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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슈퍼맨 버스라이트>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심각한 건 아니지만, 내용누설을 완전히 피하고 싶으신 분께선 주의하세요.

만화 <슈퍼맨 버스라이트>는 슈퍼맨의 탄생을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이 강철인간의 데뷔는 누구나 잘 알고 있죠. 크립톤 행성이 멸망하자 부모가 우주선에 태워서 아이를 살리려 지구로 보냈고, 그 아이는 어느 미국인 부부가 발견하여 친자식처럼 키웁니다. 클라크 켄트라고 하는 아이는 무럭무럭 크지만,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 고민에 빠지죠. 부모가 사실을 밝히자 외계인으로서 자신을 인정하고, 극지방의 유적을 찾아 칼엘이란 본명을 알게 되고, 고향별의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리고 짜잔~ 슈퍼맨 탄생.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니 매드 사이언티스이자 악질 기업가인 렉스 루터의 음모가 대도시 메트로폴리스를 노리고 있었던 것. 클라크는 데일리 플래닛이라는 신문사에 기자로 들어가 일하며 친분을 쌓아가고, 결국엔 렉스 루터와 맞닥뜨리며 지구를 지키는 구원자로 떠오릅니다.

 

줄줄 늘어놓기는 했지만, 사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슈퍼맨 이야기야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 윤곽은 누구나 아니까요. 그렇죠? 헌데 <버스라이트>는 이 기존 구도에 교묘히 새로운 설정을 첨가함으로써 이 구닥다리 같은 신화에 참신함을 더합니다. 긴요한 양념 몇 가지가 요리의 최종적인 풍미를 결정하는 것과 비슷하죠. 몇몇 설정은 예전 것이기도 하고, 다른 외전에서 끌어온 것도 있으나 작가 자신의 해석이 들어간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슈퍼맨 태초의 전설을 해치지 않는 게 장점. 그렇다고 전체적인 플롯이 아이디어 하나에만 매달리지는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긴박감과 유머가 적절하게 들어가있어 기승전결은 몰입감이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가 조연들에게도 개성을 부여합니다. 화려한 그림체로 표현한 크립톤 행성이나 각종 로봇, 메트로폴리스의 활력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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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설정이라면 슈퍼맨이 자기 정체를 모른다는 겁니다. 클라크는 크립톤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왔기에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건 압니다. 우주선만 척 봐도 당연한 사실이죠. 문제는 그 우주선이 어디서 왔는지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 크립톤 영상이 있긴 한데, 언어가 달라서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아버지 조엘이 나타나 친절히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클라크는 자기가 왜 지구에 와야 했는지, 고향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자신이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습니다. 그저 양부모의 가르침과 자신의 신념만 믿고 나가는 수밖에요. 그리고 인류의 선의를 위해 구원자로 나서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이 정말 옳은 일을 하는 것인지 되묻기 일쑤입니다. 심지어 칼엘이라는 본명과 크립톤이라는 고향별 이름조차 몰라요. 이전의 슈퍼맨이 조엘의 탄탄한 주입식 교육을 받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활동했던 것과는 천지차이. 자기 가슴에 붙어있는 S 문양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떤 확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지구인들의 불신이 더해지면서 일이 커집니다. 슈퍼맨은 되도록 많은 사람을 구하려 하지만, 지구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외계인이 과연 믿을만한 존재인지 의심합니다. 가뜩이나 치안도 어지럽고 정세도 불안한데, 빨간 망토 걸치고 날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의심하고 보는 법이죠. 그리고 렉스 루터는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자신의 재력과 지식을 이용해 지구인들의 의심에 부채질을 하고, 슈퍼맨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그럴수록 의혹의 눈초리만 받을 뿐이죠. 가뜩이나 마음이 좌불안석인데, 세상도 이렇게 대접하니 구원자의 신념도 금이 갈 수밖에요. 이것 역시 이전 작품들에서 지구인이 슈퍼맨을 무조건 쌍수 들고 환영했던 것과는 정반대죠. 작품 결말까지 슈퍼맨은 지구인들에게 거진 인정을 못 받기도 합니다. 슈퍼맨이 기차를 멈추고 의사를 부르는데, 다들 도망가기 바쁜 장면에선 참 마음이 아프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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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이러니한 건 이 작품에서 크립톤의 정체를 먼저 알게 된 인물이 클라크가 아니라 렉스 루터라는 거죠. 덕분에 슈퍼맨은 자기 고향별이 한 줌 먼지로 변했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불구대천 원수 렉스한테 듣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의 홀로그램이 나타나 차분히 설명해주는 것과 조롱하고 비웃으며 원수가 까발리는 진실을. 똑같은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천지차이입니다. 렉스 입에서 흘러나오는 크립톤의 종말을 듣는 슈퍼맨의 표정이란. 거기다 크립톤 지식은 렉스가 더 앞서기 때문에 지구인이 아무리 크립톤 행성을 모욕해도 슈퍼맨은 뭐라고 반문을 못합니다. 여타 작품의 슈퍼맨들은 모든 사실을 알고 선택의 문제 때문에 갈등합니다만. 여기의 슈퍼맨은 무지의 고통이 곧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집니다. 그게 이 작품만의 매력이고, 차별성이죠.

