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인가, 아마 그쯤 될 겁니다. 이른바 게임북이라는 게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저가 텍스트 게임을 하듯이 독자가 책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게임북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에게 선택지를 주고, 그 선택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어떠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에서 행동할 요령을 몇 가지 늘어놓은 다음, 독자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합니다. 각각의 선택은 다른 페이지로 이어지며, 선택에 따른 결과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거의 매 번마다 이어지고, 각 선택의 여파가 이야기에 영향을 미쳐 결국 엔딩까지 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순서라는 게 없으며, 다른 책들보다 독자의 참여가 훨씬 중요하죠. 가령, 예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밀림을 헤매다가 삼거리를 발견했다. 왼쪽, 오른쪽, 가운데 중 어디로 갈 것인가?

▶ 왼쪽은 78페이지. 걷다가 늪에 빠졌다. 얼굴이 잠기면서 숨이 막히고, 머리가 몽롱하다. 이대로 끝인가….

▶ 가운데는 44페이지. 풀숲에서 랩터가 습격했다. 발톱이 배를 강타해 내장이 쏟아졌다. 침묵이 찾아온다.

▶ 오른쪽은 13페이지. 온순한 초식공룡 무리를 발견했다. 하룻밤 편히 쉬어가기로 했다. 간만에 단잠을 잔다.

 

대략 이렇게 진행합니다. 이 경우, 왼쪽과 가운데를 선택한 독자라면 배드 엔딩으로 죽게 될 것이고, 오른쪽을 선택한 독자만이 계속 진행할 수 있겠죠. 사실 순수하게 게임이라고 하긴 어려운 것이 여기에는 전략이나 작전, 공략 등이 없습니다. 운이 상당히 따라줘야 죽지 않고 엔딩까지 갈 수 있으며, 나중에 선택지를 달달 외우다 보면 최단시간 해피엔딩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는 이만한 놀이도 없었던 터라 큰 인기를 끌었고, 특히 콩콩게임북스가 유명했죠. 당시 한창 일본에서 유행하던 걸 해적판으로 들어온 거였습니다만. 내용은 으시으시하게 판타지/SF/호러가 많았고, 가끔 (저작권을 줬는지 모르겠지만) 홈즈랑 뤼팽이 주인공의 길잡이로 나와 악마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런 게임북이 나왔는데, 어디가 먼저인지는 모르겠군요. 여하튼 여러 시리즈가 생겼는데, 그 중에 힐러리 밀턴이 지은 Plot-Your-Own Horror Stories도 있습니다. 딱 보면 알겠지만 공포물인데, 7번째 시리즈가 Museum of the Living Dead로 우리나라에선 <공룡 박물관의 공포>라고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제목이 더 낫다고 보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공룡들에게 쫓기는 걸 가리키기 때문이죠. 원제는 무슨 좀비물 같은 느낌. 내용은 대충 고대 자연사 박물관에 놀러 갔던 한 소년이 밤늦게 혼자 박물관에 갇히고, 천둥폭풍이 몰려오면서 모형 공룡들이 실제로 깨어난다~ 하는 식입니다. 공룡이 나타났으니 죽어라 도망쳐야겠죠? 독자는 소년이 되어서 넓디 넓은 박물관을 탐험하고 목숨을 부지해 탈출해야 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라면, 생생한 묘사와 끔찍한 이야기 전개일 겁니다. 악마의 노래가 들린다거나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는 홍보문구는 단순한 광고가 아닙니다. 소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괴물들이 미쳐 날뛰는 어비스에 떨어진 것마냥 무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글 솜씨가 꽤 괜찮아서 정신 없이 선택지를 고르다 보면, 어느 새 공포소설을 열심히 탐독하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게다가 배드 엔딩의 종류도 상당한데, 소년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죽습니다. 그냥 육식공룡에게 물려 죽었다가 끝이 아닙니다. 원시인에게 붙잡혀 산 채로 화석이 되거나, 스테고사우루스 골판에 끼어 다진 고기가 되거나, 공중에서 떨어져 매머드 상아에 꿰이거나, 익룡 부리에 장기가 뚫린다거나 등 잔인하면서도 자극적인 엔딩이 수시로 쏟아집니다. 죽기 전, 주인공의 회한을 보노라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 내용은 아동도서 같지만, 작가의 문체는 성인을 지향한 것 같습니다.

