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게임 공략 동영상이 많이 발달해서 찾아보기가 참 편합니다. 화제가 된 게임 <헤일로 리치>도 발매하자마자 영상이 수두룩하게 올라왔네요. 엄청난 인기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하여서 엔딩까지 보고 난 소감 몇 자 적어봅니다. 게임을 해본 게 아니라 공략은 아니고, 플롯을 보고 느낀 점입니다. 당연히 내용누설 담뿍 담겼습니다. 치명적인 천기누설까지 있습니다! 아직 싱글 미션을 진행 중이시면, 주의 바랍니다.


zhalonoble.jpg 

- 전체적인 줄거리는 당연히 리치 행성에 코버넌트가 나타나고, UNSC는 패배해 물러난다는 것. 다른 시리즈와 달리 비극이므로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울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암울하진 않습니다. 행성 전체가 파탄이 나고 인류는 끝장난다는 느낌이 좀 부족했습니다. 다만, 시선을 주연인 노블 팀에 맞추고 보면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연속입니다. 특히, 중반부를 지나고 본격적으로 노블 팀이 수세에 몰리면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인류의 패배보다는 주연들의 희생에 초점을 둔 듯합니다.

 

- 게임 초반부는 노블 팀이 리치 행성에서 코버넌트 군대를 발견하고 교전하는 내용. 후반부는 코버넌트 시설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탈출시키는 내용입니다. 패색이 짙어지는 중반 이후에는 플레이 양상이 약간 달라집니다. 허나 각종 행성과 우주선, 시설물을 오가며 무대가 바뀌던 전작과 달리 오로지 리치 한 군데서만 싸우기 때문에 패턴이 반복된다는 느낌도 없진 않더군요. 주연은 늘어났으나 스케일은 작아졌다고 해야 할까. 소재 자체가 리치 행성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어쩔 수 없죠. 거기다 이미 스토리가 정해진 사건이니 새로운 배경을 함부로 집어넣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 사건 진행이 어디까지나 노블 팀 입장이라는 것도 차이. 마스터 치프와 엘리트 아비터 양쪽을 주인공으로 삼아 두 세력의 균형을 추구했던 전작과 다른 점이죠. 코버넌트와의 교류는 없고 철저하게 양쪽은 적이기 때문에 엘리트 측의 시각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공동의 적이자 혐오스러운 괴물인 플러드 역시 일절 안 나옵니다. 방대한 우주 서사시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한 종족 구성이에요. 대신 노블 팀 6명의 단합을 크게 강조합니다. 처음부터 우르르 뭉쳐 다니고 누구 한 명이 낙오하는 일도 없기에 이전의 ODST보다 전우애가 더 끈끈합니다. 이렇게 밥알처럼 붙어 다니던 부대원들이 후반부 들어 코버넌트에게 하나씩 당할 때마다 마음이 쿡쿡 쑤시죠.

 

- 헤일로 시리즈의 음악에는 마법이 있는 듯합니다. 멋진 주제곡과 어우러져 우주 서사시를 쓰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6명이 함께 싸우며 단합을 과시할 때, 노블 식스가 마지막에 홀로 떨어져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할 때 절정에 달하더군요. 특히, 무대가 리치 하나라고 해도 코버넌트 함선의 공격을 피해 습격하는 중간 미션은 서사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을 지경. 이벤트 연출은 변한 점이 없어서 참신하진 않으나 그만큼 기본은 합니다. 아군 함선이 지원하러 날아오다가 몇 번씩이나 박살 나는 장면은 왜 그리 처참하던지.

 

- 전체적인 소감은 헤일로 1~3 시리즈의 프리퀄이 아니라 3편 ODST 시리즈의 확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엔딩 연출이 꽤나 의미심장하여 프리퀄이란 제 몫을 다 해냅니다.

