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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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어느 중소기업이 있었다. 상호명은 주식회사 녹색왕국식품, 건강식 및 보양식류의 식품을 가공 판매하는 회사로 일부 중산층과 상류층을 고객으로 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녹색왕국식품 내에는 어제도 오늘도 밀린 주문처리에 골치 아픈 인물이 있었다.
- 녹색왕국식품 부사장 그린 바이탈.
금발 벽안을 가진 외국인으로 외국계기업인 녹색왕국식품을 운영하는 인물이었다. 회사에는 사장이 별도로 있었지만 외부업무에 집중하여 내부 회사 운영은 부사장인 그가 실질적인 총괄이었다.
"휴. 좀 쉴만 하면 또 이런 일이야.."
사업이 확장세로 들어가면서 그의 업무량도 대폭 늘어난 상황에서 자주 없었던 특수 대외업무 서류가 들어닥친 것이다. 고민을 오래 해봤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인지 이래저래 한숨을 쉬던 그는 전화기를 누르며 말했다.
"대외협력팀 김부장과 인재개발팀 최차장은 내방로 불러주게."
"예 부사장님 바로 전하겠습니다."
청아한 목소리의 비서가 응답하고 난 뒤 얼마 후 그가 있는 부사장실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똑똑
"들어오게."
사무실로 들어선 것은 두 명의 남자였다. 녹색왕국식품의 대외협력팀 부장 김녹광과 인재팀의 최훈 차장이었다. 부장 김녹광은 전형적인 40대 중반의 호인으로 친근한 인상과 몸매의 소유자였지만 머리가 반쯤 벗겨진 것이 포인트라면 포인트였고 차장 최훈은 날카로운 인상의 뿔테 안경을 쓴 메마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연신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먼저 인사를 건낸 것은 김부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더운 날이라 그런지 뛰어오느라 땀이 잔뜩 났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게나. 이게 왔어."
부사장은 그들이 의자에 앉자, 기밀문서라고 써 있는 서류를 건냈다.
"이...이것은... 총독님의 명령서 아닙니까."
기밀문서는 녹색왕국식품의 특별임무가 내려졌을 때만 나오는 총독의 명령서였던 것이다. 이는 이 회사가 악의 조직 그린킹덤의 위장회사로서 대외 정보 활동과 자금 확보업무 등을 담당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시간 늘어나는 타이탄 수리비와 연구비를 충당키 위한 자금확보를 위해 신제품 개발 영업이 주된 업무였기 때문일까? 오랜 만에 보는 명령서를 보며 두 사람은 좀 전의 부사장과 같은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부사장은 명령서를 건내 받은 두 사람을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자자. 뭐 씹은 표정은 그만 하자고, 총독님이나 그린 매지션님 귀에 들어가면 영 힘들잖아. 일단 명령서를 읽어보게나."
그 뒤 부사장은 명령서의 내용을 전달했다. 해당 내용으로는 크게 2가지가 있었는데 그 1이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개선시키라는 것이었고 그 2는 사표를 제출한 파일럿들을 다시 회유하거나 충원하는 업무였다. 이 외에는 이번 분기 매출신장에 대한 격려와 노고에 대한 것도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내용이라 자네들을 부른거야. 오랜만이겠지만 힘내보자고 김부장은 홍보 컨셉 시안 정해서 보고하고 최차장은 기존 파일럿들 연락처로 연락해서 회유해보게 안되면 김부장 쪽에 전해서 신규채용공고 올리고."
나름 정리해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바로 김부장이 두 손을 저었다.
"부사장님 아시다시피 지금 홍보 예산 전액을 인기 모델 마리아 디바를 기용한 광고에 쏟아 부어서 지금은 예산이 없습니다. 예산 좀 더 주세요."
이에 질세라 최차장도 말을 이었다.
"이번 달에 명절 보너스를 지출해야 하는데 그 예산도 필요합니다."
결국 돈 문제로 화두가 바뀌었다. 거금을 들여 초청한 모델을 통해 광고를 진행하고 있던 김부장으로서도 이미지 홍보를 위한 예산이 필요했고 임금처리 및 복리후생을 담당하는 최차장으로서도 명절보너스라는 문제처리가 있었던 것이다.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알잖아 이번 타이탄 수리비. 저번 곱절이야 그렇게 완전 파손은 좀 피해 보라고 했는데 타이탄 실드 완파에 흉부 완전 파손 등..예비비도 몽땅 털렸어. 현실적인 방법을 이야기 해보자고."
