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글 하나 투척합니다. ^^
중국에서 스텔스기의 첫번째 시험비행이 실시됐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에 대한 공포? 또는 경외심이 상승하는 중입니다.
중국이 언젠가 스텔스기도 띄우고 항모전단도 띄우고 킬러위성도 띄우리란 점은 자명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덩치 큰 이웃나라에 대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해란 스텔스기의 스펙이 아니라 저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현대 중국의 성립을 이해하려면 천안문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1. 천안문 사태 이전
천안문 사태의 발단은 1989년 4월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989년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그는 1981년 공산당 주석(나중에 총서기로 명칭이 변경됨)의 자리에 오른 뒤 덩샤오핑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의 사망을 둘러싸고 중국 정가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후야오방의 정치적 노선 때문이었습니다.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래 중국에서는 크게 두 개의 노선이 대립해왔습니다. 바로 마오쩌둥의 계급투쟁 노선과 훗날의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실용적 개혁 노선이 그것입니다. 마오쩌둥 생전에 중국은 계급투쟁 노선의 강세로 인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개혁 노선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중국은 점차 죽의 장막을 걷고 개방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개방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몇몇 젊은 정치인들을 발탁해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후야오방이었습니다. 81년 주석으로 발탁된 후야오방은 자오쯔양 등과 함께 중국의 개방정책을 착착 진행시켜나갑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후야오방은 정치적인 역풍을 맞게 됩니다.
바로 민주화를 둘러싼 그의 시각때문이었습니다.
후야오방은 궁극적으로 중국이 공산당 일당의 독재체제를 벗어나 민주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가장 큰 후원자인 덩샤오핑과 궤도를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너무나 크고 가난하고 문맹자가 많아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맞지 않으며 오히려 혼란과 내분을 불러올 수 있다. 오직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만이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갖고 있는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고, 안정만이 국가를 강하게 하는데 필요한 경제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이것이 공산당 원로들의 생각이었고 비록 덩샤오핑이 개방정책을 지지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민주화에 대해서는 다른 원로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정치는 보스 정치이고 원로의 총애를 잃은 정치인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후야오방은 86년 베이징 학생시위에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는 이유로 87년 갑작스럽게 실각하여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89년 4월15일 국무원 회의에서 보수파와 격론을 벌이던 도중 후야오방은 심근경색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후야오방의 죽음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줍니다.
이미 민중들의 불만은 높이 쌓여있는 상황이었죠. 87년 후야오방이 실각한 뒤 개방 정책의 반작용으로 물가가 급상승하는 한편 실업률이 증가하고 공산당 간부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본격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들이었지만 중국으로써는 처음 경험하는 혼란이었고
인민들의 불만이 누적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1989년 4월22일 후야오방의 추모식이 열리던 날, 약 20만명의 중국 인민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듭니다. 시민들은
후야오방의 추모 내용 가운데 그의 정치적인 복권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데 실망과 분노를 느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시민들의 집회는 순수하게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4월24일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베이징 시내
16개 대학들이 산발적으로 휴교를 하기 시작했고, 다수 언론들이 당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천안문 광장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부정부패로 쩌든 공산당 간부의 재산 공개와 민주주의 도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
당은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시위대를 “사회적 혼란”으로 규정해버립니다. 5월로 접어들어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나서면서 사태는 장기화되기 시작합니다.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1987년 당총서기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오쯔양은 후야오방의 정치적인 동지였고 시위대에 대해
동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안문에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던 시점에 북한을 방문하는 중이었습니다. 5월17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오쯔양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안문 시위는 애국적
행동"라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공산당 내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원로들과 당 내 보수세력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자오쯔양이 중재를 위해 직접 천안문 광장에 나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단식을 중단할 것을 청했지만 학생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월20일, 당
지도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령 선포가 결정된 19일 밤, 자오쯔양은 광장에 나와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십시오.”
5월30일 인민일보는 다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사설을 내보냅니다.
이는 사실상 시위대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인민일보 사설이 나간 뒤 정부는 시위대가 CIA 및 홍콩의 반정부 조직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발표하는 한편 군에 출동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6월4일 천안문 광장을 포위한 군대는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안문 사태입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명 사망 3만명 부상, 공식집계로는 9백명이 사망하고 2만명이 부상당한 사건.