 

제일 기억나는 문구가 어째서 이런 놈을 바위에 화석으로 남겨두지 않았을까. 이거였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중얼거렸을 겁니다. 디메트로돈에게 사지가 뜯기면서, 알로사우루스의 발에 밟혀 진흙탕에 질식하면서, 함정에 빠져 육식공룡 미끼가 되면서. 아주 어렸을 적에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충격과 공포의 현장이었네요. 아마 스테고사우루스나 매머드처럼 친숙한 초식동물을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해놓은 얼마 안 되는 작품일 겁니다. 여러 공룡 작품을 봤지만, 설마 하니 스테고 골판에 끼어 육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커다란 육식공룡만 내보내 사람 잡아먹는 천편일률적인 공포물은 이런 책을 좀 본받아야 해요. 매머드를 악마 같은 괴물로 보는 시각이 어디 그리 흔하겠습니까.

 

공룡의 종류는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전부 다 기억이 나진 않네요. T-렉스처럼 대형 스타는 의외로 안 나왔던 것 같습니다. 대신 알로사우루스가 그 자릴 대신했죠. 루티오돈이란 고대 악어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이런 악어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엄청나게 큰 뱀도 나왔던 것 같고, 트리세라톱스도 기억이 날 듯 말 듯. 디메트로돈까지 나왔으니 중생대를 거의 커버한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머드나 원시인도 나와 신생대까지 범위를 넓혔죠. 다양한 배드 엔딩을 만들려는 작가의 애환이 돋보입니다. 허나 공룡을 어디까지나 악마, 괴물로만 묘사했기에 정확한 고생대 지식이나 고대 생태계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공룡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 것도 아니에요. 초식동물이랑 같이 논다거나 거대 뇌룡들이 모여 장관을 이룬다거나 뭐, 이런 장면 절대로 없습니다. 공룡의 멸종과 신비도 전혀 관심이 없고요. 공룡 팬을 위한 서비스는 상당히 부족한 모습. 주제가 공포이긴 합니다만, 공룡의 부정적인 면모가 강조한 건 아쉬울 따름입니다.

 

국내 번역서에서는 디자인을 아동 편집부에게 맡겼는지 유치한 그림이 많습니다. 이건 상당히 불만입니다. 책 내용이랑 삽화가 전혀 맞질 않거든요. 기괴한 내용이 이어지는데, 막상 그림을 보면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공룡들이 재롱을 떱니다. 희한하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국내 삽화랑 원작 삽화를 뒤섞어서 가끔씩 원작 삽화도 나옵니다. 동그란 그림체만 보다가 가끔씩 원작 삽화가 툭 튀어나오면 나름대로 그것도 공포. (설마 이걸 노렸던 건가!) 실사에 가까운 화풍으로 공룡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 이런 책에 아동용 삽화를 넣은 출판사가 무슨 생각이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고대 악어가 소년을 피범벅으로 찢어놓는데, 아이들이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 건지. (덕분에 저는 잘 봤지만요.) 관련 삽화를 찾아보고 싶은데, 인터넷에는 자료가 별로 없어서 안타깝네요.

 

이렇게 독자를 잔뜩 겁주면서도 해피엔딩은 두 개인가 밖에 안 됩니다. 공포물이니까 해피 엔딩이 많으면 안 되겠죠. 하나는 알로사우루스가 휘두른 꼬리에 맞아 벽이 허물어지면서 소년이 거기로 빠져나가는 것. 다른 하나는 학급에 결원이 생기자 선생님이 구하러 온 것. 아마 출입구를 찾아 달리는 것으로 하나가 더 있을 겁니다. 선생님 엔딩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랑 마찬가지여서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선생님이 짠~ 등장하자마자 박물관이 정상으로 돌아간 것도 그렇고요. 공룡이 쫓아오진 않는지, 주인공이 불안에 떨며 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알로사우루스가 우연히 허물어뜨린 벽으로 탈출하는 장면은 그보다 낫습니다. 미친 듯한 폭우를 맞으면서도 마침내 살았다고 외치는 부분은 가히 <쇼생크 탈출>의 쾌감에 비할 정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출입구를 향해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는 장면이에요. 어디까지나 출입구를 향해 넘어지고, 구르면서, 뛰었다.라고 하지, 탈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출입구로 가다가 공룡한테 죽었을 가능성도 내포했다는 겁니다. 아니면 출입문이 닫혀서 열리지 않다거나. 허나 환희에 차서 불안정한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심정이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열린 결말을 지향하되 불안한 여운을 남긴다고 할까요. 그리고 외부의 도움이나 우연이 아닌, 자력으로 탈출하는 유일한 엔딩일 겁니다. 오래 되놔서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아마 그럴 거에요.

 

어렸을 때 이 책을 산 건 어디까지나 공룡 책이 읽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웬 공포물이라서 좀 당황하기도 했습죠. 그래도 내용 전개가 썩 괜찮고 재미있어서 아직도 잊지를 못합니다. 공포물에서 공룡을 어떤 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색다른 시도였고요. 요즘에 나오는 뻔한 공룡 작품을 보면서 가끔은 이 책의 상상력이 참 그럴 듯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