이렇게 되면 부사장에게 더이상 요청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내심 속으로 화를 삭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사장은 말이 통하고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정체가 자신들과 다른 이세계인이었기에 그린킹덤의 일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방법이야 있지요. 마리아 디바에게 잡힌 광고를 홍보 쪽으로 돌리는 겁니다. 매출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뭐 확실하게 효과는 있겠지요."
"마리아 디바는 전직 히어로잖아 그래도 그린킹덤은 악의 조직인데 하겠어? 우리 정체도 의심 받고 말이야."
"요즘 전직 히어로가 안하는 일이 어디있습니까. 타이탄도 나름 유명했던 전직 정의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악당 로봇이고..우리랑 그린킹덤이랑 관련 있는거 모르는 사람도 이젠 없는 것 같은데 정체 걱정은 그냥 무시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걱정스런 부사장의 말에 김부장이 별일 아니다는 듯 다시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전직 히어로가 악당이 되거나 전혀 연관없는 일을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히어로라는 특성상 스폰서가 있거나 본인이 돈이 넘치는 일부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로봇이나 장비의 운용비용도 충당치 못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악당이 되거나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녹색왕국식품이 그린킹덤과 연관이 있다는 점은 이미 회사설립 후 회사의 등기이사 제출시에 들어난 일이라 그의 생각에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총독님은 아직 비밀인 줄 안다고. 만인이 알아도 총독님이 모르면 모르는 거라고 해야하는 게 우리잖아."
그렇다 부사장도 왜 모르겠는가 까다로운 상관이었던 그린 매지션의 품에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 한국 파견에 지원해서 왔지만 원래 상업가 집안의 자손으로서 한국 회사상계 및 기본적인 부분을 최대한 공부했던 그였다. 등기부에 떡하니 사장 총독 아스트라, 이사 그린 매지션, 그린 비스트, 닥터 노스트라 라고 했는데 안 알고 싶어도 알게 될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총독 아스트라가 아직 숨기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 숨겨진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총독은 숭배하는 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부사장은 김부장을 향해 잠깐 고민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좋아. 김부장이 그냥 마리아에게 그린킹덤 홍보물 찍자고 일단 이야기 해봐. 총독께는 내가 잘 보고할테니까. 최차장은 보너스 지급 안 돼. 알지? 작년처럼 가자고.."
화살이 자신에게 돌려지자 최차장은 얼굴이 실룩거렸다.
'젠장. 올해는 봉투 좀 만지나 했더니...이럴 때 보면 이세계인 같지 않다니까.'
최차장으로서는 내심 불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 올해도 선.물.세.트.로 준비하겠습니다."
소심한 표현이었지만 부사장은 아랑곳 않고 스스로 만족한 듯 박수를 쳤다.
"좋아. 이제 다 처리된거지 나가서 일들 보게. 나는 보고하러 가야하니까. 진행보고는 전자결제로 해놓는 것 잊지말고."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들이 문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부사장은 서둘러 품 속에 손을 넣어 전화기를 꺼냈다. 좀 전까지 진동이 울렸던 핸드폰에는 [박여사님 부재중 전화 5통] 이라고 써 있었다. 좀처럼 땀을 흘리지 않는 그였지만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박여사는 그가 한국에 와서 결혼한 부인의 전화등록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그에게 있어 총독과 그린 매지션보다 무서운 인물이라면 인물. 부사장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대뜸 전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퍼뜩 안받냐? 내가 몇 번을 걸었다고 생각하는가 신랑?"
"여보세요. 우리 박여사님. 내가 회의중이었소. 그래서 못 받았지 내가 알았으면 바로 받았을 걸 알면서. 그리고...추석 보너스 말인데요."
그 뒤 부사장은 올해 추석도 상여금이 없다고 보고하면서 욕을 잔뜩 먹은 뒤에야 총독에게 보고를 하기 위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어찌되건 그에게 총독보다 우선 보고해야 할 상대는 부인인 것은 사실인 것이다.
.....
- 죄송합니다. 저 시골로 내려가요.
- 우리 아이가 전화를 받기 싫다네요.
- 저...저는 죽기싫어요. 다신 전화하지 마세욧!