그리고 중국 민주화 세력의 싹이 완전히 제거되어버린 사건입니다.
2. 천안문 이후
천안문 사태가 벌어진 뒤 자오쯔양은 정부에서 완전히 고립되어버립니다.
덩
샤오핑과 공산당 지도부는 자오쯔양을 체포하여 가택연금에 처하는 한편 일개 상해시 시장이던 장쩌민을 은밀히 발탁합니다. 몇몇 기록들에서 장쩌민은 권력욕에 불타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실제로 장쩌민은 천안문 사태때 대다수 정치인들이 몸을 사리는
와중에 시위대에 대한 과격한 의견을 개진하고 민주세력에 동조한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함으로써 원로들의 눈에 들게 된
인물입니다. 천안문 사태 직후 13기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당 서기로 선출된 장쩌민은 1990년 덩샤오핑이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공직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의 그림자는 장쩌민을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장쩌민은 천안문사태의 수습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강경하게 처리합니다. 여학생들을 강제 수용소에 보내 성불구로 만들고 지식인들을
정신병원에 보내 강제교화시키는 등 수많은 인권유린이 자행됩니다. 심지어 천안문 진압에 참가했던 군부대마저 외부와 고립된 집단수용소로 보내버리는 편집증적인 짓들을 저지릅니다. 장쩌민은 중국인들에게 마치 '천안문 사태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것을 강요합니다. (천안문 사태, 그리고 수습과정에서 자행된 인권유린 사례는
찾아보면 끝이 없습니다. 상당수가 장쩌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입니다.)
또한 후야오방, 자오쯔양과 같이 민주화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은 기록에서 말살해 버립니다.
자오쯔양은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에 관한 공식 언급은 금기가 되어버립니다.
2005년 장례식 당시 자오쯔양을 기억하는
이들이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려 하자 정부는 이를 금지하고 경찰 병력을 대거 파견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을 감시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만든 인물은 바로 자오쯔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8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당시
정치적인 부문은 후야오방이, 경제적인 부분은 자오쯔양이 각각 맡고 있었고 시장경제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계획의 상당 부분이
자오쯔양에 의해 입안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성장은 사실 자오쯔양에게 일정부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을 장악한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 시절 측근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합니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중앙당교교장 쩡칭훙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이들의 출신지가 상하이인 까닭에 이들을 상하이방이라고
부릅니다. 덩샤오핑은 이들 상하이방의 권력 독점을 저지하고자 97년 사망하기 전에 공산주의 청년단(줄여서 공청단) 출신의 후진타오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그
결과 2003년 장쩌민이 물러난 뒤 덩샤오핑의 밑그림에 따라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오릅니다. 어찌보면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상하이방은 서로 대립구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장쩌민과 달리 공격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후진타오는 공식 석상에서
장쩌민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민주화 세력이 부활할 가능성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05년 후진타오 정권에서 이례적으로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식"이 열리며 잠시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후야오방 역시 공청단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로 그 후야오방 기념식 때 후진타오는 해외방문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었지요.
< 미래를 바꾸긴 했나? >
상하이방은 그들의 수장인 장쩌민이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있지만 아직 공산당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장쩌민의 최측근 쩡칭훙이 후진타오에게 국가 주석을 내놓으라며 정면 도전을 하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장쩌민이 중심이 된 상하이방이 태자당과 손을 잡고 시진핑을 차기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당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중심이 된 공청단은 리커창을 차기 국가주석으로 지원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연합 전선에 밀려 국무원 총리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하이방은 대부분 나이가 많고 점차 공청단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으므로 안팎에서 지는 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공청단은 분배와 정치개혁에 더 관심이 많은 세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반면에 상하이방은 태생부터 정치 개혁에 알러지를 일으키는 집단이므로 상하이방의 세력이 쇠퇴하는 다음 세대에 뭔가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상하이방이건 공청단이건 결국은 공산당이고 천안문의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3. 미래
현재 중국의 모습은 80년대에 추진된 개혁개방정책의 결과 경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천안문 사태의 후유증으로 80말 90초의
공포 정치에서 한발도 더 나아간 것이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장쩌민에 의한 탄압, 그리고 후진타오의 방관적인 자세로 인해
중국 내에서는 대부분의 민주 인사들이 압살당했고 해외로 도피한 이들은 국내와 연락이 두절된 채 나이들어 죽어가고 있지요. 최근 노벨 평화상을 받은 분도 결국 중국 당국의 구금 상태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중국 내에선 공산당 나팔수들이 노벨상을 서구세력에 의한 음해라 주장하고 있고 노벨상 수상의 의미에 대한 의견 개진 같은 것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밀실정치와 인적 통치도 여전합니다. 원로들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정부 수반이 뒤바뀌는 80년대의 상황이 지금도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에 의존하는 사회이므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중국 정부가 처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우선 민주주의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바로 책임이 분산된다는 점입니다. 지지난해 수십만명이 서울 광장에 모여서 촛불시위를 했지만 그 시민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해산했습니다. 아마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정부를 전복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답했을 겁니다. 왜냐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뽑은 정부이므로 정부의 실책은 곧 국민들의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 독재정부입니다. 따라서 정책의 실패는 전적으로 공산당과 그 얼굴마담인 정부의 책임입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10% 고속성장하고 있으므로 인민들의 불만은 경제성장의 성과물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무마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 자동차를 타고 스맛폰을 들고 다니는 지금 세대는 불만이 적을 수밖에 없겠죠.
