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랫 동안 별러왔던 SF 판타지 도서관에 놀러 갔습니다.

그 동안 기증하려고 SF/판타지를 조금씩 사서 모아두기도 했고,

간만에 얻은 꿀같은 휴가를 좀 더 충실하게 보내고 싶었거든요.

       

긴 프로젝트에 시달리다가 신촌 쪽으로는 오래 간만에 가는 것인지라,

신촌 로타리의 '숨어있는책'에 먼저 들렀다가 SF 판타지 도서관에 갔습니다.

왕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신촌 일대 돌아다니면서 헌책방 투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덧 그 시절도 십 수 년이 훌쩍 넘는 과거이고 이제는 그럴 기력도 시간도 없습니다.

학생 신분이었던 시절, 또 직장에 처음 다니던 총각 시절에는 그렇게 살 수 있었죠.

이제는 자유 시간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낮 시간에 누리는 신촌 행이 정말 즐겁더군요.

    

신촌 '숨어있는책'의 주인은 본래 출판사에서 일을 했었던 문학 매니아 출신이기 때문에,

여느 헌책방과는 달리 문학 코너에 대한 정리가 뛰어난 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랫 동안 읽고 싶었던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를 구한 것이 가장 기쁜 일이었고,

SF로는 번역 출간된 줄도 몰랐던 어니스트 칼렌버그의 <에코토피아 비긴스>가 있더군요.

왕년에 '정신세계사'에서 <에코토피아>를 번역출간했던 게 24년 전인 1991년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정신세계사'는 SF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괜찮은 SF를 잇달아 출간했는데,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와 진 M. 아우얼의 <석기시대의 여자 아일라>가 나왔죠.

그 후 20 년 넘게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에코토피아>의 프리퀄이자 건국 과정이 담긴 <에코토피아 비긴스>가 나와 있었던 겁니다.

SF라면 왠만해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왜 여지껐 전혀 모르고 살았는지 의문입니다.

헌책방에 가끔씩 들러줄 필요가 있는 것이, 이렇게 만나는 책이 종종 있기 때문이겠죠.

      

'숨어있는책'을 나와 신촌 로타리에서 SF 판타지 도서관으로 어떻게 갈까 하다가,

날도 쾌청하고 온도도 적당해서 그냥 슬슬 걸어갔습니다 - 1시간 정도 걸리더군요. 

만일 기증하려고 싸온 책 보따리가 없었다면, 헌책방 투어를 좀 더 하면서 갔을 겁니다.

신촌로타리에서 동교동 삼거리까지 직진하는 대로변에만 헌책방이 3 곳이나 있으니까요.

한 때 젊음의 거리를 상징했던 신촌 상권은 요즘 퇴보했다는데, 헌책방들은 계속 건재하더군요. 

   

SF 판타지 도서관 방문은 연세대학교 뒷편 연희동으로 이사간 후로 세 번째였습니다.

하지만 이전 두 번의 방문은 모두 책 기증만 하고서 바쁘게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제대로 SF 판타지 도서관의 장서를 살펴보는 것은 과거 사당역에 있을 때 이후 처음이었죠.

    

솔직히... 크게 감탄한 부분도 있었고, 많이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가장 감탄했었던 것은 미국 그래픽 노블이었습니다 - 값비싼 올컬러 책들이 무수히 수집되어 있더군요.

제가 평소에 그 쪽 책들을 많이 즐겨본 일이 별로 없어서 더 크게 감탄한 것일런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약점에 해당하는 것이 잘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되니까요.

지리적으로 가깝기만 하다면 매일 와서 짬짬히 보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더군요.

왕년처럼 사당역이었다면 어떻게든 자주 들르고 했을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 했습니다.

    

아쉬운 부분은, 팬터지 문학 쪽이었습니다.

[SF 팬터지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팬터지도 중요하게 다룬다면,

앞으로 팬터지 쪽은 보다 더 많은 보강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SF는 그래도 몇몇 출판사 위주로 시리즈로 나온 경향이 있어서 책이 꽤 충실하게 구비된 편인데,

팬터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여기저기에서 난삽하게 출간된 게 많아서 파악이 쉽지 않은 게 큰 이유겠죠.

   

한국에서 팬터지는 문학 서적을 많이 펴내는 출판사에서 중요한 작품이 묻어가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고,

또 아동문학으로 알려진 책들이 중요한 팬터지인 경우가 많아서 아동문학도 신경써야 합니다.

<호비트>도 <한 밤 중 톰의 정원에서>도 <어스시>도 모두 한국에 처음에는 아동문학으로 나왔습니다.

게다가 팬터지는 미국도 있지만 유럽에서 오랫 동안 깊은 뿌리를 가진 장르라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유럽 문학을 펴내는 과정에서 팬터지 명작을 툭 던져 놓듯이 출간하기도 하거든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성공하면서 문학동네, 열린책들, 을유문화사, 펭귄클래식이 후발로 책을 쏟아내는데,

그 와중에 미번역이었던 고전이 새로 번역되면서 쓸만한 고전 팬터지가 출간되는 행운이 있기도 합니다.

<베오 울프>를 현대식으로 다시 써내려간 존 가드너의 <그렌델>이 펭귄 클래식으로 나온 것이라든지,

발자크의 <나귀 가죽>,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이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책들은 놓칠 수 없는 팬터지 명작이므로 찬찬히 구비해나가야 하겠죠.

   

특히 독일 후기 낭만주의 시대는 팬터지가 한꺼번에 쓰여진 유명한 문예사조임에도

사실상 도서관의 장서 보유가 완전 missing이나 다름 없을 정도여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때문에 최근 취미 삼아 호프만, 하우프, 푸케, 샤미소, 노발리스 등의 책들을 찾아다니면서

집중적으로 독일 후기 낭만주의 시기의 작가들의 책을 구해다가 기증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죠.

프랑스의 마르셀 에메와 같은 뛰어난 팬터지 작가의 책도 전혀 없어서 계속해서 사다 드렸는데,

전반적으로 유럽의 고전 팬터지, 아동문학으로 나온 팬터지가 많이 취약하다는 생각이 큽니다. 

    

아무래도 지금 현재는 도서관 운영 비용도 직접 도서관장님께서 전부 혼자 부담하고 계시고,

부족한 책을 보충하는 것은 기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니... 한계가 클 수 밖에 없겠죠.

대학 도서관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정리하는 책을 연계해서 받아올 수는 없나 그런 생각도 들고,

성금을 좀 모아서 취약한 분야의 책들을 헌책방 돌아다니며 염가로 사들일 수는 없나 싶기도 하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겨우 딱 하루 휴가내고 와서 책 구경하는 주제에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SF 판타지 도서관은 참 즐거운 곳이었습니다 - 자신과 취미가 맞는 책이 가득한 곳이니까요.

떄문에 어제 하루만큼은 누구의 터치도 없이 SF 판타지 도서관에서 푹 빠져 지내고 싶었는데...

마나님께서 호출하시더군요 - 휴가이면 밀린 집안일 좀 하면서 애들도 챙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까지만이라도 자유를 달라고 애원했지만, 얄짤없었습니다 - 저는 아이들이 셋이니까요.

딱 한 권 골라 뽑아서 <토르> 그래픽 노블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는데 채 반도 못 보고 나왔습니다.

1년 넘게 벼르다가 시간을 내서 온 것이었기에 아쉽기 그지 없었지만... 뭐 인생이 다 그런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