한 숨을 내쉬며 최훈차장은 전화기를 내려놨다. 기존 파일럿들 모두 복귀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회유를 위한 당근을 제시하기도 전에 원천 차단된 연유로는 마수 전대의 참극도 있었지만 타이탄의 처참한 모습이 결정타였던 것 같았다. 적어도 인간이 탑승한 로봇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그 전투로 인하여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머리를 풀기 위해 믹스커피 한잔을 들고 밖으로 나온 최차장은 문득 일전에 받았던 명함 한장이 생각이 났다. 워낙에 히어로들의 상업 활동이 많다보니 업계에서는 파일럿 및 히어로 인력을 연결해 주는 알선 사무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의 영업담당자와 알게되면서 받게 된 명함이었다. 나름 그 쪽에서는 악당에게도 알선할 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악마숭배자가 사장이라든지 외부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나 추문이 오르는 곳이기 때문인지 선뜻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주저하던 와중에 결정내리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간 최차장은 모니터 화면에 뜬 기사들을 내려보다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는 미성년자 부당계약으로 인하여 법적분쟁에 들어간 그 회사의 이름이 [큐베 인력사무소 부당계약으로 검찰수사]기사와 함께 떠 있었다. 아무래도 구인공고를 올려야 할 것 같았다.
.....
김부장은 초조한 심정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마리아 디바는 과거 우상이었던 존재이자 불로(不老)의 탈렌트였다. 소녀시절 여신에게 선택받아 악신들이 보낸 몬스터들을 여신로봇을 타고 무찌르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렸다. 은퇴와 함께 여신의 축복으로 일한 시간 만큼의 젊음을 보상받아 모델로 활동하는 그녀와 통화한다는 것은 노련한 마케터인 그에게도 매우 기쁘고 초조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마리아 디바 모델 사무소의 송하나 매니저입니다."
"아...안녕하세요. 녹색왕국식품의 김녹광 부장입니다."
내심 마리아 디바 본인과 통화하는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깨졌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모델 사무실의 매니저였다.
"예. 김부장님. 일전에 한번 뵈었지요. 어쩐 일이세요?"
"저기 이번 저희쪽 광고 말입니다. 이차저차해서 변경했으면 하는 데 미팅 일정을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미팅이요? 마리아씨도 같이인가요?"
"예. 컨셉이 바뀐거라서 말이죠."
"어떤 컨셉인지 간략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바로 물어볼게요."
"그게...말이죠. 우리강산을 꽃과 나무로 꾸미자는 단체를 홍보하는 내용입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송한나 매니저님?"
"아, 죄송해요. 방금 마리아씨께 승낙 받았어요. 미팅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만 된다고 하시네요. 시안도 그 때 부탁드려요."
바로 승낙이 났기 때문일까? 오히려 김부장이 놀라는 듯 했다.
"진짜 괜찮습니까?"
"김부장님 회사 자칭 세계녹화단체 산하잖아요. 좀 바뀌긴 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 안이라 괜찮을걸요."
역시 다들 아는 부분인데 이런 걸 숨겼다고 생각하는 총독은 뭘까하는 생각이 드는 김녹광 부장이었다. 그 뒤 스케쥴에 대한 협의가 끝나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부장은 살짝 스쳐가는 광고의 컨셉이 있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동경하던 마리아와 러브러브한 컨셉의 광고. 뭐 그냥 망상이었지만 어차피 광고컨셉은 늘 그러듯 총독 아스트라의 특별 결제가 필요했기에 통과될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상상은 자유니까. 기분이 업되었는지 흥얼거리며 자리에 일어난 김부장은 슬쩍 시계를 보고는 대외협력팀의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저녁 먹을사람?"
"...."
신난 김부장과는 대조적으로 야근 선언에 직원들의 낯빛은 어두워져버렸다.
......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 된 장소에서는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둘러맨 한 인물이 힘겹게 정비형 로봇을 개조해 급하게 만든 간호 로봇에게 비정상적인 각도로 죽을 먹고 있었다. 두 번 다시 탈일은 없겠지만 몸이 회복되면 타이탄보다 이 막장 간호로봇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결심하면서 강훈 반장은 서러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뜨거움 때문인지 이번에도 입이 아니라 볼로 후려쳐진 로봇의 수저에 죽으로 맞으며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평소에 손을 봐두었어야 하는데...'