문제는 이
고속성장이 멎는 순간 발생합니다.
다른 대부분의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이 5% 미만으로 가라앉는 순간 감춰져 있던 문제들이 급격히 수면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업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빈부격차가 사회적인 이슈가 됩니다. 수천만 실업자가 도시빈민으로 변해 암적인 존재가 되고 내수진작을
위해 시장에 풀린 막대한 자금과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인해 소수 기득권층과 서민층의 격차는 넘을 수 없는 단단한 장벽이 됩니다. 전근대 시대와 마찬가지로 부도 권력도 세습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계층간 인적 교류가 중단되면 인력 누수를 막을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미래 경제의 불확실성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원고갈과 환경 변화로 인한 물가 급상승, 생필품 부족, 극단적인 경우
에너지 공급의 일시적인 중단 등이 발생할 수 있는데 세계화된 중국 경제는 이런 파도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태가 발발했을 때 수 억명의 인민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에 노출됩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중국 정부에는 돈이 넘쳐나고 인민들도 작은 파이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10년, 20년 뒤에도 여전히 그럴까요?
만약 민주사회라면 정권교체를 통해 불만을 흡수할 수 있지만 중국은 일당 독제 체제입니다. 더구나 현재 중국의 사회 시스템에서
정치적인 기득권자들은 곧 경제적인 기득권자입니다. 애초에 깨뜨릴 수 없는 고리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경련 회장들이 회합을
가진 뒤 자기들 중에 대통령을 번갈아 지명한다면 나라 꼴이 정상일까요? 지금 중국이 그렇습니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시민들의 불만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설령 공청단이 미는 리커창이 국가주석이 되었다 한들 여전히 공산당의 대다수 세력은 민주화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기득권 집단인 마당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정권을 장악한 개혁세력에 의한 단계적인 민주화가 가장 현실성 높은 대안이었겠지만 천안문사태와 장쩌민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민주화 세력은 거세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시민들의 폭발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죠.
이럴 때 독재 정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상투적입니다.
내부적으로는 공포정치를 강화합니다.
언론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고
시민들을 납치 구금 고문합니다(삼청교육대).
또한 외부적으로는 적(북한)을 만들어 적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내부단합을 꾀합니다.
->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것들이죠.
이런 상황이 온다면 정부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사회의 효율성은 바닥을 치기 시작하며 인적통치가 강화되면서 부정부패는 막기 힘들어집니다. 국제사회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막강한 힘을 휘두르겠지만 내부 정치의 모순 때문에 대외 정책이 강경일변도로 흘러가 고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결과 경제 마찰,
군비증강, 주변국과의 대립이 일상적인 일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바로 그런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천안문 사태 때 예견된 것들입니다.
이제 와서 저들이 이걸 바꿀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중국 정치구도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웃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걸 몇번이나 성공시켰죠. 그러나 제가 보기에 중국은 그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앞서 민주세력이 '거세'당했다고 적었습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중국의 민주화에 관여한 인사들은 모두 죽거나 미쳐버렸고 중국의 차세대들은 천안문 사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조차 모른채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화가 가능한 민주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그것이 목적성 없는 단순한 폭도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
한가지 걱정이라면 만약 중국이 본문과 같은 처지에 빠졌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전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 국민들의 불만과 적개심을 정부가 아닌 다른 나라로 돌려놓으려는 것이죠.
