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바르자벨이 쓴 <대재난>은 제목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입니다. 배경은 미래 프랑스. 기계 문명의 발달 덕분에 한창 잘 나가는 유토피아입니다. 소설 첫머리부터 주인공이 최첨단 열차에 탑승하는데, 이 세상이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보여주는 수법이죠. 하지만 높이 나는 새가 추락했을 때 더 아픈 법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찬란한 문명이 붕괴하면, 충격과 상실과 허무가 더 크기 마련이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한 국제 정세가 어두운 뿌리를 드러냅니다. 사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면 뭐 하겠습니까. 정작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도루묵일 겁니다. 대도시의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불안한 국제 정세는 파탄 직전이고, 당연히 이런 불안은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당연히 큰 거 한 방만 먹여도 나라가 휘청하겠죠. 프랑스는 그런 한 방 덕분에 단번에 주저앉고, 그 여파가 연쇄적으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지옥 구덩이에 우르르 빠지고, 여기저기 난리법석이 진동합니다.


이쯤 되면 선택의 기로가 다가옵니다. 안전한 대피소에서 죽치느냐, 아니면 보다 평화로운 곳으로 떠나느냐…. 아마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두 가지 갈림길에 처할 것 같네요. <최후의 Z>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죽쳤고, <핵전쟁 아이들>의 가족은 살 길을 찾아 떠났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후자를 고릅니다. 처음에는 도시 내부의 은신처를 떠올리지만, 삽시간에 퍼지는 광기와 공포와 폭력 때문에 버틸 수 없다고 외칩니다. 즉, 이 소설은 중반부까지 도시의 몰락을 이야기하고, 중반부 이후 힘겨운 여정을 묘사합니다. 이처럼 여행기 형식의 아포칼립스는 세상이 어떻게 멸망하는지 주인공의 시선으로 직접 봅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주인공의 관점을 통해서 붕괴와 전복의 여정에 동참하죠. 개인적으로 대피소에 짱박히는 내용보다 이런 여행기를 더 좋아합니다. 게다가 전반부의 대도시와 후반부의 야생은 극적 대조를 이룹니다. 그런 대조 방법이 대재앙 이전과 이후를 보다 극명하게 나눕니다. 주인공의 성장 역시 이 과정에서 두드러집니다. 주인공은 대도시에서 한낱 개인에 불과했지만, 역경과 고난을 거치며 각성합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도시에서 시골로 여행하며, 다양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펼칩니다. 굳건한 사회가 붕괴하고, 소위 문명인들의 추악함이 드러나고, 과학 기술은 허망하고, 내부의 사회적 불평등이 온갖 갈등 요소를 내밀고, 죽고 죽이는 살벌한 풍경을 반복합니다. 비록 전형적이지만, 그만큼 오래된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죠. 1940년대에 나왔으니까요. 게다가 내용은 뻔해도 극단적인 상황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거칠 것 없는 행보, 예상치 못한 위기 때문에 사건 전개가 꽤나 흥미롭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팍팍 죽어나가는데, 도대체 잠시 후 무슨 참극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윤리적인 잣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멸망한 세상에서 자기 몫은 스스로 챙겨야죠. 주인공은 그 사실을 절감하고, 한 치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괜한 명분 따위 제공하지 않습니다. 아주 담백하고 솔직하게, 그야말로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분위기와 폭력이 그렇게까지 피비린내를 풍기지 않지만, 주인공이 진부한 윤리에 얽매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작가가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줬다면, 애써 만든 암울한 상황이 일찌감치 무너졌겠죠.


재난 발생 와중에 사회 갈등이 튀어나오는 것도 볼만합니다. 소설 설정은 언뜻 유토피아지만, 그건 허울일 뿐이죠. 여기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다혈질 군국주의자, 무의미하고 무능한 탁상공론이 여전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대책없는 국수주의 덕분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재앙 이전에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몰락하는 모습은 꽤나 아이러니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미덕 중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모든 구조를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일시에 뒤집을 수 있죠. 대재앙은 왕자와 거지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아침만에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두의 왕자와 거지가 대재앙 하나 때문에 입장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뒷통수를 때리는 것 같은 전복이 등장하지 않지만, 재난을 통한 사회 구조의 모순은 볼만합니다. 비단 그것만 아닙니다. 기술 문명의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재난 이후에 쩔쩔매는 모습은 웃기면서도 안타깝습니다. 이건 뭐라고 할까, 전자 매체가 워낙 발달해서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대재난>은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두드러진 단점 또한 눈에 들어옵니다. 우선 작가가 너무 맹목적으로 과학 기술을 부정합니다. 물론 첨단 과학에 빠져서 히히덕거리는 꼴이야 좋지 않죠. 기술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기본적인 것들을 잃어버리는 사태 또한 지양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과학은 부정적인 만큼 여러 방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기술 발달을 무조건 적대하는 것도 옳지 않을 텐데요. 소위 “원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이상주의 아니겠습니까. 집필 시대를 감안해도 너무 이상주의로 흘렀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보수적입니다. 아니, 보수를 떠나서 그냥 꼰대 마인드입니다. 주인공이 생각하는 여자상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애 낳는 현모양처에 지나지 않거든요. 이런 꼰대 마인드와 부질없는 이상주의가 어울린다면 뭔가 한심한 인간 군상이 튀어나와야 정상인데…. 주인공은 그 모든 난관과 역경을 거치고 결국 위대한 깃발을 꼽습니다. 솔직히 작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막판의 그 결론은…. 이거 도대체 할 말이 없네요. 아, 좋아요. 무정부주의 소규모 공동체는 좋습니다. 프루동부터 북친까지 모두 그런 공동체를 꿈꿨고, 그게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모름지기 그런 대안 사회를 그릴 법하고 비바 아나키즘을 외칠 만합니다. 그게 바로 사이언스 픽션의 미덕이자 능력이고요. 하지만 대안 사회를 그리는 것과 찬양하는 건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명철한 사이언스 픽션은 그저 대안 사회를 그리기에 머물지 않고, 대안 사회의 모순과 문제까지 파헤쳐야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무정부주의를 대책없이 찬양하는 듯합니다. 겨우 그런 결말로 인류 사회의 영원한 모순, 폭력의 순환과 갈등을 뿌리뽑을 수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대재난>에서 드러나는 단점은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외침, 여자를 대하는 꼰대 마인드, 너무 이상적인 대안 사회. 이 세 가지가 없다면, 훨씬 나은 소설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떡밥은 차치하고요.


어쨌든 고전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니까 한 번 읽어봐도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이 소설보다 작가의 수필 <야수의 허기>가 먼저 나왔습니다. <야수의 허기>는 사회와 (생명) 과학을 바라보는 수필입니다. 이걸 읽고 <대재난>도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궁금증을 풀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