도망을 치며 상해를 극도록 꺼려했던 기존 파일럿들과 달리 간호로봇을 실제로 쓰는 것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다들 악의 조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힘겹게 보내는 하루가 지나간다.
- 녹색왕국식품 부사장 그린 바이탈.
금발 벽안을 가진 외국인으로 외국계기업인 녹색왕국식품을 운영하는 인물이었다. 회사에는 사장이 별도로 있었지만 외부업무에 집중하여 내부 회사 운영은 부사장인 그가 실질적인 총괄이었다.
"휴. 좀 쉴만 하면 또 이런 일이야.."
사업이 확장세로 들어가면서 그의 업무량도 대폭 늘어난 상황에서 자주 없었던 특수 대외업무 서류가 들어닥친 것이다. 고민을 오래 해봤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인지 이래저래 한숨을 쉬던 그는 전화기를 누르며 말했다.
"대외협력팀 김부장과 인재개발팀 최차장은 내방로 불러주게."
"예 부사장님 바로 전하겠습니다."
청아한 목소리의 비서가 응답하고 난 뒤 얼마 후 그가 있는 부사장실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똑똑
"들어오게."
사무실로 들어선 것은 두 명의 남자였다. 녹색왕국식품의 대외협력팀 부장 김녹광과 인재팀의 최훈 차장이었다. 부장 김녹광은 전형적인 40대 중반의 호인으로 친근한 인상과 몸매의 소유자였지만 머리가 반쯤 벗겨진 것이 포인트라면 포인트였고 차장 최훈은 날카로운 인상의 뿔테 안경을 쓴 메마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연신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먼저 인사를 건낸 것은 김부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더운 날이라 그런지 뛰어오느라 땀이 잔뜩 났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게나. 이게 왔어."
부사장은 그들이 의자에 앉자, 기밀문서라고 써 있는 서류를 건냈다.
"이...이것은... 총독님의 명령서 아닙니까."
기밀문서는 녹색왕국식품의 특별임무가 내려졌을 때만 나오는 총독의 명령서였던 것이다. 이는 이 회사가 악의 조직 그린킹덤의 위장회사로서 대외 정보 활동과 자금 확보업무 등을 담당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시간 늘어나는 타이탄 수리비와 연구비를 충당키 위한 자금확보를 위해 신제품 개발 영업이 주된 업무였기 때문일까? 오랜 만에 보는 명령서를 보며 두 사람은 좀 전의 부사장과 같은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부사장은 명령서를 건내 받은 두 사람을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자자. 뭐 씹은 표정은 그만 하자고, 총독님이나 그린 매지션님 귀에 들어가면 영 힘들잖아. 일단 명령서를 읽어보게나."
그 뒤 부사장은 명령서의 내용을 전달했다. 해당 내용으로는 크게 2가지가 있었는데 그 1이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개선시키라는 것이었고 그 2는 사표를 제출한 파일럿들을 다시 회유하거나 충원하는 업무였다. 이 외에는 이번 분기 매출신장에 대한 격려와 노고에 대한 것도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내용이라 자네들을 부른거야. 오랜만이겠지만 힘내보자고 김부장은 홍보 컨셉 시안 정해서 보고하고 최차장은 기존 파일럿들 연락처로 연락해서 회유해보게 안되면 김부장 쪽에 전해서 신규채용공고 올리고."
나름 정리해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바로 김부장이 두 손을 저었다.
"부사장님 아시다시피 지금 홍보 예산 전액을 인기 모델 마리아 디바를 기용한 광고에 쏟아 부어서 지금은 예산이 없습니다. 예산 좀 더 주세요."
이에 질세라 최차장도 말을 이었다.
"이번 달에 명절 보너스를 지출해야 하는데 그 예산도 필요합니다."
결국 돈 문제로 화두가 바뀌었다. 거금을 들여 초청한 모델을 통해 광고를 진행하고 있던 김부장으로서도 이미지 홍보를 위한 예산이 필요했고 임금처리 및 복리후생을 담당하는 최차장으로서도 명절보너스라는 문제처리가 있었던 것이다.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알잖아 이번 타이탄 수리비. 저번 곱절이야 그렇게 완전 파손은 좀 피해 보라고 했는데 타이탄 실드 완파에 흉부 완전 파손 등..예비비도 몽땅 털렸어. 현실적인 방법을 이야기 해보자고."
