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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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 2일 부터 1964년 2월 19일까지의 10살 먹은 아이의 일기를 묶은 전설의 책입니다.
이윤복 어린이는 일기를 쓸 당시 당시 대구에서 초등학교(국민학교) 4학년으로 재학 중이었고,
병든 아버지가 집에 누워서 지내는 동안 어머니가 가정불화와 생활고를 못견디고 가출한 이후
만 10세에 세 동생을 건사하는 가장이 되어서 껌팔이와 구두닦이와 구걸을 겸하여 먹고 삽니다.
6.25 이후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 최빈국으로 전세계에 구걸을 하면서 지냈던 시절,
한국 사회를 뒤덥은 절대 빈곤과 그 속에서 자리 내린 좌절감이 아주 잘 다루어져 있습니다.
글 쓴이는 불과 열 살의 나이로 껌팔이와 구걸을 하면서 배고프다고 우는 동생들을 돌보는 신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국가 경제를 염려하고, 왜 한국은 이리도 가난한가 한탄하고,
"지난 겨울에 비가 많이 내려서 보리 농사를 잡았다"라고 하면서 굶는 사람이 많은 현실을 걱정합니다.
매일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숙제 검사를 하던 학교 선생님이 아이가 쓴 일기의 처절한 내용에 주목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던 다른 선생님에게 해당 일기를 보여주면서
이 일기를 정리하여 출간하기로 합니다 - 결국 1년 뒤 책이 나왔고, 전국이 눈물바다가 되어 버리기에 이르렀죠.
이후 수 십 년 동안 한국에서 3차례, 일본에서 1회 영화화되면서 "그 시절"을 대표하는 기록문학으로 남았습니다
사실 이윤복 어린이가 겪었던 절대 빈곤의 불행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후 자녀 출산이 늘은 것에 비해 한국은 산업도 없고 일자리도 없어서 실업자가 지천이었습니다.
한국 전체가 절대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아무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죠.
쉽게 말해 나라 전체가 어찌할 바를 잘 몰라서 멍 때리고 있었다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최악의 가난 속에서 지도자도 산업화가 뭔지도 모르고 일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방법을 몰랐죠.
조금이라도 여유있는 집안에 자녀를 맡기고 허드렛일이라도 시키게 하여 입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어린이가 남의 집에 들어가 집안일을 하고 있어도 "그래도 그 집에서 잘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식이었죠.
가난한 집의 똘똘한 학생이 부자집의 그렇지 못한 친구의 공부를 돌봐주면서 그 친구 집에 드나들며 밥을 먹고,
그렇게 해서 어려운 자기집의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는 예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 방법도 모르고,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절대 빈곤 속에서 헤매던 시절입니다.
보릿고개라고들 하는 데 그것도 겨울 보리 농사가 잘 되었을 때 봄철 보릿고개를 넘기면 보리밥이 나오는 것이지,
이윤복 어린이가 걱정했던 것처럼 겨울에 눈이 아닌 비가 많이 와서 보리 농사 망치면 여름까지 다들 굶주렸습니다.
쌀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예 온 나라가 겨우 내 굶습니다. 해외에 구걸하여 들어오는 원조도 한계가 있죠.
그런 절대 빈곤 속에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이제 세계 10위 무역국이 되고 OECD 가입국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관통하여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거쳐 일하면서 경제발전의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군사 독재 시절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트라우마로 괴롭게 생각할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 빈곤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거쳐 경제가 발전한 시절은 어디까지나 찬란한 영광의 시절이자,
땀과 노력의 보상으로 절대 빈곤을 이겨냈던 자부심의 시절입니다.
"이만큼 이 나라가 발전하는 데 나도 그 당시 한 몫 했다"는 긍지를 갖게 하는 뿌듯한 기간으로 기억될 뿐이죠.
"도대체 1960년대 초반 세계 최빈국 시절의 절대 빈곤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였길래"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1963년도에 10살 이윤복 어린이가 쓴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입니다.
굶주림이 극에 달했던 시절, 먹는 것 외에 다른 문제는 큰 관심사가 아닌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 인간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는 박정희에 대한 일부 세대의 신격화를 이해하는 편입니다. 공감은 못하지만요.
당시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망하기 딱 좋은 무리수 였지만 시대와 운이 들어맞아 다행히 대성공을 거둬
지긋지긋한 가난의 고리를 끊은 시발점이 되었지요.
진짜 못먹고 못살고 못입던 시절을 끝내준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지 이해가 가죠.
