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막 까기 때문에 쓰기 쉬운 감상글입니다.

 악평이 워낙 심해서 볼까말까 고민했는데 결국 보게 되기는 하는군요.

 국내외에서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인데 사실 저는 감독도 감독이거니와, 두 번째 예고편에서 이야기를 거진 다 까발리는 바람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예상이 맞아서 아시다시피 비평가들의 융단폭격을 맞았고 흥행도 기대만큼 화끈하지는 않은 듯 하며, 이리저리 불만 섞인 말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배트맨 역할을 맡았던 벤 애플렉의 우울한 인터뷰 영상이 대유행을 타기까지 했죠.




사이먼 앤 가펑클이 좋기는 좋죠.




 이유야 웬만한 사람은 보면서 다 느낄 만한 것들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 전개, 어색한 연출, 무리한 후속작 떡밥과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인물의 행동들, 혼란스러운 주제의식, 난잡한 편집, 인터넷을 조금만 둘러봐도 이 영화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 파헤친 글들이 많으며 저도 역시 그런 대부분의 비판에 절실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저는 감독과 각본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어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폼의 연속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폼 나는 장면들의 연속이죠. 멋지게 슬로모션으로 이런 장면 나오고, 멋지게 폼 잡으면서 멋지게 들리고 싶은 대사를 하고, 굳이 일어설 때도 멋지게 천천히 일어서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런 것들이 영화 상영 내내 이어집니다. 하긴 잭 스나이더 영화는 거의 그런 식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그나마 이것들이 부담스럽거나 유치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건 다행입니다.

 문제는 단지 그뿐이라는 거죠. 즉 멋진 이야기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런 장면이 있으면 멋지겠지?’를 두 시간 반 동안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맨 오브 스틸에서 스나이더는 액션에서 제대로 된 쾌감을 느끼려면 강약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단순히 눈요깃거리로서의 액션이 효과적일 수는 있습니다만, 진짜 이야기의 일부로서 재밌는 액션이 되려면 저러다 악당이 이기는 것 아닐까 하는 긴장감과 위기가 있어야 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더라도 중간중간 쉬어가는 부분이 있어야 하며, 같은 장면의 반복이 되지 않고 눈요깃거리가 되도록 계속 변화를 주고 창의적으로 전개를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분짜리 광고를 찍는 방법으로 몇 시간짜리 장편영화를 찍는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속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의 잭 스나이더는 액션은 그나마 좀 쉬어가지만, 역시 폼나는 장면이 정말로 폼 나려면 그 전에 왜 그게 폼나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평범한 장면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광고는 몇 분간 계속 분위기만 잡다 끝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절정에 오른 클라이맥스가 최대한 멋지도록 만들어야하고, 후반에 닥쳐올 클라이맥스를 위해서 복선과 설정과 이야기들을 꾸준히 쌓아올려 폭발시킬 준비를 해나가는 지루해 보이지만 중요한 사전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은 혼란스러운 전개 속에서 그게 너무나도 결여된 영화죠. 예를 들어서...



배트맨과 슈퍼맨의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가에 관한 스포일러입니다. 누르면 펼쳐집니다.


가장 극명한 예가 거의 개그로 승화되어가고 있는 유명한 마사 장면이죠. 슈퍼맨과 배트맨의 어머니의 이름이 모두 마사라고 원작에서 설정되어 있고, 배트맨이 슈퍼맨을 끝장내려는 순간 슈퍼맨이 마사란 이름 한 마디 외치자 배트맨이 어머니의 이름이 같다는 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상기하며 살상을 그만둔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멋집니다. 하지만 그걸 영화 내에서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복선이 필요합니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죽이려 들었다는 것 못잖게 그의 부모의 죽음이 여기까지의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설명해주는 장면이 있어야 마사란 이름이 의미를 갖죠.

 마사 웨인의 죽음이 지금의 배트맨을 만들었고, 배트맨이 슈퍼맨을 죽이려는 것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걸 반복적으로 암시해주며 캐릭터의 행동에 계속 반영되어야 배트맨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의 아이러니한 행동을 깨닫는다는 전개 자체가 감정적으로 납득 가능하고, 더 나아가 충격적일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잭 스나이더는 영화 도입부에 마사 웨인이 조 칠에게 총 맞아 죽는 순간 마사란 이름 한 번 외쳐주는 장면을 폼나게 넣어주는 것만으로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지만, 배트맨과 슈퍼맨의 싸움은 영화 제목에도 나와 있고 영화 중반부까지 전개의 핵심이 되는 요소입니다. 영화의 핵심 갈등 요소를 해결하는데 그 정도 발판으로 딛고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정말로 안이하기 그지없는 것이죠.



 다시 스포일러 없는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론 이야기만 문제인 것은 아니죠. 이야기의 논리가 망가지면 그 안에서 이야기를 따라 움직이는 캐릭터도 같이 납득 불가능한 행동을 하며 망가져 가니까요. 그리고 슈퍼히어로 영화는 기본적으로 캐릭터 장사입니다. 슈퍼맨이 뭘 할지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그게 슈퍼맨이란 캐릭터니까 보러 가는 것이죠. 따라서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 슈퍼히어로가 잘 나와야 합니다.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행동할 것임을 표현해서 캐릭터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하죠.

