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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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라이트 노벨’이라는 단어가 유행했습니다. 아마 다들 머릿속에 떠올리시는 소설책이 한두 권쯤 있을 텐데, 희한하게 막상 정확한 뜻은 아무도 모르더군요. 어떤 것이 라이트 노벨에 속하지는 정할 수는 있어도 라이트 노벨의 정의를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독자마다 자기 나름의 정의를 세우곤 합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분류법 중 하나가 ‘삽화가 들어간 일본 장르 소설’이라는 겁니다. 흠, 이 정도면 꽤 그럴 듯하네요. 아마 이 범주를 벗어나는 라이트 노벨은 많지 않겠죠. 그런데 이 삽화라는 게 단지 일본 장르 문학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판타지/SF가 태동했을 때부터도 인기 장르 소설에 삽화를 넣는 건 하나의 관례였다고 그러더군요. 혹은 작가가 원해서, 혹은 그저 흥미를 끌기 위한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요.
그림이 들어간 장르 문학의 좋은 사례로는 소설 <호빗>과 <반지전쟁>이 있습니다. 톨킨 교수님은 상상력이 풍부한 언어학자이자 신화 및 역사 애호가였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서정적인 화가이기도 했죠. 주로 풍경을 그리거나 문양을 짜거나 지도를 편집했고, 때로는 괴물도 구상했습니다. 영화로도 잘 알려진 동글동글한 호비튼 모습은 톨킨이 직접 그린 걸 바탕으로 제작한 겁니다. 카잣 둠 입구에 있는 문장도, 중간계를 표현한 지도도 그러하죠. 특히, <호빗>을 보면 삽화가로서 톨킨의 재능을 알 수 있습니다. 호비튼부터 리븐델, 호수 도시까지, 호빗과 독수리, 황금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소와 종족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글 하나 잘 쓰기도 힘든데, 이 양반은 글도 잘 쓰고, 설정도 잘 짜고, 그림까지 잘 그리는군요. 역시 괴수는 뭐가 달라도 다른 듯.
[작가가 직접 그린 바람의 왕자 과이히르와 빌보 배긴스.]
판타지 소설에서 삽화는 독자가 새로운 개념에 친해지는 역할을 합니다. <호빗>에 나온 거대한 독수리나 트롤, 용 등은 기존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약간 변형되었으므로 그림이 있으면 알아보기 편하죠. 게다가 키가 작고 발에 털이 난 호빗과 둥그렇게 땅굴을 파고 사는 호비튼 광경은 이전의 판타지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톨킨이 직접 만들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림이 있으니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샤이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호비트가 어떤 종족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판타지만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SF도 마찬가지죠. 오히려 기댈만한 신화가 없다는 점에서 SF쪽 삽화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 SF 중에서는 <해저 2만리>의 삽화가 눈에 들어오네요. 국내에 번역한 완역본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노틸러스라는 상상 속 잠수함을 눈앞에 그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글만 읽어도 대략 노틸러스가 떠오르긴 하지만, 그림이 있으면 이해가 훨씬 쉽죠. 사실 노틸러스는 유명한 잠수함입니다만, 그 모습이 어떤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럴 때 책 속의 그림을 찾아보면 좋겠죠. 이 삽화들은 여러 화가들이 번갈아 가며 그린 것인데, 쥘 베른 이 인기를 얻자 시리즈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집어넣은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소설에도 비슷한 그림들이 있고, 달나라로 날아가는 로켓이나 지구 속 공룡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지구 속 여행>에서 수장룡이 싸우는 그림은 가히 괴수물 사전에 등재해도 좋을 정도.
[<신비의 섬>에서 실체를 드러낸 노틸러스호. 사실 이 잠수함은 저렇게 생겼습니다.]
뭐, 아쉽게도 요즘 눈으로 보자면 그리 좋은 그림은 아닙니다. 책에 그린 노틸러스호는 제대로 된 잠수함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네모 선장과 아로낙스 일행이 갑판에 올라오는 장면이 꽤 많은데, 갑판과 바다 사이의 거리가 2m도 채 안 됩니다. 게다가 갑판이랍시고 있는 게 편편하지도 않고 둥근 데다가 제대로 된 난간도 없습니다. 조그만 파도라도 하나 치면 전부 휩쓸려갈 판이죠. 그 큰 잠수함에 조종석이라고 만들어놓은 곳은 모기 눈곱만큼 작고, 탐조등도 위태위태하게 달렸습니다. 만약 삽화에 나온 대로 잠수함을 만들었다면, 네모 선장은 인도양을 나서지도 못하고 꼬로록~했을 겁니다. 그리고 책 속에 노틸러스호 전체 모습을 제대로 그려놓은 건 한 장면도 없습니다. 사실 삽화가들도 노틸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는 소리입니다. 작가인 쥘 베른이 알려주질 않았나 봅니다…. 게다가 해양동물에 관한 지식도 부족해서 괴수를 그려놓기 일쑤였습니다. 향유고래 그림은 과학에 밝은 현대인이 보기엔 무슨 초등학생 낙서 같기도 합니다.