경제정책의 상당 부분이 무리하고 독선적이었기에 당시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의 반대는 정당했습니다.
실패하면 완전 망하는 거니까요. 촉나라가 전군 동원해서 한중에 어택땅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기에, 당시 야당의 경공업 중심 정책으로는 가난의 고리가 끊어지지 못했을거라는 것도 자명합니다.
박정희의 무리수가 아니었으면 가난의 고리가 끊어지기 어려웠을거라는거죠.
박정희가 없이도 세계 경제 호황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도 지금과 같은 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오히려 경제성장에 걸림돌이었다. 없었으면 더 잘나갔을거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는데 이것에는 전혀 동의가 안됩니다.
그들은 1:100 확률 도박에 올인을 못했을거니까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성립이 안되는거죠.
결과적으로 성공했지만 분명 무리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거구요.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박정희나 그 측근들이 계획한게 아니라 미국 재무부의 주도하에 계획된 일입니다.
박정희는 그 특유의 카리스마와 국민 조지기로 그 계획을 실현한 것이죠.
어떻게 보면 박정희 입장에선 자신의 유일한 지원세력인 미국의 말을 충실히 따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대가로 한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미국은 그 대가로 많은 차관과 보증을 서줬습니다.
흔히 정주영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줘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미국의 지원과 보증이죠.
결론 : 보증 서주는 친구를 사귀자
사실 박정희는 그냥 '신화'죠. 여하튼 성공했고(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책이 모두 옳다고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현재의 많은 이는 박정희의 정책이 아니었어도 당시대 가난을 극복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이야기됩니다. 도리어 지금보다 내적인 성장에서 더 충실했을거라고 말이지요.
사실 현재 우리나라에 보이는 수많은 좋지 않은 모습은 모두 당시에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 결과는 풍족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바닥을 치는 행복 지수, 기록적인 자살자, 그리고 인간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저는 '때로는 돌아서 천천히 나아가는게 더 낫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른바 독재에 대한 향수를 갖게 했다는 사실만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독재가 좀 더 이어져서 완전히 파행을 가기전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종식되었기에 그 향수는 더욱 진하게 남아 있죠.
여담)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 상당 수는 이전부터 이야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경부 고속도로가 그렇죠. 고속도로, 또는 철도를 통한 물류 수송 능력의 강화는 여러가지로 이야기되었습니다. 다만 현재와 같이 서울-부산을 잇는 형태가 아니라 동서를 잇는 형태로서 이야기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동서를 연결하는게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울과 부산 사이에서 물류 교환은 크게 필요하지 않지만, 동서의 물류 교환은 매우 중요하거든요. 게다가 이를 통한 물류 교환은 이른바 지역간 대립을 줄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경부 고속도로는 지나치게 급하게 진행했죠. 마치 4대강처럼... 그 결과 완성은 되었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 도로가 되었고 그 후 수리비가 훨씬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방식은 결국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의 방식과 다를게 없었습니다. 반대는 모두 묵살하고 자기가 좋은대로 하는거죠. 그 방식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부작용이 드러나기 전에 떠나갔기에 사람들이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것이지요.
여담) 이른바 성공한 독재자가 사라진 뒤에 그에 대한 향수를 갖는 것은 전세계 어디건 마찬가지입니다. 유고슬라비아가 그랬고, 이집트가 그랬죠. 하지만 그 이후에 생겨난 수많은 비극은 바로 그 독재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그냥 여담에 대한 내용 중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에 대한 것인데요.
"동서로 연결하는 길이 더 상식적이고, 도움이 된다"는 말은 물류 관련 업계에서 십 수년 일해오면서 처음 듣습니다.
지금도 전국 네트워크를 총괄하는 물류 서비스 프로젝트를 하는 중인데... 강원도와 오고가는 물량이 가장 적습니다.
강원도는 수익성도 최악이고 차라리 버리는 게 이익 측면에서는 더 낫지만, 전국망 커버를 위해 할 수 없이 운영하죠.
서울 동쪽에는 오직 강원도 산간 지역이 있을 뿐입니다.
아주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쓸만한 항구도 없어서, 수출입에 주로 사용되는 대형 선박이 못들어와요.
동해안 쪽에 부산, 울산, 포항 위로 큰 항구 없이 해수욕장과 어항만 존재합니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서해안은 수심이 얕고 조서간만의 차가 커서, 산업용의 큰 선박이 들어오기 힘들고 그게 인천항과 목포항의 한계이죠.