 배대슈에서는 이게 사실상 실종됩니다. 시도는 하지만, 역시 앞서 말한 장면장면들 사이로 잘려나간 이야기 덕분에 쟤가 왜 저러는지, 뭘 하고 싶은 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혼란스러워지죠. 중요한 문제들은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채 얼렁뚱땅 결말을 지어버리며, 왜 캐릭터들이 그 문제에 더 신경을 쓰지 않는지도 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슈퍼맨은 매력도 없고 별 생각도 없이 사는 것 같으며, 배트맨은 그나마 더 낫지만 배우가 잘해준 것일 뿐, 이야기 전개 자체에서는 배트맨이다 할 만한 매력이 별로 없죠. 둘의 캐릭터가 흐리멍덩한 만큼 둘의 싸움도 흐리멍덩하게 끝납니다. 렉스 루터도 애매하기 그지없고, 그나마 원더우먼에 대해 다들 호평하지만 사실 나와서 캐릭터성을 드러낼 만한 일을 한 것도 별로 없어서, 앞서 말했듯이 그저 폼만 잡았을 뿐이죠. 몇 분간 폼 잡으면 멋져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나온 적이 없어, 밑천이 드러날지 말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인 거죠.

 분명히 장면장면 멋지다는 건 이해할 만 합니다. 그것만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꽤 만족스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만족할 만 하다며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납득 가능하죠. 단순한 오락영화로서 따지자면 이게 아주 큰 문제점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장면보다는 캐릭터가 우선이어야 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게 첫 번째 문제고, 두 번째 문제는 후속작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후속작에서는 갈등요소와 캐릭터들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렇게 부실한 토대를 닦아 놓고 후속작의 토대를 잡는 대신 역시 폼나는 떡밥 장면 넣는데만 치중하면서 저스티스 리그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제대로 꾸려낼 수가 있냐는 거죠. 두 시간 반이란 상영시간 안에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구겨넣은 것도 문제지만 어떻게 못 간추릴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보며, 개인적으로는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DC/워너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도 역시 그런 이유에서라고 봅니다.







 한편 슈퍼히어로물이 쏟아져나오는 현실에서 마블의 미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꾸준한 캐릭터 성장에는 굉장히 많은 공을 들여 왔습니다. 시빌 워의 예고편에서 “미안하지만 그는 내 친구야(Sorry, but he is my friend)”와 “나도 네 친구였지(So was I)”라는 대사 두 줄만으로 여태껏 쌓아온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란 두 캐릭터의 배경과 성격을 간단히 표현해주는 내공을 선보이죠. 그것만으로도 장면은 잘 만들지만 캐릭터 묘사 같은 데는 소질이 없는 잭 스나이더에게 시리즈 총괄직을 맡기고 허겁지겁 저스티스 리그의 발동을 걸려는 DC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보여줍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제 취향 자체가 누가 말했듯이, DC의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영웅들’ 이야기보다는 마블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 이야기에 더 가깝긴 하지만, 어쨌건 영화적 완성도와 완결성이란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한 DC 확장 유니버스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번역의 경우도 듀나가 water is wet(두말하면 잔소리지)를 물난리와 홍수라고 번역했다며 지적한 게 이슈가 되었는데, 직접 보니까 문제가 굉장히 많더군요. 나쁜 번역의 경우 능력 자체가 부족해서 잘못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능력이 없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날림으로 번역한 느낌이었습니다. 조금만 길다 싶은 문장은 다 쳐내고 조금만 어려운 건 대충 해석해버리고, 한글 자막만 읽으면서는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성 싶지만...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지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령 렉스 루터의 아버지는 동독에서 독재자 앞에 무릎 꿇었다고 자막에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Tyrant를 사전에서 찾으면 독재자라고 나오긴 합니다만, 대체 언제 동독에 독재자가 있었나요? 렉스 루터가 상원의원과 대화할 때 책상을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 소리로 두들기며 갤럽(gallop, 말이 질주하는 방식)이란 단어를 써서 비유법적으로 표현하는 꽤 근사한 부분을 대충 달려온다고 처리해버린다던가. White Portuguese(하얀 포르투갈인)을 그냥 하얀 포르투갈로 번역했는데 이후 전개를 보면 ‘인’자가 붙어야만 하는 부분이었는데 그냥 대충 해석하기도 했고요. Private security contractors(용병)을 중간의 security 단어 하나만 보고 경호원이라고 번역한다던가, 닐 그래스 타이슨이 카메오로 나오는 부분에서 슈퍼맨의 등장으로 인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는 말을 인류는 이제 존재감이 없어졌다고 번역한다던가,  이외에도 Now God is as good as dead(이제 신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를 착한 신이 이제 죽는 거다라고 번역하고, Power can be innocent(힘/권력이 순수할 수도 있다)를 힘 자체는 순수하다고 번역하고, 스몰빌이나 조커의 농담(joke)을 기껏 언급해줬는데 번역 안 하고 넘어가고...아무튼 의역과 오역의 경계에 걸친 번역이 끝도 없습니다.

 Military grade encryption(군용급 암호화)를 그냥 암호화라고만 하고 열화상(Thermal imaging)으로 보니 적이 3층에 24명이 있다는 걸 열화상이란 단어를 빼놓고 번역하는 것처럼 자잘한 것들 언급하면 관객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할 수도 있긴 한데, 그러면서 발굽 세 번 부딪히고 캔자스로 돌아갔다는 대사는 원문 그대로 직역해놨더군요. 그게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다는 걸 기억하는 관객이 국내에 얼마나 많을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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