이렇게 되면 부사장에게 더이상 요청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내심 속으로 화를 삭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사장은 말이 통하고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정체가 자신들과 다른 이세계인이었기에 그린킹덤의 일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방법이야 있지요. 마리아 디바에게 잡힌 광고를 홍보 쪽으로 돌리는 겁니다. 매출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뭐 확실하게 효과는 있겠지요."
"마리아 디바는 전직 히어로잖아 그래도 그린킹덤은 악의 조직인데 하겠어? 우리 정체도 의심 받고 말이야."
"요즘 전직 히어로가 안하는 일이 어디있습니까. 타이탄도 나름 유명했던 전직 정의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악당 로봇이고..우리랑 그린킹덤이랑 관련 있는거 모르는 사람도 이젠 없는 것 같은데 정체 걱정은 그냥 무시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걱정스런 부사장의 말에 김부장이 별일 아니다는 듯 다시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전직 히어로가 악당이 되거나 전혀 연관없는 일을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히어로라는 특성상 스폰서가 있거나 본인이 돈이 넘치는 일부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로봇이나 장비의 운용비용도 충당치 못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악당이 되거나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녹색왕국식품이 그린킹덤과 연관이 있다는 점은 이미 회사설립 후 회사의 등기이사 제출시에 들어난 일이라 그의 생각에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총독님은 아직 비밀인 줄 안다고. 만인이 알아도 총독님이 모르면 모르는 거라고 해야하는 게 우리잖아."
그렇다 부사장도 왜 모르겠는가 까다로운 상관이었던 그린 매지션의 품에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 한국 파견에 지원해서 왔지만 원래 상업가 집안의 자손으로서 한국 회사상계 및 기본적인 부분을 최대한 공부했던 그였다. 등기부에 떡하니 사장 총독 아스트라, 이사 그린 매지션, 그린 비스트, 닥터 노스트라 라고 했는데 안 알고 싶어도 알게 될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총독 아스트라가 아직 숨기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 숨겨진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총독은 숭배하는 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부사장은 김부장을 향해 잠깐 고민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좋아. 김부장이 그냥 마리아에게 그린킹덤 홍보물 찍자고 일단 이야기 해봐. 총독께는 내가 잘 보고할테니까. 최차장은 보너스 지급 안 돼. 알지? 작년처럼 가자고.."
화살이 자신에게 돌려지자 최차장은 얼굴이 실룩거렸다.
'젠장. 올해는 봉투 좀 만지나 했더니...이럴 때 보면 이세계인 같지 않다니까.'
최차장으로서는 내심 불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 올해도 선.물.세.트.로 준비하겠습니다."
소심한 표현이었지만 부사장은 아랑곳 않고 스스로 만족한 듯 박수를 쳤다.
"좋아. 이제 다 처리된거지 나가서 일들 보게. 나는 보고하러 가야하니까. 진행보고는 전자결제로 해놓는 것 잊지말고."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들이 문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부사장은 서둘러 품 속에 손을 넣어 전화기를 꺼냈다. 좀 전까지 진동이 울렸던 핸드폰에는 [박여사님 부재중 전화 5통] 이라고 써 있었다. 좀처럼 땀을 흘리지 않는 그였지만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박여사는 그가 한국에 와서 결혼한 부인의 전화등록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그에게 있어 총독과 그린 매지션보다 무서운 인물이라면 인물. 부사장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대뜸 전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퍼뜩 안받냐? 내가 몇 번을 걸었다고 생각하는가 신랑?"
"여보세요. 우리 박여사님. 내가 회의중이었소. 그래서 못 받았지 내가 알았으면 바로 받았을 걸 알면서. 그리고...추석 보너스 말인데요."
그 뒤 부사장은 올해 추석도 상여금이 없다고 보고하면서 욕을 잔뜩 먹은 뒤에야 총독에게 보고를 하기 위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어찌되건 그에게 총독보다 우선 보고해야 할 상대는 부인인 것은 사실인 것이다.
.....
- 죄송합니다. 저 시골로 내려가요.
- 우리 아이가 전화를 받기 싫다네요.
- 저...저는 죽기싫어요. 다신 전화하지 마세욧!
