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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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가 쓴 <꽃>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화자가 부르지 않았을 때, 그것은 단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화자가 그 존재를 인식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것은 비로소 꽃이 되었죠. 개인의 인식과 존재의 의미 그리고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외부 관찰자가 인식할 때 그제서야 존재 의미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식을 관통하는 매개체이자 수단은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이 곧 존재를 가리키는 지표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개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고, 그러니 이름이 자아로 통하는 길입니다. 이름은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비단 저런 시 속에서만 통하는 상징이 아닙니다. 이런 사례는 장르 문학에도 단골 메뉴처럼 나옵니다. 장르 문학에서는 이름이 단지 상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 수단이나 혹은 세상을 뒤바꾸는 주문이 될 수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문학에서는 자아가 분리되거나 정체성이 헛갈리는 때가 많습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집단과 단체만 존재하는 사회니까요. 개성이 사라진 시대이니, 개인이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그리고 그런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름 역시 남다른 의미가 생깁니다. 참된 이름, 그러니까 진명(眞名)이라고 하죠.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진명이 사라지고, 표면적인 이름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회 구성원이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윗대가리만 섬기는 집단으로 머무니까요.
이걸 이용한 작품 중 하나가 예브게니 자마찐이 쓴 <우리들>입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물론이고, 대다수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번호로 서로를 부르고 구분할 뿐입니다. 알파벳과 숫자로 이루어진 호칭인데, 이걸 이름이라고 할 수야 없겠죠. 가령, H-314라는 사람이 산다고 하죠. 그러면 그 사람 이전에 313번이 있을 테고, 그 사람 다음에 315번도 있을 겁니다. 즉, 사회는 그 사람을 부품으로 취급할 뿐, 자아를 대접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 제목도 '우리들'입니다. 너와 내가 없고, 이름이 없고, 그저 번호로, 1번과 2번과 3번으로 불리는 우리들입니다.
판타지에서는 진명이 주문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어스시의 마법사>에는 진명을 알아야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설정이 깔렸습니다. 세상 만물에는 나름대로 진명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명을 부르면, 사물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마법이란 진명을 부르고 조종하는 행위인 셈입니다. 하지만 진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고대에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를 특별히 연구해야 합니다. <어스시의 마법사>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인지 이와 비슷한 설정은 판타지 작품에서 흔히 나오는 편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각 인물들에게도 진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법사가 진명을 알아내면, 그 사람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마법사에게 붙들리는 셈이죠. 당연히 진명을 남에게 함부로 가르쳐주는 행위는 커다란 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작품에서는 마법사가 타인의 진명을 알아내고, 그걸 이용해 타인을 봉인하거나 조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꼭두각시가 탄생하는 격입니다. 이름을 이용해 타인의 개성을 없앤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 문학과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건 좀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만…. 저런 문학 작품 이외에 대중적인 비디오 롤플레잉 게임에도 작명이 중요해요. 서구 롤플레잉 게임은 대개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가령, <엑스컴>에서는 대원 이름만 아니라 기지 이름까지 플레이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죠. 그런데 자신이 만든 캐릭터, 애착이 가는 캐릭터에게 아무 이름이나 붙이는 플레이어는 드물 겁니다. 자신의 개성을 반영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이겠죠. 캐릭터 이름을 그냥 12345로 붙이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겠죠. 자신과 친구들 이름을 대원들에게 붙이는 플레이어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작명을 하는 순간, 그 캐릭터는 비로소 플레이어의 아바타가 됩니다. 캐릭터 작명은 별 거 아닌 듯하지만, <꽃>과 <우리들>과 <어스시>처럼 비디오 게임에서도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차피 게임은 흥미 위주니까 사람들이 그걸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만약 <폴아웃> 같은 게임에서 캐릭터 이름을 강제로 할당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플레이어의 몰입감이 확~ 떨어질 걸요.
<꽃>처럼 인식론을 다루든, <우리들>처럼 전체주의를 비판하든, <어스시>처럼 개인의 내적 고뇌를 다루든, <엑스컴>처럼 캐릭터를 조종하든 간에 이름이라는 건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수단이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점차 이름과 개성과 정체성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흐르죠. 윗대가리들과 수구 꼴통 지지자들이 획일성을 강조하고 전체주의를 두둔하는 마당이니까요.
<우리들>처럼 이름이 없어지는 사회, 진명이 사라지고 가짜 이름과 번호만 불리는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너와 내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사상만 관통하는 사회 같습니다. 하다못해 흥미 위주의 비디오 게임에서조차 캐릭터들의 다양성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와중에 대통령이란 작자가 획일성을 추구한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이건 뭐, 소설은 둘째치고 비디오 게임만도 못한 사회로군요.
이름에 대해 가진 믿음은 옛날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글에 쓰신대로 진명을 알면 그 사람을 뜻대로 하거나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사람의 본명을 부르지 않고 어릴때는 아명(兒名), 어른이 되면 자(字), 호(號) 등 따로 부르는 이름을 가졌었죠.
현대도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름이 그 사람의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는 면은 있어서 연예인들이 본명 놔두고 예명을 짓는 것도 그런이유고 영화나 소설에서 캐릭터 이름을 지을 때 그 사람의 역할이나 이미지를 암시하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하죠.
어떻든 이름은 그 사람이나 사물을 특정짓는 역할을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도 확실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