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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앙보다 청소년 연애에만 치중하여 비판을 받는 책입니다.]


<헝거 게임>과 <다이버전트> 그리고 <메이즈 러너>. 요즘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잘 나간다는 디스토피아 내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다이버전트> 시리즈는 평가가 박하지만 괜찮은 흥행이고, <메이즈 러너>는 매끈하게 뽑혔고 수익 실적도 좋았죠. <헝거 게임>이야 말하면 입이 아픈 대박이고요. 이들은 모두 원작소설이 있으며, 하나같이 인기작입니다. 베스트셀러니까 영화화를 진행했겠죠. 설정이나 주제, 연출이 다들 비슷한데, 일단 암울한 미래가 배경입니다. 세계가 확 망했거나 아니면 폭압적인 지배자들이 군림하죠. 억압이 판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계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목숨은 우습게 아는지라 기괴한 시합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인생을 극단적으로 선택합니다. 주인공은 어른들의 냉철하고 폭력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자라나는 청소년이고, 절박한 생존 위협을 받습니다. 또래와 경쟁하거나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잘못된 세상에 도전하고 수정펀치를 날립니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그럴 듯한 설정이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많습니다. 배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지만, 멸망한 세계나 정치 체계에 관해서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 죽이는 시합을 벌이든, 인간을 부품처럼 다루든, 미로에 가둬놓고 생존 게임을 벌이든, 결론은 청소년들의 로망으로 끝납니다. 특히 이 분야의 대표작인 <헝거 게임>은 로맨스가 너무 튀는 나머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들러리라는 말을 듣습니다. 소녀와 소년이 서로에게 내미는 애정만 중시할 뿐,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로맨스를 강조하는 역할에 그칩니다. 아무래도 못된 어른들이 득실거릴수록 아이들의 사랑과 우정이 돋보이니까요. 그래서 본격적인 대재앙 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실망을 안겨 주고요. 그렇다고 너무 날선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꼭 암울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애초부터 로맨스 소설을 작정하고 쓴 것 같거든요. 처음부터 콩닥거리는 철부지 연애가 목적이죠.


이런 부류의 소설들은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불리나 봅니다. 위에 거론한 세 소설 이외에도 여러 영어덜트 소설이 영화로 나왔죠. <뷰티풀 크리처스>와 <쉐도우 헌터스> 같은 (영화로는 그리 흥행하지 못한) 어반 판타지도 있고, 그 이전에도 <트와일라잇>이 혁명을 일으켰죠.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처럼 장르와 가깝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견인도시> 시리즈는 소설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스팀펑크의 재미를 다시금 확인시켰고, 피터 잭슨이 제작한다고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여러 장르와 순문학이 혼합되었지만, 아무래도 설정과 볼거리 면에서 디스토피아와 어반 판타지가 제일 튀나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거나 흡혈귀가 판치는 설정이 한창 민감한 감수성을 훨씬 자극할 테니까요. 그래서 골수 장르 독자들의 이목이 몰리고, 의외로 그리 대다한 설정이나 주제가 없어서 골수 독자들은 실망했고, 극단적인 비판으로 이어졌겠죠. 하드 SF 독자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난하거나 테크노 스릴러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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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청소년용 우주판 생존물입니다. 피위와의 알콩달콩은 덤.]


SF 쪽에서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금방 떠오르는 작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로버트 하인라인입니다. 아니, 사실 하인라인 소설은 영어덜트라고 부르지 않죠. 하인라인 청소년(주브나일) 소설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덜트 소설은 12~18살 주인공이 등장해 활약하는데, 하인라인 소설들도 그렇습니다. 영어가 약한지라 영어덜트와 주브나일이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 10대와 청소년의 어감 차이 정도 되려나요. 어쩌면 누군가가 틴에이지 SF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지 모르겠네요. 영어덜트와 주브나일과 틴에이지가 한꺼번에 나오면 헛갈리지 않을지? 명칭을 뭐라고 하든지 하인라인은 여러 편의 청소년 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로켓 우주선 갈릴레오>부터 <우주의 개척자>를 거쳐 <은하를 넘어서>까지 12편을 썼습니다. 하나같이 주제가 비슷한데, 소위 우주판 보이 스카웃이라고 부르죠. 청소년 주인공이 어떻게든 우주로 나가서 이래저래 활약하고 별을 탐험하는 내용입니다.


