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나 투척합니다. ^^


중국에서 스텔스기의 첫번째 시험비행이 실시됐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에 대한 공포? 또는 경외심이 상승하는 중입니다.

중국이 언젠가 스텔스기도 띄우고 항모전단도 띄우고 킬러위성도 띄우리란 점은 자명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덩치 큰 이웃나라에 대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해란 스텔스기의 스펙이 아니라 저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현대 중국의 성립을 이해하려면 천안문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1. 천안문 사태 이전 


천안문 사태의 발단은 1989년 4월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989년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그는 1981년 공산당 주석(나중에 총서기로 명칭이 변경됨)의 자리에 오른 뒤 덩샤오핑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의 사망을 둘러싸고 중국 정가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후야오방의 정치적 노선 때문이었습니다. 


천안문_세사람.jpg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래 중국에서는 크게 두 개의 노선이 대립해왔습니다. 바로 마오쩌둥의 계급투쟁 노선과 훗날의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실용적 개혁 노선이 그것입니다. 마오쩌둥 생전에 중국은 계급투쟁 노선의 강세로 인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개혁 노선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중국은 점차 죽의 장막을 걷고 개방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개방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몇몇 젊은 정치인들을 발탁해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후야오방이었습니다. 81년 주석으로 발탁된 후야오방은 자오쯔양 등과 함께 중국의 개방정책을 착착 진행시켜나갑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후야오방은 정치적인 역풍을 맞게 됩니다. 바로 민주화를 둘러싼 그의 시각때문이었습니다.


후야오방은 궁극적으로 중국이 공산당 일당의 독재체제를 벗어나 민주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가장 큰 후원자인 덩샤오핑과 궤도를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너무나 크고 가난하고 문맹자가 많아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맞지 않으며 오히려 혼란과 내분을 불러올 수 있다. 오직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만이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갖고 있는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고, 안정만이 국가를 강하게 하는데 필요한 경제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이것이 공산당 원로들의 생각이었고 비록 덩샤오핑이 개방정책을 지지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민주화에 대해서는 다른 원로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정치는 보스 정치이고 원로의 총애를 잃은 정치인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후야오방은 86년 베이징 학생시위에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는 이유로 87년 갑작스럽게 실각하여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89년 4월15일 국무원 회의에서 보수파와 격론을 벌이던 도중 후야오방은 심근경색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후야오방의 죽음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줍니다.
이미 민중들의 불만은 높이 쌓여있는 상황이었죠. 87년 후야오방이 실각한 뒤 개방 정책의 반작용으로 물가가 급상승하는 한편 실업률이 증가하고 공산당 간부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본격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들이었지만 중국으로써는 처음 경험하는 혼란이었고 인민들의 불만이 누적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1989년 4월22일 후야오방의 추모식이 열리던 날, 약 20만명의 중국 인민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듭니다. 시민들은 후야오방의 추모 내용 가운데 그의 정치적인 복권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데 실망과 분노를 느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시민들의 집회는 순수하게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4월24일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베이징 시내 16개 대학들이 산발적으로 휴교를 하기 시작했고, 다수 언론들이 당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천안문 광장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부정부패로 쩌든 공산당 간부의 재산 공개와 민주주의 도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 당은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시위대를 “사회적 혼란”으로 규정해버립니다. 5월로 접어들어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나서면서 사태는 장기화되기 시작합니다.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1987년 당총서기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오쯔양은 후야오방의 정치적인 동지였고 시위대에 대해 동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안문에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던 시점에 북한을 방문하는 중이었습니다. 5월17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오쯔양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안문 시위는 애국적 행동"라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공산당 내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원로들과 당 내 보수세력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자오쯔양이 중재를 위해 직접 천안문 광장에 나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단식을 중단할 것을 청했지만 학생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월20일, 당 지도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령 선포가 결정된 19일 밤, 자오쯔양은 광장에 나와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십시오.”

5월30일 인민일보는 다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사설을 내보냅니다.

이는 사실상 시위대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인민일보 사설이 나간 뒤 정부는 시위대가 CIA 및 홍콩의 반정부 조직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발표하는 한편 군에 출동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6월4일 천안문 광장을 포위한 군대는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안문 사태입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명 사망 3만명 부상, 공식집계로는 9백명이 사망하고 2만명이 부상당한 사건.
그리고 중국 민주화 세력의 싹이 완전히 제거되어버린 사건입니다.