이게 당시 내노라 하는 화가들의 그림인지라 좀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삽화를 그린 건 19세기였고, 공학이나 생태학과는 거리가 먼 직업 화가들의 그림이었다는 걸 명심해야 하겠죠. 당시 한계로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이때는 SF니 설정이니 하는 게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때였고요. 솔직히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도 고증을 잘 지키는 작품은 드물잖아요.
여담으로 SF의 삽화는 ‘새로운 개념을 눈으로 보여준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삽화만이 아니라 표지 그림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설정을 만들어놔도 삽화 혹은 표지 그림이 엉망이면 물귀신처럼 같이 망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SF 소설의 표지 그림에 관해서는 그간 클럽에서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만. “백 번 읽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속담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유난히 말도 안 되는 그림을 집어넣어 소설을 망치는 경향이 잦은 것 같습니다.)
[삽화는 아니지만, 게임 관련 소설은 설정 때문에 표지 그림이 중요해지기도 하죠.]
판타지와 SF 뿐만 아니라 추리 장르에도 삽화는 한몫을 해냅니다. 이게 특히 두드러진 시리즈가 <셜록 홈즈> 시리즈. 모든 홈즈 시리즈에는 삽화가 들어갔는데, 프랭크 와일과 시드니 파젯의 작품이 특히 유명합니다. 이 사람들이 그린 삽화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머리 크고, 코가 뾰족하고, 괴상하게 생긴 탐정의 전형을 구축했죠. 그런데 추리 소설에서 왜 삽화가 중요한가 하면, 그건 홈즈의 추리 방식과 왓슨의 전기 형식 때문입니다. 자, 홈즈는 추론의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그 사소한 것 하나에서 발전해 사건의 거대한 연결고리를 밝혀내곤 합니다. 작은 부분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되는 단서입니다. 따라서 독자(매니아)가 보기에 책 속의 삽화는 사건 현장을 진실되게 그렸어야 합니다. 그게 홈즈의 방식에 맞으니까요.
글 속에서는 탐정이 멋지게 추리를 하는데, 그림 속의 사건 현장이 난잡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삽화는 없는 것만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홈즈 시리즈를 읽는 독자는 대개 홈즈의 방식을 따라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사건 단서가 될만한 것, 특히, 그림을 두고 눈에 불을 켜죠. 그래서 ‘과연 이 그림은 왓슨이 쓴 기록대로 그린 것인가? 홈즈의 설명과 그림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없는가? 그림이 사실을 잘못 표현한 부분은 없는가?’ 등등의 여러 가지 의문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그림은 종종 지적을 당하곤 합니다. 가령, <주홍색 연구>의 첫 번째 살인 사건에서 왓슨은 ‘방 안에 무수히 튄 핏자국이 있다.’고 했는데, 삽화에는 핏방울이 전혀 없습니다. 홈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런 실수는 두고두고 까기 마련이죠. (홈즈가 실제로 있었더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왓슨은 분명히 무수한 핏자국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핏자국은 어디에?]
이외에도 찾아보면 몇 개 더 있을 겁니다. 최근 번역본으로 삽화가 들어간 장르 소설로는 <솔로몬 케인>이 기억납니다. 어쨌든 예시로서는 이 판타지, SF, 추리 등 고전소설 세 개면 충분할 듯하네요. 공포나 무협 쪽은 제가 잘 모르기도 하고. 여하간 장르 문학에 삽화를 넣어 상상력을 보탠 건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태생했을 때부터 존재했죠. 그러니까 인기 창작가가 되고 싶다면 글도 잘 써야 하지만 그림 실력도 한몫 해야 합니다….
아예 소설보다 삽화가 먼저라고 할 수 있는 발터 뫼르스의 <밤>과 같은 책도 있습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명 삽화가였던 귀스타프 도레의 삽화들을 기반으로 해서 쓰여진 팬터지 소설이죠. 작품 주인공을 귀스타프 도레라는 소년으로 설정하고, 죽음의 사자와의 내기를 통해 미션을 해결해가면서 소년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푸른 곰 선장>, <사라진 책들의 도시>와 같이 작가의 대표작이 모여 있는 [차모니아 연대기]와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만, 100 년 전에 그려진 개별적인 삽화를 이용하여 나름대로 줄거리를 엮어 소설을 완성해내는 작가의 솜씨가 범상치 않습니다.