하인라인 청소년 소설에서는 10대의 로망이 사방에서 꿈틀거립니다. 우주판 보이 스카웃이라고 괜히 불리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몇몇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보이 스카웃 단원이거나 엇비슷한 단체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보니, 요즘 아이들은 스카웃 단원으로 가입하는지 모르겠군요.) 주인공은 상당히 똑똑하고, 재능이 넘치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우주를 동경하며, 그래서 천문학과 공학 지식이 해박합니다. 숱한 위기를 맞지만, 재치있는 성격과 방만한 지식으로 무사히 고비를 넘깁니다. 이야기꾼 작가가 쓴 책답게 곳곳에서 미소가 터지고, 분위기는 밝고 가볍습니다. <하늘의 터널>처럼 심각하고 암울하게 흘러가는 책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희극적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했으니까 청소년보다 청년에 가깝지만, <스타십 트루퍼스>도 명예로운 시민 임무 운운하면서 그다지 비극적으로 추락하지 않죠. 청소년이 읽으면 10대의 낭만을 채워주고, 어른이 읽으면 소년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미덕을 갖췄습니다.


의외라면 의외인데, 하인라인 청소년 소설에는 사랑이나 우정을 그렇게까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사랑과 우정이 주된 요소는 아닙니다. <은하를 넘어서>에 나오는 피위는 <여름으로 가는 문>에 나오는 리키와 함께 최고의 소녀 캐릭터가 아닐까 싶지만, 그게 주인공의 로맨스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리키는 우아한 연인이지만, 역시 로맨스는 주된 요소가 아니라 보조에 가깝죠.) 보이 스카웃답게 주인공의 활약은 탐사, 모험, 개척에 대부분 치중하며, 그 와중에 각종 과학적인 고찰과 사고 실험을 펼칩니다. 고작 10대 소년이 태양계 지식을 줄줄 늘어놓는 걸 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과학을 모르는 사람을 은근슬쩍 무시하는 말투는 살짝 기분 나쁘지만, 워낙 두근거리는 모험을 하니까 그리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주 탐사를 보고 싶은 SF 독자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인라인 청소년 소설이 <라마와의 랑데부>나 <중력의 임무>는 아니지만, 그런 소설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긁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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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는 다소 낮지만, 그래도 사회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부조리한 사회와 로맨스와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하니, <쉽 브레이커>도 떠오릅니다. 파올로 바시갈루피가 쓴 청소년 SF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제목처럼 선박 해체 노동자입니다. 세상은 파탄이 났고, 국제적 대기업이 서민의 생활상을 지배하며, 노동자들은 자기 몸이라도 팔아서 입에 풀칠하는 지경입니다. 주인공도 뭐 하나 나을 게 없어서 언제 밥줄과 목숨이 끊길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이어 갑니다. 그러다 노동자 소년은 어느 날 표류하는 재벌 소녀와 만납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를 하류층 소년이 만나는 격입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지극히 위험한 여정을 떠나죠. 기업가의 선행에 너무 의존하거나 설정을 완전히 풀어놓지 않거나 주변인의 도움에 기대는 단점이 아쉽지만, 그래도 <헝거 게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파올로 바시갈루피는 <칼로리 맨>을 비롯한 단편이나 <와인드업 걸>을 같은 장편에서 신자유주의와 시장 개방, 자본주의 팽창과 환경 오염의 부조리를 현실적이고 날카롭게 파헤쳤고, 청소년 소설에도 그런 유지를 이어갑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사회의 불합리에 저항하는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록 SF 쪽은 아니지만, 차이나 미에빌도 <언런던>이라는 청소년 판타지를 썼습니다. 위어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청소년 소설에 손을 대다니, 어떤 물건일지 의심스럽지만 역시나 걸출한 책입니다. 도심지의 온갖 쓰레기가 모여든다는 기발한 발상도 좋고, 개성만점의 괴물들도 즐비하고, 사회의 부당함을 과장하지 않고 묘사하고, 서툴게 연애와 우정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지 않습니다. 사실 청소년이 주인공이니 연애와 우정은 빠질 수 없겠지만, 그보다 장르적인 코드를 우선시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장르 코드를 써먹지 않는다면, 굳이 장르 소설을 쓸 필요가 없죠. 그냥 하이틴 로맨스를 쓰면 됩니다. <헝거 게임>처럼 대재앙으로 주연들의 애정 행각을 북돋는 방법도 그럴 듯하지만, 그냥 애정 공세를 위한 장치로 대재앙을 써먹기는 아깝잖아요. 어떤 창작물이든 간에 균형 감각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견인도시> 시리즈가 호평을 받는 이유도 단지 모험에만 머물지 않고, 멸망과 스팀펑크를 훌륭하게 접목시켰기 때문이죠.


5월은 가정의 날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청소년 SF 소설 잡담을 좀 해봤습니다. 해외 시장에서는 성인 SF 소설보다 청소년 SF 소설이 훨씬 잘 팔린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10대 시절은 한창 호기심이 왕성하기 때문에 그런 듯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청소년 SF 소설은 SF 문화의 커다란 축을 담당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