 

- 노블 팀 6명은 호출번호대로 카터 대령, 캐서린 중위, 준 준위, 에밀 준위, 조지 원사 그리고 주인공 노블 식스(중위)입니다. 이름이 없는 이유는 신상이 철저하게 기밀이기 때문. 기존 시리즈는 마스터 치프의 얼굴을 안 보여주더니 ODST편에서는 루키의 정체를 감추었죠. 이번 작에서는 아예 주인공 설정을 유저에게 맡깁니다. 갑옷 생김새와 목소리 심지어 성별까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취향에 따라 노블 식스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될 수도, 활기찬 아가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초 설정이 게임 내 목소리와 모습은 물론 이벤트 동영상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거의 역사를 다시 쓰는 기분이 들더군요. 제작진은 패배와 승리가 엇갈리는 이 행성의 사건에 유저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길 원했나 봅니다.

 

- 주연 6인방 중 크게 비중이 있는 건 카터, 캐서린, 조지. 준과 에밀은 예고편에서는 뭔가 있을 듯이 나오더니만 막상 활약이 뚜렷하진 않습니다. 노블 팀 중에서 누가 안 중요하겠습니까만. 나머지 대원들이 톡톡 튀는 것에 비해 묻히는 기분이에요. 준은 까불거리는 성격이긴 한데, 가끔씩 수다 떠는 것 빼면 별 거 없습니다. 에밀은 헬멧에 험악하게 해골까지 그려놓았지만, 험악한 외관과 달리 임무 수행 내내 조용합니다. 그나마 에밀은 마지막까지 노블 식스와 함께 했기 때문에 비장미가 철철 넘치기라도 하는데. 준은 슬그머니 사라져 의문만 남기고 마네요. 뭐, 어느 팀이나 튀는 자가 있으면 묻히는 자도 있지만.

 

- 카터는 신중하고 냉철한, 전형적인 지휘관. 임무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무릅쓰지만, 부하를 생각하는 따뜻한 심성도 있습니다. 캐서린은 카터를 도와 임무를 지휘하는데, 성격이 좀 까칠한 듯. 지휘 방식이 달라 카터와 몇 번 충돌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카터가 캐서린의 말을 들어주는 편입니다. 만일 노블 식스를 남성으로 설정했으면, 부대 내 홍일점입니다만. 다들 스파르탄 병사라서 연애 노선 그런 거 없습니다. 노출도 없이 두터운 갑옷을 입었음에도 여성 특유의 풍만한 곡선과 몸매를 과시합니다. (방어도와 비례해서 노출도가 올라가는 여성 캐릭터들은 반성 좀 해야 할 듯.) 조지는 얼굴도 그렇고 마음씨도 그렇고, 친근한 옆집 아저씨. 무식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상당히 자상합니다. 성격 묘사에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가 아닐까 하네요. 그래서 최후 장면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 이 게임의 플롯이 빛날 때는 코버넌트 코르벳에 침투하는 미션 이후부터일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UNSC의 패배를 상징하듯 미션 하나 끝낼 때마다 대원이 한 명씩 죽어갑니다. 저는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 언급했듯 조지였습니다. 리치 행성을 구하기 위해, 코버넌트 함대를 몰살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쳤죠. 가장 처음 희생한 대원이란 점에서 죽음을 기릴 시간이 충분했고요. 진부하다면 진부한 공식이지만, 설마 거기서부터 줄줄이 죽어나갈 줄은 몰랐던 터라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에밀은 어떻게 해서든 노블 식스와 필라 오브 오텀을 지키려다 죽었네요. 카터와 헤어질 때부터 하는 대사를 들어보면, 애초에 살아서 리치 행성을 탈출할 마음은 없던 것도 같습니다. 어차피 우주선이 탈출하고 나면, 자신은 빠져나갈 길이 막히니까요. 카터는 부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목표물 전달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자살 돌격. 조지와 함께 자신을 희생한 죽음이라 대장님 죽을 때는 마음도 뭉클. 총에 맞아 헬멧을 떨어뜨릴 때부터 죽을 기미가 슬슬 보이더니만.

 

- 캐서린의 죽음은 좀 어이가 없다고 할까요. 카터, 에밀, 조지 모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례인데, 혼자만 저격으로 즉사. 그것도 헤드샷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이라 당황하긴 했습니다만. 고귀하다는 뜻의 노블이란 부대명칭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캐서린도 다른 사람을 지키다 죽는 편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봐요.