대한민국의 큰 항구는 전부 다 부산, 포항, 울산 쪽에 몰려 있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해외의 원자재 수입 물량은 거의 다 경남의 항구로 들어오고, 수출품은 그 항구로 나갈 수 밖에 없는데...
그 항구들과 연결하는 길을 놓는 것보다 동서 라인으로 길을 놓는 게 어째서 더 상식적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부모님 세대에게 듣는 "니가 배고픔을 아느냐" 하는 말에는 건방섞어 "이해한다"고는 할 수 있을 지언정 "안다"고는 못하겠더이다. 당장 똑같은 경험을 한 두 사람도 다른 고통을 말할진대 세대가 다른 고통을 책으로 글로 말로 받는들 어찌 알겠습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되, 그 고통이 있었다는 자체는, 그리고 그것이 남이 쉽게 잴만큼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겪은 경험이 왜 박정희 신격화의 바탕이 되는지는 당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본문에도 써 있듯이 대한민국의 성장은 우리 아버지 세대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맞습니다. 그들은 해냈고, 옳았고, 그들이 증오하던 배고픔과 빈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만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스스로 가져야 할 자부심을 애써 억누르고 오로지 "박정희"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그런 피땀어린 노력 조차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건지는 모를 일입니다. 심하게 보면 우리네 부모님들이 일궈낸 노력의 결과를 박정희라는 개인이,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자들이 세치 혀 놀려, 혹은 무법과 총칼을 앞세워 강탈을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애써 눈을 돌려 부정하는건지는 어떻게 이해를 할래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가 선비의 나라라 겨우 세계부자나라 말석에 앉는 정도는 별로 자부심 세울 일도 아니기 때문인걸까요?
자기들 마음대로 밥 한 술의 대가로 독재를 선택한 이들이 지금 와서 그 밥 한 술 이야기 꺼내며 독재를 대물림하려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인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 말 안 들어 먹는다며 방방뛰는 노인들의 굶주렸던 과거는 반면교사의 대상이기 보다는 기성세대의 찌질거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이면 자녀들에게 '너희에게 빌렸던 미래를 우리가 최선을 다해 닦아 두었으니 이후는 오롯이 너희 몫이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너희에게 물려 준 현실은 우리가 굶주리며 개고생해서 만든 재산이니 그걸 고마워 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갈등이 없을 수가 없겠죠.
후반부 세 문단에 나타난 주장이 없으면 더할 나위가 없는 추천사입니다. 저는 이 세 문단이 벌거지님이 꼭 필요해서 넣은 양념인데 입맛이 다른 사람한테는 요리가 안맞게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비유합니다. 재료 자체는 매우 훌륭한데 말입니다. 벌거지님이 그 시대를 '찬란한 영광의 시절'로 표현하니 남한에 사는 이의 역사관이 세대와 계층 및 정치관에 따라 '극렬'하게 갈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 시대가 여러 사람에게는 '아주 고달펐어도 악과 깡으로 버텨낸 투쟁의 나날'이었다는 생각부터 앞서지만요.
그러나, 제가 여태까지 알지 못한 책을 알리신 일에는 감사합니다. 벌거지님이 하시는 시대평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당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료 중 하나로 생각하니까요. 이 일기를 쓴 이가 진실대로 썼다고 믿어보고요. 사서 보기에는 크게 망설이나 도서관에 있다면 이 책을 꼭 찾아서 읽습니다.
할아버지는 장인댁에서 8년 간 머슴살이를 하고 할머니와 29살에 결혼하셨습니다.
할머니는 14살에 팔려가다시피 15살 많은 신랑과 결혼하셨습니다.
혼수는 수저와 젓가락과 이불이 전부였다는군요.
당시 철도공사에 막일하시면서 돈을 모아 겨우 농사지을땅을 마련해서 아버지를 교육시키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수제비는 안드십니다. 밀가루가 싫다고요.
7남매 틈바구니에서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업어키우고
외할머니는 삯일 하면서 겨우 밀가루 한 봉지 얻어서 자식들을 먹이는데
수제비를 하기도 모자라서 풀죽을 쑤어 나눠먹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계속되었다죠.
가난을 면하기 위해 장남만 고등학교 까지 보내고
나머지 식구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했다고 하죠..
'가난하면 어떠냐 민주화가 중요하지. ' 라는 말이 아주 가끔 들리기는 하는데..공감합니다. 가난을 모르는 저는요.
그렇지만 가난의 한복판에서 시대를 헤쳐온 분들에게는 먹힐지는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