한 숨을 내쉬며 최훈차장은 전화기를 내려놨다. 기존 파일럿들 모두 복귀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회유를 위한 당근을 제시하기도 전에 원천 차단된 연유로는 마수 전대의 참극도 있었지만 타이탄의 처참한 모습이 결정타였던 것 같았다. 적어도 인간이 탑승한 로봇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그 전투로 인하여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머리를 풀기 위해 믹스커피 한잔을 들고 밖으로 나온 최차장은 문득 일전에 받았던 명함 한장이 생각이 났다. 워낙에 히어로들의 상업 활동이 많다보니 업계에서는 파일럿 및 히어로 인력을 연결해 주는 알선 사무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의 영업담당자와 알게되면서 받게 된 명함이었다. 나름 그 쪽에서는 악당에게도 알선할 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악마숭배자가 사장이라든지 외부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나 추문이 오르는 곳이기 때문인지 선뜻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주저하던 와중에 결정내리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간 최차장은 모니터 화면에 뜬 기사들을 내려보다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는 미성년자 부당계약으로 인하여 법적분쟁에 들어간 그 회사의 이름이 [큐베 인력사무소 부당계약으로 검찰수사]기사와 함께 떠 있었다. 아무래도 구인공고를 올려야 할 것 같았다.
.....
김부장은 초조한 심정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마리아 디바는 과거 우상이었던 존재이자 불로(不老)의 탈렌트였다. 소녀시절 여신에게 선택받아 악신들이 보낸 몬스터들을 여신로봇을 타고 무찌르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렸다. 은퇴와 함께 여신의 축복으로 일한 시간 만큼의 젊음을 보상받아 모델로 활동하는 그녀와 통화한다는 것은 노련한 마케터인 그에게도 매우 기쁘고 초조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마리아 디바 모델 사무소의 송하나 매니저입니다."
"아...안녕하세요. 녹색왕국식품의 김녹광 부장입니다."
내심 마리아 디바 본인과 통화하는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깨졌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모델 사무실의 매니저였다.
"예. 김부장님. 일전에 한번 뵈었지요. 어쩐 일이세요?"
"저기 이번 저희쪽 광고 말입니다. 이차저차해서 변경했으면 하는 데 미팅 일정을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미팅이요? 마리아씨도 같이인가요?"
"예. 컨셉이 바뀐거라서 말이죠."
"어떤 컨셉인지 간략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바로 물어볼게요."
"그게...말이죠. 우리강산을 꽃과 나무로 꾸미자는 단체를 홍보하는 내용입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송한나 매니저님?"
"아, 죄송해요. 방금 마리아씨께 승낙 받았어요. 미팅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만 된다고 하시네요. 시안도 그 때 부탁드려요."
바로 승낙이 났기 때문일까? 오히려 김부장이 놀라는 듯 했다.
"진짜 괜찮습니까?"
"김부장님 회사 자칭 세계녹화단체 산하잖아요. 좀 바뀌긴 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 안이라 괜찮을걸요."
역시 다들 아는 부분인데 이런 걸 숨겼다고 생각하는 총독은 뭘까하는 생각이 드는 김녹광 부장이었다. 그 뒤 스케쥴에 대한 협의가 끝나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부장은 살짝 스쳐가는 광고의 컨셉이 있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동경하던 마리아와 러브러브한 컨셉의 광고. 뭐 그냥 망상이었지만 어차피 광고컨셉은 늘 그러듯 총독 아스트라의 특별 결제가 필요했기에 통과될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상상은 자유니까. 기분이 업되었는지 흥얼거리며 자리에 일어난 김부장은 슬쩍 시계를 보고는 대외협력팀의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저녁 먹을사람?"
"...."
신난 김부장과는 대조적으로 야근 선언에 직원들의 낯빛은 어두워져버렸다.
......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 된 장소에서는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둘러맨 한 인물이 힘겹게 정비형 로봇을 개조해 급하게 만든 간호 로봇에게 비정상적인 각도로 죽을 먹고 있었다. 두 번 다시 탈일은 없겠지만 몸이 회복되면 타이탄보다 이 막장 간호로봇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결심하면서 강훈 반장은 서러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뜨거움 때문인지 이번에도 입이 아니라 볼로 후려쳐진 로봇의 수저에 죽으로 맞으며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평소에 손을 봐두었어야 하는데...'
도망을 치며 상해를 극도록 꺼려했던 기존 파일럿들과 달리 간호로봇을 실제로 쓰는 것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다들 악의 조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힘겹게 보내는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