성애적 감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다수 팬들의 무지를 한탄합니다.

사실 다스 베이더는 x질이 걸릴 수 없는 몸일 테지만... 동방 팬덤의 방식이 적용되면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실이 됩니다. 그런 몸이 된 사연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는 항상 매끈한 엉덩이를 팬들 앞에 내
보여야 할 것이고 그의 엉덩이는 스타워즈의 상징이 됩니다. 누구도 x질에서 자유로울 순 없게 되요.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실룩실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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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점이라면 스타워즈의 세계관 확장은 공식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동방의 확장(?)은 팬들의
2차 창작(이걸 동인同人이라고 부릅니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거죠. 양 자체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입
니다만 그 영향력도 위의 비유글과 같은 맥락에서 오싹합니다. 팬들의 2차 창작이 원작을 아예 삼켜버렸
을 정도이니까요.

삼켜버렸다는 말이 의미가 불분명할 수도 있습니다만 더 적절한 표현이 안 떠오르네요. 팬들은 원작과 완
전히 다른 맥락에서 2차 창작을 하고, 2차 창작의 세력이 지나쳐서 원작을 부록으로 만들고, 때문에 맥락
이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원작을 2차 창작에서 분리해서 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현상이 반복되는 게
동방의 팬덤이거든요.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팬덤은 유례가 없을 겁니다.

이러니 작품의 일관된 매력을 살리기 위해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이들이 힘을 모으는 스타워즈 EU의 방식
을 알았을 때 먼저 들었던 느낌이 "아... 부럽구나."였습니다. 참 부러워요. 그런 식이라면 관심을 가지는
보람이 있을 텐데... 동방 프로젝트도 처음엔 재밌는 부분이 있어서 관심을 가진 작품이었습니다만, 팬덤
과 접촉한 이후로는 그저 허무할 뿐이더군요. 모든 장점이 아무에게도 발휘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장점이 되겠습니까?

※ 혹시 누군가 저에게 동방 프로젝트라는 작품을 추천하겠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지금 
거기에 새로 관심을 두어봤자 전혀 작품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작품에는 설명이 필요한데 설명
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연히 저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한 겁니다.
이 작품, 아마추어 제작이라 거의 매년 신작이 나오고 팬덤의 역사도 10년은 됐지만 작품에 대한 팬덤의 이
해도는 해가 갈수록 떨어지더군요. 이해도에 반비례해서 2차 창작의 규모만 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