천안문1.jpg


천안문2.jpg


Tiananmen_Tank_Man_Simpsons_2.jpg





2. 천안문 이후


천안문 사태가 벌어진 뒤 자오쯔양은 정부에서 완전히 고립되어버립니다.
덩 샤오핑과 공산당 지도부는 자오쯔양을 체포하여 가택연금에 처하는 한편 일개 상해시 시장이던 장쩌민을 은밀히 발탁합니다. 몇몇 기록들에서 장쩌민은 권력욕에 불타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실제로 장쩌민은 천안문 사태때 대다수 정치인들이 몸을 사리는 와중에 시위대에 대한 과격한 의견을 개진하고 민주세력에 동조한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함으로써 원로들의 눈에 들게 된 인물입니다. 천안문 사태 직후 13기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당 서기로 선출된 장쩌민은 1990년 덩샤오핑이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공직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의 그림자는 장쩌민을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장쩌민은 천안문사태의 수습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강경하게 처리합니다. 여학생들을 강제 수용소에 보내 성불구로 만들고 지식인들을 정신병원에 보내 강제교화시키는 등 수많은 인권유린이 자행됩니다. 심지어 천안문 진압에 참가했던 군부대마저 외부와 고립된 집단수용소로 보내버리는 편집증적인 짓들을 저지릅니다. 장쩌민은 중국인들에게 마치 '천안문 사태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것을 강요합니다. (천안문 사태, 그리고 수습과정에서 자행된 인권유린 사례는 찾아보면 끝이 없습니다. 상당수가 장쩌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입니다.)

또한 후야오방, 자오쯔양과 같이 민주화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은 기록에서 말살해 버립니다.

자오쯔양은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에 관한 공식 언급은 금기가 되어버립니다.

2005년 장례식 당시 자오쯔양을 기억하는 이들이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려 하자 정부는 이를 금지하고 경찰 병력을 대거 파견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을 감시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만든 인물은 바로 자오쯔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8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당시 정치적인 부문은 후야오방이, 경제적인 부분은 자오쯔양이 각각 맡고 있었고 시장경제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계획의 상당 부분이 자오쯔양에 의해 입안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성장은 사실 자오쯔양에게 일정부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을 장악한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 시절 측근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합니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중앙당교교장 쩡칭훙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이들의 출신지가 상하이인 까닭에 이들을 상하이방이라고 부릅니다. 덩샤오핑은 이들 상하이방의 권력 독점을 저지하고자 97년 사망하기 전에 공산주의 청년단(줄여서 공청단) 출신의 후진타오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그 결과 2003년 장쩌민이 물러난 뒤 덩샤오핑의 밑그림에 따라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오릅니다. 어찌보면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상하이방은 서로 대립구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장쩌민과 달리 공격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후진타오는 공식 석상에서 장쩌민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민주화 세력이 부활할 가능성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05년 후진타오 정권에서 이례적으로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식"이 열리며 잠시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후야오방 역시 공청단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로 그 후야오방 기념식 때 후진타오는 해외방문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었지요.  

천안문_세사람2.jpg


겸손으로미래도바꿨다고.jpg

< 미래를 바꾸긴 했나? > 


상하이방은 그들의 수장인 장쩌민이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있지만 아직 공산당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장쩌민의 최측근 쩡칭훙이 후진타오에게 국가 주석을 내놓으라며 정면 도전을 하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장쩌민이 중심이 된 상하이방이 태자당과 손을 잡고 시진핑을 차기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당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중심이 된 공청단은 리커창을 차기 국가주석으로 지원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연합 전선에 밀려 국무원 총리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하이방은 대부분 나이가 많고 점차 공청단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으므로 안팎에서 지는 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공청단은 분배와 정치개혁에 더 관심이 많은 세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반면에 상하이방은 태생부터 정치 개혁에 알러지를 일으키는 집단이므로 상하이방의 세력이 쇠퇴하는 다음 세대에 뭔가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상하이방이건 공청단이건 결국은 공산당이고 천안문의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3. 미래 