 

- 노블 식스의 최후는 눈물 없이는 논할 수가 없을 정도. 제작진이 좀 악랄(?)한 것이 식스는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필라 오브 오텀이 탈출하고, 엔딩 크레딧까지 올라간 다음 끝난 줄 알았는데, 미션이 하나 더 있네요. 임무 목표는 생존. 노블 식스는 혼자 남아서 도와주는 아군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코버넌트들과 대적합니다. 중요한 건 이 미션은 어떻게 하든 결국 실패하게끔 되어있다는 것. 하지만 유저는 조금이라도 살아보려고 싸우고 또 싸우다 죽죠. 그리고 이어지는 이벤트 동영상에서 엘리트 셋에게 에너지 소드로 칼침을 맞고 사망. 마지막 남은 대원인데, 죽이려면 곱게 좀 죽일 것이지. 질 걸 뻔히 아는데도 제발 지지 말라고 응원하게 되더군요.

 

- 진정한 엔딩은 그 후에 나오는 해설. 바닥에 떨어진 노블 식스의 헬멧을 보여주며, 당신이 있었기에 헤일로의 비밀을 풀고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노블 식스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즉, 게임 내의 가상 인물이 아니라 유저가 있었기에 인류가 승리했다는 뜻. 다른 게임들은 이럴 때 작중 주인공 이름을 언급하며 아무개가 악당을 물리치고 영웅이 되었더라 식으로 풀어나가죠. 허나 이 작품은 주인공을 신원을 감추고 대신 유저의 참여를 유도하여 역사 속에 남게 하는 방법을 씁니다. 이 방식이 정말 좋았습니다. 전쟁 속 숨겨진 영웅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네요. 마음이 짠~ 해집니다.

 

- 헬시 박사와 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안 나오던데. 이 부분을 설명하느라 나중에 또 외전이 나오겠군요. 준이 노블 대원들과 헤어질 때 보는 입장에서는 감상이 애매했습니다. 이 헤어짐 때문에 준은 홀로 살아남으니까요. (아니, 헬시 박사랑 같이 사망하게 될 수도 있겠군요.) 만약 살아남아도 대원들이 리치 행성 한 군데서 깡그리 전멸했다는 걸 알면 속이 많이 복잡할 겁니다. 떠버리 캐릭터가 혼자 산 것도 나름대로 공식이라면 공식일까.

 

- 막판에 선조 유물과 함께 코타나가 나옵니다. 생김새는 3편과 동일. 헬시 박사의 설명인 즉, 선조를 연구하던 인공지능이라고 하네요. 이 때문에 코타나를 선조가 만들었다는 가설이 떠올랐습니다. 하긴 그 전부터 헤일로도 마음대로 건드린 걸 보면 단순한 인공지능 같지는 않았지만요. 그러나 이것만 봐서는 선조 인공지능에 헬시 박사의 자아를 집어넣은 것인지, 그저 선조를 연구만 하던 UNSC의 인공지능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답은 <헤일로 4>가 나와야 할 겁니다. 필라 오브 오텀이 탈출하자 키예스 선장과 나누는 대화는 <헤일로> 1편을 암시해서 추억을 자극합니다. 코타나는 (운이 좋은 스파르탄인지) 노블 식스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정작 둘이 대화하는 장면은 안 나와서 아쉽네요.

 

- 마스터 치프가 나온다 아니다 말이 많았는데, 공식적으로는 안 나옵니다. 사실 다른 스파르탄 병사들도 안 나오고요. 단, 이스터 에그 방식으로 얼굴만 볼 수 있습니다. 필라 오브 오텀 내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잠깐 캡슐 안에 누워있는 치프의 헬멧이 지나갑니다. 흠, 만일 치프가 더 나왔다면 노블 대원들이 상대적으로 묻혔을 테죠. 노블 식스의 희생도 빛이 좀 바랐을 테고. 그런 점에서 치프는 딱 적당히 나온 것 같습니다.

zreach.jpg 

 

- 스토리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념에 젖어 기존 시리즈를 떠올리게 할만한 힘은 충분하네요. 노블 식스가 쓰러지고 헬멧만 덩그러니 남은 엔딩을 볼 때마다 눈물이 글썽글썽. (엉엉, 노블 식스가 너무 불쌍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