그 상대가 미국이 되든 일본이 되든간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처럼 우리나라가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조폭들의 싸움터가 된 조그만 식당처럼 말이죠.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선제공격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자원, 전략적 또는 지정학적인 이득, 국제정치위상 제고.. 그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반도 전체를 중국이 차지한다 해도 그 이득은 불명확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공격함으로써 중국이 얻는 것은 사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반격 뿐이죠. 미국과 전쟁하면 서로 소모전이므로 공멸의 길로 갑니다. 유일하게 중국이 국지전이라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건 남사군도나 대만 정도인데 대만은 아직 미국의 우산이 확고해서 건드릴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중원을 차지한다는 것은 천하를 차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고, 천하를 차지한 자가 원하는 건 그에 걸맞는 존경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대영제국이 청나라에 교역을 요청하자 청나라 황제가 물었습니다. "우리 중화에는 모든 것이 있는데 너희들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니? 서로 교환할 것이 있어야 교역이 되지." 그러자 영국 상인이 할말이 없었더랬죠.
제가 걱정하는 건 중국이 일으킬지 모르는 전쟁이 아니라 중국이 지금보다 더 외골수 독재 국가가 되어 동아시아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 결과 민초들의 삶이 팍팍해지는 겁니다. 우리 동네에서 전쟁도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다름아닌 북한이죠. 중국이 아니라.
제일 좋은 방법은 이런글들을 중국인들이 접하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루어내는 것인데,,,본문에서도 말했듯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현재상황이... 정말 공산국가 중국,북한이 아시아의 화약고입니다.
등소평이 추진한 정치 구도는 엘리트 지배 정치가 아닐까 합니다. 소수의 뛰어난 엘리트가 정권을 잡고 그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엘리트 중심의 독재 정치죠. 선거에 의한 민주 정치는 무능한 사람이 포퓰리즘에 의해 당선될 가능성도 있고, 지역 감정이나 그런 부분을 건드려서 국가가 분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엘리트 지배 체제는 (독재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단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똘똘한 사람을 계속 연이어 잘 발탁하기만 하면 효율적으로 일관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등소평 본인이 소시적에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 온 대표적인 엘리트였고, 문화대혁명 이후 초토화된 중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엘리트 위주의 개혁 개방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등소평의 판단은 잘못된 게 아니었죠.
하지만 이러한 엘리트들에 의해 독재의 가장 큰 문제는,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적 여건이 밑바닥이었던 문화대혁명 직후라면 엘리트들이 리드해주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국민들이 많이 배우고 똑똑해지고 돈 잘 벌고 그런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즉,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국가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게 되면,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죠. 구조적으로 억지로 무조건 억제하기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매우 느린 속도로나마 향후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로의 진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든 중국의 국민들은 개혁 개방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보고 있고, 그 결과 자유에 대한 가치, 민주주의에 대한 마인드도 시간이 가면 갈수도 널리 퍼지게 될 겁니다. 지금 당장은 독재가 집중력이 필요할 때 집중을 한다는 점에서 나름 효율적일 수도 있고, 경제도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이 있는 데 국가가 억지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질 수록 국민들의 정치 참여 요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몇 십 년은 독재로 막으면서 버틸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몇 백 년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죠.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중국이 완전하게 민주화되어 제대로 선거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노년에 접어들 무렵이면 지금보다는 분명 더 민주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네들 특유의 방식대로, 서둘지 않고 만만디로 진행해 가겠죠.
사족으로...
후진타오는 이번에 미국 국무장관 방중에 맞추어 진행된 스텔스 시험 비행을 사전에 몰랐다고 하네요. 국가 정상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국에서는 중국 정치 지도자들이 군부 강경파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국가 정상이 모르는 사이 군부가 마음대로 폭주하여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두 번째 사족...