현재 중국의 모습은 80년대에 추진된 개혁개방정책의 결과 경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천안문 사태의 후유증으로 80말 90초의 공포 정치에서 한발도 더 나아간 것이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장쩌민에 의한 탄압, 그리고 후진타오의 방관적인 자세로 인해 중국 내에서는 대부분의 민주 인사들이 압살당했고 해외로 도피한 이들은 국내와 연락이 두절된 채 나이들어 죽어가고 있지요. 최근 노벨 평화상을 받은 분도 결국 중국 당국의 구금 상태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중국 내에선 공산당 나팔수들이 노벨상을 서구세력에 의한 음해라 주장하고 있고 노벨상 수상의 의미에 대한 의견 개진 같은 것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밀실정치와 인적 통치도 여전합니다. 원로들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정부 수반이 뒤바뀌는 80년대의 상황이 지금도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에 의존하는 사회이므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중국 정부가 처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우선 민주주의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바로 책임이 분산된다는 점입니다. 지지난해 수십만명이 서울 광장에 모여서 촛불시위를 했지만 그 시민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해산했습니다. 아마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정부를 전복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답했을 겁니다. 왜냐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뽑은 정부이므로 정부의 실책은 곧 국민들의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 독재정부입니다. 따라서 정책의 실패는 전적으로 공산당과 그 얼굴마담인 정부의 책임입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10% 고속성장하고 있으므로 인민들의 불만은 경제성장의 성과물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무마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 자동차를 타고 스맛폰을 들고 다니는 지금 세대는 불만이 적을 수밖에 없겠죠.

문제는 이 고속성장이 멎는 순간 발생합니다.

다른 대부분의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이 5% 미만으로 가라앉는 순간 감춰져 있던 문제들이 급격히 수면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업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빈부격차가 사회적인 이슈가 됩니다. 수천만 실업자가 도시빈민으로 변해 암적인 존재가 되고 내수진작을 위해 시장에 풀린 막대한 자금과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인해 소수 기득권층과 서민층의 격차는 넘을 수 없는 단단한 장벽이 됩니다. 전근대 시대와 마찬가지로 부도 권력도 세습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계층간 인적 교류가 중단되면 인력 누수를 막을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미래 경제의 불확실성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원고갈과 환경 변화로 인한 물가 급상승, 생필품 부족, 극단적인 경우 에너지 공급의 일시적인 중단 등이 발생할 수 있는데 세계화된 중국 경제는 이런 파도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태가 발발했을 때 수 억명의 인민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에 노출됩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중국 정부에는 돈이 넘쳐나고 인민들도 작은 파이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10년, 20년 뒤에도 여전히 그럴까요?

만약 민주사회라면 정권교체를 통해 불만을 흡수할 수 있지만 중국은 일당 독제 체제입니다. 더구나 현재 중국의 사회 시스템에서 정치적인 기득권자들은 곧 경제적인 기득권자입니다. 애초에 깨뜨릴 수 없는 고리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경련 회장들이 회합을 가진 뒤 자기들 중에 대통령을 번갈아 지명한다면 나라 꼴이 정상일까요? 지금 중국이 그렇습니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시민들의 불만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설령 공청단이 미는 리커창이 국가주석이 되었다 한들 여전히 공산당의 대다수 세력은 민주화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기득권 집단인 마당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정권을 장악한 개혁세력에 의한 단계적인 민주화가 가장 현실성 높은 대안이었겠지만 천안문사태와 장쩌민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민주화 세력은 거세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시민들의 폭발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죠. 
이럴 때 독재 정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상투적입니다.


내부적으로는 공포정치를 강화합니다.

언론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고 시민들을 납치 구금 고문합니다(삼청교육대).

또한 외부적으로는 적(북한)을 만들어 적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내부단합을 꾀합니다.

->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것들이죠. 


각하.jpg


이런 상황이 온다면 정부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사회의 효율성은 바닥을 치기 시작하며 인적통치가 강화되면서 부정부패는 막기 힘들어집니다. 국제사회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막강한 힘을 휘두르겠지만 내부 정치의 모순 때문에 대외 정책이 강경일변도로 흘러가 고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결과 경제 마찰, 군비증강, 주변국과의 대립이 일상적인 일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바로 그런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천안문 사태 때 예견된 것들입니다. 

이제 와서 저들이 이걸 바꿀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중국 정치구도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웃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걸 몇번이나 성공시켰죠. 그러나 제가 보기에 중국은 그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앞서 민주세력이 '거세'당했다고 적었습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중국의 민주화에 관여한 인사들은 모두 죽거나 미쳐버렸고 중국의 차세대들은 천안문 사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조차 모른채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화가 가능한 민주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그것이 목적성 없는 단순한 폭도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