 

개인적으로 이 해석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계인이 자기 고향별을 모른다는 점. 정체성의 혼란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의 고통으로 표현했다는 점. 사실 누구나 자기 자신한테 이렇게 물어보죠.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네, 이게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는 그 다음에 올 질문이고요. 그리고 크립톤의 비밀이 점차 밝혀지면서 슈퍼맨은 해답을 얻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찾으며 눈물 겨운 결말을 맞이합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타인(그것도 무지하게 싫어하는 타인)과 부딪히며 알게 되어서 문제긴 합니다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자신만의 존재가 우뚝 서는 것 같습니다. 홀로 고독하며 유일한 초인이 아니라 이리저리 깨지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일어나는 초인이죠. 어찌 보면, 니체가 원래 말한 초인 사상에 더 근접하기도 합니다. (딱 들어맞는다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니체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그래도 이전의 슈퍼맨들보다 더 가깝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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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여기서 보여주는 슈퍼맨의 희생은 더 값지게 나타나는데, 이미 언급했듯이 오해와 불신 속에서도 어떻게든 지구인을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죠. 아마 슈퍼맨이 자신이 누군지 알았으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겠지만, 지식의 부재로 인해 의혹의 구멍이 커져도 그걸 어쩌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메트로폴리스를 구하는 슈퍼맨은 이 작품에 없습니다. 크립토나이트 때문에 온몸이 쇠락해도 끝내 미사일과 화망을 막아가며 쓰러지는 슈퍼맨만 있을 따름이죠. 그 미사일과 총을 쏘는 건 다름아닌 슈퍼맨이 지켜주려는 지구인들이고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자신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지키려고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그것도 드높은 이상이나 뭐, 그런 게 있는 건 아닙니다. 신념이 있기 하지만, 교육을 받았다기보다 타고난 환경 자체가 클라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정체가 뭔지를 모르니까 넋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남는 건 선행뿐. 일단 선행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 점과 관련하여 <버스라이트>는 슈퍼맨의 성장기를 곳곳에 배치합니다. 클라크가 이렇게 자랐기에 커서 이런 일을 한다는 식입니다. 그 중에 저널리스트로 해외를 돌면서 각국의 갈등과 문제를 목격하기도 하는데, 범세계적인 슈퍼맨을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결국 모든 사건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벌어지느라 미국 속의 슈퍼맨이란 이미지를 떨치지는 못합니다만. 제3국의 정치 상황에 개입하는 클라크 켄트는 적절했습니다. 클라크 켄트 같은 인물이 실제 있다면 미국에만 붙어있진 않겠죠. 더불어 클라크가 스몰빌에서 렉스 루터와 함께 자랐다는 설정도 들어있습니다. 동시기에 방영한 드라마 <스몰빌>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게 아닌가 싶은데. 렉스의 성장기는 정말 안구에 폭풍이 몰려올 정도로 불쌍하더군요. 스몰빌의 누구라도 그 천재성을 인정해주었더라면 삐뚤어지진 않았을 텐데.

 