몇몇 소설들에서는 삽화가 텍스트와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의 삽화는 작가가 직접 그린 것이었고, <어린 왕자>의 경우에도 생 텍쥐페리가 직접 삽화를 그려 넣었죠 - <어린 왕자>는 도입부에서부터 그림 그리기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들의 경우 반드시 원작자가 그린 삽화와 글이 함께 수록되어 책이 출간됩니다. 텍스트만 존재하고 있는 소설이라기보다, 그림과 텍스트가 함께 함으로써 한 편의 작품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소설 속에 삽화를 함께 수록하는 것은 오래 된 관행이고, 19세기에는 그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삽화가가 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삽화들이 21세기가 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하워드 파일의 <로빈 후드>의 경우 본래 원작자가 프로 삽화가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로빈 후드를 쓰면서 직접 삽화를 그려넣었는데, 후대에 이르러 텍스트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삽화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삭제되거나 다른 사람의 삽화로 대치되기도 합니다(물론 하워드 파일의 삽화가 수록된 판도 많지만, 엄청난 흡인력과 재미를 주는 이야기 전개에 비해 삽화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경우 당대의 유명 화가이자 미대 교수였던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훗날 <닥터 지바고>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부친)가 아예 톨스토이의 저택에 상주하면서 소설을 집필하는 톨스토이와 협의 하에 각 장면들에 대한 삽화를 한 장 한 장 그려나갔지만, 오늘날 그 삽화가 수록된 <부활>은 거의 찾기 힘듭니다 - 그 때 그려진 삽화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죠.
소설 못지 않게 서로 다른 삽화가 유명세를 치르는 작품으로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습니다. 존 테니얼의 초판본 삽화부터 유명하지만, 이후로도 수 많은 삽화가들이 앨리스에 도전하여 심지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초판본 삽화부터 20세기 삽화까지>라고 따로 삽화만 수집하여 조명하는 책이 나올 정도입니다.
20세기 이후의 소설 중 삽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라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마녀를 잡아라> 등을 쓴 로알드 달의 아동 팬터지 소설들의 경우에는 퀸튼 블레이크의 삽화가 작품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밀과 탐정들>, <하늘을 나는 교실>, <쌍둥이 로테> 등을 쓴 에리히 케스트너의 소설들도 발터 트리어의 삽화가 작품의 인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죠. 이 때문에 로알드 달과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들은 대개의 경우 초판본의 삽화가 함께 수록되곤 합니다 - 소설과 그림이 함께 해야 아귀가 맞는다는 것이죠.
국내에 번역된 SF 중, 미국에서 '삽화가 포함한 SF 시리즈(Illustrated Science Fiction)'로 나온 책을 번역한 게 한 편 있습니다. 왕년에 '나경 문화'에서 나왔던 제리 퍼넬의 <용병>이죠. 역자 후기에서 에이스북(Ace Books: 펭귄 출판 그룹의 자회사)에서 펴낸 '일러스트레이티드 SF 시리즈' 중 한 권을 번역했다고 밝혀 놓았고, 실제로 번역서 중간 중간 많은 삽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의 라이트 노벨 수준이죠. 어떤 의미에서 <용병>은 '미국판 라이트 노벨' 정도로 쓰여지고 읽힌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독자 대상으로 하는 구분 정도가 가장 유효한데 이것도 애매합니다.
전에도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라이트 노벨은 브랜드라는 측면이 더 맞죠.
그리고 삽화는 라이트 노벨이라는 것이 나오기 이전에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과거 틴에이지 소설에도 지금과 같은 비율의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었거든요.
사실 제가 보기에는 라이트 노벨은 기존의 틴에이지 소설들이(이것은 10대를
주요 독자라는 목적으로 써진 글이라서 브랜드이자 장르 구분이 가능한데) 힘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브랜드로서 라이트 노벨이라는 이름을 내놓았는데 10대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경향이 있습니다. 독자층을 확대하는 경향을 가졌지만
정확히 어느 대상을 목표로 하는지는 아직은 좀 모호한것 같습니다.
틴에지이 소설들이 트렌드를 바꿔서 좀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전략이 바로 라이트 소설이라는 브랜드라고 판단하는게 좀더 옳지 않나 싶습니다.
90년대 들어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의 출판계도 뭐 불황을 겪기는 했으니까요.
앞으로 시간이 상당히 흘러서 라이트 노벨의 포멀라이즈가 될 정도로 작품이 쌓이고 경향이 어느 정도
나와야 장르 구분이 가능해질것 같습니다. 아직 까지는 너무 역사가 짧고 출판사 인위적인 브랜드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