민주주의는 국가의 발전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거나 또는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나 삶의 수준이 왠만큼 올라와 있는 경우에는 나름대로 작동할 수 있고, 반드시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도입이 꼭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국민들 대부분이 문맹이고, 국가 경제가 최악인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도입해도 결국 독재로 흘러가거나 또는 정정 불안이 심해지면서 혼란이 계속되는 것이 어쩌면 필연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이 그것을 절실히 원하고, 또 국가적으로 성숙이 되야 그럭저럭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죠. 여건이 안되어 있으면 민주주의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덩샤오핑의 정치감각이나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은 정말 대단합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초기에 일당독재를 포기했다면 아마 러시아꼴이 났겠죠. 결국 현시점에서는 경제분야에서 성공한 개혁을 사회로 확대해 연착륙에 성공하느냐, 혹은 독재체제 강화로 경착륙하느냐의 문제인데 관건은 <고도성장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느냐>라고 봅니다. 공산당 입장에선 그리 시간이 많은 게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처럼 경제가 팽창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은 상황에서는 그 어떤 개혁이든 먹히겠지만 신뢰가 추락하고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자칫 공산당이 정권을 잃을 수도 있고 그 결과로 뜻하지 않은 막장 혼란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수당이 정권을 잃은게 IMF때였죠~) 그리고 바로 그 고도성장이 당장 5년 뒤에라도 끝나버릴 수 있다는 데 공산당의 고민이 있습니다. 공산당 내부의 문제도 있습니다. 본문에 적은 것처럼 천안문때 싹을 잘라버린 까닭에 공산당 내부에 개혁의 동력이 없어요. 개혁을 안해도 잘먹고 잘살거든요. 어찌보면 이건 사회개혁에 있어 더 큰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만만디로 가기엔 상황이 만만치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엘리트주의란 건 굉장히 큰 유혹입니다.
그러나 말씀해주신 것처럼 지속가능하지 않은 체제라는 문제가 있지요.
독립의지가 있는 민족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지난해였던가요.. 시짱 자치구에서 소요사태 있었을 때 흥미롭게 지켜봤는데 결국 외부 세력의 간섭 없이 자체적으로 독립을 쟁취할만큼 의지가 강한 소수민족은 현재로썬 없는 것 같습니다. 티벳만해도 불교사상의 영향인지 독립을 딱히 부르짖는 것 같지 않고 (달라이라마가 방문한 적 있어서 뭔소리 하나 했더니 월드 피쓰~ 그러더군요) 종교, 언어 모두 다른 회족 사람들도 당근 몇개 던져주니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고... 그런 거죠. 중국이 한반도 통일되지 말라고 비는 것처럼 중국 분열은 그냥 우리 소망사항일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거치게 될 중국의 경제위기가 그래서 두렵습니다. 고속 성장의 뒷편엔 빈부격차와, 경제발전 속도만큼 따라와주지 못하하는 의식개혁과 시스템 개선 속도가 있습니다. 거품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크고 빠르게 생성 되겠죠. 중국경제가 연착륙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국 경제도 크게 영향을 받겠죠. 무엇보다도 공산당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할 것이고, 주변국과의 본격 마찰이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택동이 죽기 전에 개혁개방을 주은래를 통해서 개시는 했기에 훗날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가능한것 점도 있었습니다.
장택민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날 즈음해서는 당시에도 군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갑자귀 튀어나온 인물은 아니었죠...
장쩌민이 군부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는 생소하네요..원래 그 사람 이력이 경제관료쪽으로 외곽을 돌다가 80년대 들어서야 간신히 중앙 무대를 밟고 87년에 당중앙정치국 위원 자리를 얻기 때문에 천안문 직전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 당간부 중 한명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당의 주목을 받게 되는 건 천안문 당시 진보언론이었던 <세계경제도보>를 탄압한 덕분이죠. 상하이 시장만 해도 별 것 아닌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후계자감은 아니죠. 강이 군부와 관계를 맺는 건 총서기가 되고 중앙군사위 주석이 되면서부터가 아닌지요..
한가지 첨언하자면, 현대정치사를 돌이켜보건데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는 철모르는 아이와 같습니다. 쉽게 토라질 뿐만 아니라 니편 아니면 내편으로 편가르기를 좋아하죠. 이런 애새끼를 달래려면 우선 내가 자기 편이라는 걸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안그러면 더 엇나가니까요. 싸대기를 날려서 정신차리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사람대 사람이 아닌 국가대 국가에선 쉽게 가능한 방법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