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팬에게 잭 런던은 <강철군화>로 잘 알려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가는 골드 러시가 한창일 1890년대 후반에 금을 캐러 야외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때 받은 영향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대자연과 동물들의 삶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죠. 특히, 개과 동물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 단편과 함께 <늑대개>와 <야성의 부름>이 유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늑대개>를 더 좋은 소설로 쳐주는 듯하더군요. 아마 디즈니에서 영화를 만들어 친숙하기도 할 테고, 늑대개란 어감이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겠죠. 늑대와 개의 잡종이라니, 꽤 신비한 동물 같잖아요. 하지만 <늑대개>가 이렇게 잘 나가는 반면, <야성의 부름>은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합니다. 사실 더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건 <야성의 부름>쪽이거든요.

 

전반적으로 살펴보자면, <늑대개>와 <야성의 부름>은 엇비슷하면서도 서로 반대편에 있습니다. 일단, 개과 동물, 그것도 카니스 루푸스 소속의 동물이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절반이 개, 절반이 늑대입니다. 그래서 북미의 광활한 대자연에 속하기도 하고, 인간의 도시에 속하기도 하죠. 소설은 이들이 절반씩의 정체성을 잃거나 찾아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허나 그 방향이 다릅니다. <늑대개>의 주인공인 하얀 송곳니는 야생에서 태어납니다. 야생 늑대와 썰매 개 사이에서요. 그리고 보살펴주던 늑대가 죽자 숲을 떠돌다 아메리카 원주민 캠프에 들어갑니다. 그러다 결국 흐르고 흘러 부유한 백인을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즉, 야생에서 태어나 인간 문명에 안착합니다. 반면, <야성의 부름>은 제목답게 인간 문명에서 태어났지만 야생으로 되돌아갑니다. 벅은 야성이라곤 전혀 모르던 길들여진 개였으나 우연히 썰매 개로 팔려나가고, 거친 야외 생활을 하며 성격이 점차 호전적으로 변해갑니다. 그 와중에 점차 숨은 본능에 눈 뜨며 끝내는 완벽한 들개 우두머리가 됩니다.

 

하얀 송곳니는 늑대로 태어났으나 개로 남으며, 벅은 개로 태어났으나 들개로 변모합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서로 반대죠.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글의 분위기 또한 정반대입니다. 하얀 송곳니는 모진 고생을 하긴 했으나 어쨌든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찾습니다. 미국인 가족은 친절하고 온화하며, 가정 생활은 따스하고 포근하고, 결국에는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입니다. 동화처럼 행복하게 끝나고, 깊이 생각할만한 고민거리도 없는 편이죠. 하지만 벅은 썰매 개로 팔려나가서부터 고생 복이 터집니다. 하루라도 다른 개들과 싸우지 않는 날이 없고, 사람들한테 두들겨 맞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 전반부~중반부는 벅이 항상 피투성이로 두들겨 맞거나 물어뜯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다른 개를 죽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피를 부르는 싸움이니 분위기가 무거운 것은 당연한 일. 순박하고 천진난만했던 벅은 갈수록 성깔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고요.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냉혹한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곤 합니다.

 

저는 특히 <늑대개>보다 <야성의 부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하나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간과 개가 함께 한 1만년의 역사를 환상적으로 묘사한다는 겁니다. 벅은 야외 생활을 하는 데 익숙해진 어느 시점부터 환영을 보기 시작합니다. 꿈에 인간들이 나와 활보하는데, 그 생김새는 예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옷은 벌거벗었으며, 두 팔은 축 늘어뜨리고, 몽둥이를 들고, 동굴에 거주합니다. 벅은 그 꿈을 꿀 때마다 무언지 모를 강렬한 충동에 휩싸이고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이 개가 꾼 꿈은 멀고 먼 늑대 조상이 최초로 인간과 교감을 하고, 거친 야생에서 따뜻한 불이 있는 동굴로 넘어왔다는 걸 시사하죠. 그때부터 늑대는 가축으로 점차 길들여졌으나 자연이 내린 본능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있어 썰매를 끌기 시작하자 조금씩 불이 붙은 겁니다. 이 환영은 벅을 더욱 야외로 몰아붙여 피에 굶주린 고독한 야생동물이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늑대개>에는 이처럼 원시적인 향취가 강하게 진동하는 묘사가 없습니다. 문명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니 당연하겠지만.