, 악당도 처음에는 선한 인물이었다는 변주곡이긴 합니다만. 그 악당 옆에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선행의 결정체인 클라크가 있다는 게 좋은 대조를 이루죠. 사실 클라크 켄트가 아니었다면 렉스 루터는 좀 더 곱게 컸을지 몰라요. 지금처럼 대악당은 되지 않았을 지도요. 렉스는 크립토나이트를 우연히 보고, 그게 외계물질이라며 연구를 시작하는데, 아무도 인정을 안 해주자 삐뚤어지기 시작하거든요. 칼엘이 지구에 오지만 않았더라도 한 천재 과학자가 대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서로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셈.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작품의 슈퍼맨은 렉스 앞에서 유독 무섭게 변합니다. 불이 꺼진 연구실에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나타난다든지. (요즘 슈퍼맨 만화에서는 이런 묘사가 왕왕 나오는 편이지만요) 다만, <스몰빌>의 렉스보다는 여유가 없어 보여서 매력은 별로. 하긴 <스몰빌>의 렉스 루터를 그 어떤 렉스가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만. 솔직히 진 핵크만의 렉스도 이 드라마의 렉스보다는 덜 매력적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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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라이트>의 해석 중 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S 문양. 여기서는 이 문양이 크립톤 행성을 대표한다고 설정합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설정을 논하며, S 문양을 알파벳으로 만들 생각은 결코 없었다는 투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미국인으로서 슈퍼맨이 살아날지언정 외계인으로서 슈퍼맨은 죽는다고 하네요. 그리고 슈퍼맨은 미국인이기보다 외계인이어야 참된 주제를 살릴 수 있다고 하죠. 오, 300% 동감합니다. 또한 영화처럼 엘 가문의 문양으로 만드는 것도 불만이었나 봅니다. 슈퍼맨은 단지 엘 가문의 후손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크립톤 성인입니다. 그러니 한 행성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문의 후예보다 행성의 생존자가 더 어울리죠. 작가의 설정이 이처럼 규모도 크고, 슈퍼맨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기에 주제 전달이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밖의 캐릭터들은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로이스 레인은 여전히 딱 부러지고 예쁩니다. 지미 올슨은 좀 어설픈 사진기자. 페리 화이트는 항상 특종을 물어오라고 호통이죠. 조나단과 마사 켄트 부부도 정이 넘치긴 매한가지. 단, 조나단 켄트는 아들이 외계인이라는 걸 좀 못 견뎌 하더군요. 클라크가 출신을 몰라 방황하는데, 아버지로서 해줄 게 없어서 심히 괴로운가 봅니다. 클라크를 올곧게 가르치는 다른 조나단 켄트와는 좀 다른 모습이어서 놀랐습니다. 슈퍼맨이 아닌 클라크 켄트도 어수룩한 건 여전합니다. 물론 이들이 만들어내는 유머는 여전히 빛납니다. 특히, 자기 정체를 감추려고 식은땀 흘리며 위장하는 클라크 켄트는 진짜 웃기네요. 작중 내용이 대부분 슈퍼맨의 기원 문제에 무게를 두기에 로이스와 클라크의 연애 문제엔 별 관심이 없는 건 단점일까나. 하지만 저는 오히려 둘을 연인으로 발전시키지 않는 게 더 좋았습니다. 다른 관계로 눈을 돌릴 때도 되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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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한두 개가 아닐 만큼 많습니다. 주제와 캐릭터 구축을 그만큼 잘했고, 장면 연출도 상당히 박진감이 넘쳐요. 실사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긴박한 연출력은 박수를 보내고도 싶습니다. 역시 미국 코믹스 산업은 대단하군요. 그래도 그 중에 한 가지 명장면은 꼽으라면, 칼엘이 부모 조엘과 라라에게 안부를 전하는 마지막 장면. 그 기나긴 물리적인 거리와 시간을 뛰어넘어 아들이 부모에게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그 장면은 눈물 없이는 못 볼 정도. 아, 여기서 눈물 한 번 더 닦고. 이걸 보고 있노라면 <슈퍼맨 리턴즈>의 그 칼엘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 꽁무니나 쫓아 다니고 말이죠. 아들을 얻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는, 결국 똑같은 정체성 내용이지만, 아들로서의 칼엘과 아버지로서의 칼엘은 역시 무게가 다르군요. 마지막 자손이니만큼 아버지보다는 아들로서의 칼엘이 더 와 닿습니다.

 

소감은 말하자면 별 다섯 개짜리 추천작. 스판덱스는 도저히 못 봐주겠다 하는 사람만 아니라면 누구나 몰입할 수 있습니다. 슈퍼맨의 기원을 다루므로 딱히 DC 코믹스 지식이 없어도 좋아요. 시중에 나온 DC 코믹스 번역본 중에서도 최고입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 <배트맨 : 이어 원>처럼 칙칙하고 마초적이지도 않아요. <배트맨 : 허쉬>처럼 가볍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슈퍼맨 포 트모로우>처럼 아리송하지도 않고, <슈퍼맨 : 레드 선>처럼 기존 설정을 확 뒤엎지도 않아요. <저스티스>, <킹덤 컴>처럼 뒷골 아픈 대사만 늘어놓지도 않고요. 누구나 무난히 즐길 수 있으면서도 슈퍼맨의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기 딱 좋은 작품. 이건 누가 영화로 안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브라이언 싱어한테 좀 미안하지만, 이런 시나리오로 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봤던 슈퍼맨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였습니다. 못 보고 그냥 지나갔더라면 땅을 칠 뻔했네요. SF 도서관에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관심이 있다면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이 세계관 역시 고담시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브루스 웨인도 있다는 소리인데. 아직 활동을 안 한 건지, 고담시 문제가 바쁜 건지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이건 좀 아쉽네요. 마지막에 망토 끝자락이라도 좀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