 

게다가 하얀 송곳니와 벅이라는 캐릭터를 들여다 보면, 벅 쪽이 더 입체적인 캐릭터입니다. 하얀 송곳니는 눈 앞에 들이닥치는 위기만 벗어날 뿐 자신의 정체에 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늑대 밑에 있을 때는 그냥 새끼로, 아메리카 원주민 밑에서는 거친 개로, 백인 가족 밑에서는 친절한 개로 변할 뿐입니다. 워낙 행복하게 결말이 나서 고민조차 할 필요가 없죠. 반면, 벅은 매 장면마다 골머리를 싸매야 합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벽난로가 있는 뜨끈한 집안에 있다가 몰매를 맞으며 썰매를 끌어야 하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죠. 게다가 주위 환경은 갈수록 험악해지고 생존하기 어려우며, 속에 숨은 야생 본능은 계속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합니다. 벅은 마침내 야성의 부름에 응하지만, 그렇다고 개가 늑대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백인 가족 밑에서 편한 게 살던 시절의 기억은 남아있죠. 그래서 야생동물이 되긴 했으되 돌아갈 수 없는 가축으로서의 삶을 한탄하곤 합니다. 벅은 외롭습니다. 개로서 이제는 다시 인간과 교감을 나눌 수 없으니 사무치도록 외롭습니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의 기분 또한 상반되죠. <늑대개>는 마음이 포근해지는 소설입니다. 운명적으로 태어난 주인공이 모험을 겪은 끝에 행복하게 잘 살죠. 하지만 <야성의 부름>은 찜찜하기 그지 없습니다. 평범한 주인공이 난데없이 죽을 위기에 휘말리더니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고생 끝에 고생이 오고, 또 고생이 옵니다. 그나마 좀 인생이 피려고 하면, 그보다 갑절의 고생이 뒤따릅니다. 끝없이 추락하는 밑바닥 인생 앞에는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죠. 이제는 쓸쓸하고 허전한 심정을 감추고 완전히 야생에 적응하는 길 뿐. <야성의 부름>은 결코 기분이 좋아지는 책은 아닙니다. 추억을 곱씹으며 외롭게 황야를 떠도는 벅을 보면 마음이 쓰라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어쩌면 책 내용에 충격을 받고 원시인이 나오는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저는 어렸을 적에 그랬거든요….


뭐, <늑대개>가 <야성의 부름>보다 딱 하나 멋진 게 있다면 주인공 이름이죠. 하얀 송곳니…, 꽤 그럴듯한 이름 아닙니까. 벅은 너무 개성이 없어서….

 

이 글에서는 <야성의 부름>의 편을 들어주지만, 사실 저도 어렸을 적에 이 책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자연의 들개로 돌변한다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벅이 원시인 꿈을 꾸는 장면은 원시적이다 못해 영혼이 태고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며칠 간 악몽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이 책은 주류 문학 쪽이지만, 장르 문학에서도 이 정도로 원시성이 강한 작품도 없을 겁니다. 원시인을 다룬 유명한 소설이 <대지의 딸 아일라>일 텐데, 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원시성은 <야성의 부름>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더군요. 아니, 굳이 장르고 뭐고 구분할 필요 없이 글 자체만 따져도 그렇습니다. 이 소설을 장르문학으로 취급하는 평론가는 없겠지만, 저는 오히려 그런 쪽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가끔 듭니다. 대체역사물이나 원시시대를 다룬 SF는 아니지만, 그럴 정도로 색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직접 원시인이나 원시 늑대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 허나 인간과 최초의 가축이 1만여 년 동안 교류한 과정을 짧고도 강하게 묘사하죠.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역사물의 성격도 있지 않나 싶어요. 그저 단순히 들개가 나오는 소설이 아닙니다.

 

<야성의 부름>은 편하게 볼만한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개>보다 떨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이 <야성의 부름>의 매력일 겁니다. <늑대개>가 읽기 쉽다고는 하나 읽기 쉬운 책이 꼭 더 좋은 책인 것만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