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네이터 4>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심각한 누설이니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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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고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1, 2편)의 장점을 꼽으라면 네 가지를 들겠습니다. 우선 이전까지 블록버스터와 달리 로봇을 기계답게 묘사했다는 것. 터미네이터는 프로그램한대로만 움직이며, 임의로 감정을 느끼거나 돌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숱한 SF에서 출현하며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개그를 하는 인간형 로봇과 다르죠. 사실적인 로봇의 입지를 다졌다는 점에서 아시모프와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시모프는 로봇의 실용성을 강조하기 위해 3원칙을 만들었고, 카메론은 공포심 조장을 위해 터미네이터를 기계로 묘사했다는 게 정반대의 차이점. 2편에서 T-800이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나 감독판 DVD에서 사라 코너가 칩을 조작했다는 게 나오고, 더군다나 T-800은 존 코너의 감정을 학습한 거지 느끼는 게 아니죠. 그 외에는 뭘 하든 영락없는 기계일 뿐.

 

덕분에 터미네이터가 인간을 공격할 때는 여타 괴물에게서 볼 수 없는 공포를 생성합니다. 일체의 감정도 없이 명령만 따르는 상태라 동정이나 요행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죠. 아무리 무지막지한 괴물이라도 생명체인 이상 허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 놈의 로봇에겐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명체를 잡아먹는다는 무의식만 지배하는 좀비와 비슷한 면도 있긴 합니다만. 좀비와 달리 고차원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불어 미래의 합금속으로 만들었기에 현대 병기는 통하지 않고, T-800만 하더라도 일대 경찰관의 온갖 화력을 동원하더라도 흠집조차 못 내는 상태. T-1000은 저거 도대체 어떻게 죽이지? 정도의 불사신. 터미네이터가 무서운 이유는 이처럼 인간의 힘이 전혀 먹히지 않는 불사신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놈들이 멀쩡히 사람 모습을 하고 도심지를 돌아다닌다는 게 또 끔찍한 점이기도 하고요. 아, 물론 액션 장면을 연출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솜씨가 없었다면 무서움은 한결 덜했을 겁니다.
 

영화사적으로는 이 시리즈의 시각효과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1편에서 보여준 터미네이터는 약간 조잡한 듯했으나 이후 <어비스>에서 시험한 액체 생명체 효과를 2편에서 활용한 덕에 큰 호평을 받았죠.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 분장, 음향, 음향편집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보고 놀라서 스톱 모션 기법이었던 <쥬라기 공원>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다시 찍었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그만큼 T-1000이 뛰어났다는 셈입니다. 설정도 그럴듯해 액체 합금속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제시하며 상상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도 했죠. 뛰어난 상상력이 놀라운 기술을 만나 현실을 이루었다고 할까요. 이런 시각효과나 분장에는 카메론 자신의 그림 실력도 한몫 했다고 합니다. 엔도 스켈레톤을 비롯한 타 영화의 슐라코 우주선, 펄스 라이플, 에일리언 여왕을 모두 혼자 디자인했다고 하네요. 스탠 윈스턴이 프레데터를 디자인할 때 조언을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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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영화는 시간여행물이기도 한데, 작중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이기 때문에 막상 미래나 과거로 가는 모습은 안 보여줍니다. 터미네이터에겐 현재가 과거인 셈이지만, 그건 별로 언급하지 않고. 대신 카일 리즈가 잠깐 지나온 미래를 회상하거나 미래 전투 장면이 약간 등장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암시할 뿐입니다. 허나 현재 기계와 쫓고 쫓기며 벌이는 사투가 모두 미래 때문이라는 설정을 전체적으로 깔아두어 시간여행물의 분위기를 충분히 살립니다. 타임머신이 없는 시간여행물인 셈이죠. 제임스 카메론은 원래 타임머신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예산이 허락하지 않아 빼버렸다고도 합니다.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타임머신을 안 보여준 게 상상력을 자극해서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개봉한 시리즈인 <터미네이터 4> 그러니까 <터미네이터 : 구원>은 저런 공식을 별로 지키지 않은 작품입니다. 기존 1, 2편의 미덕을 비켜나간 영화란 뜻입니다. 우선 이 영화에 수많은 터미네이터가 나옵니다만, 다들 엑스트라에 불과한 터라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낼 여유가 없습니다. 헌터 킬러가 아무리 위협적이고, 모터 터미네이터가 재빠르다 한들 그저 지나가는 로봇#1에 불과할 뿐. 집중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아마 기종명도 놓쳤을 겁니다. 모터 터미네이터는 잡혀서 탈것으로 전락하는 신세까지. 거기다 생김새가 다들 희한한지라 흔히 아는 터미네이터로 보기엔 좀 무리였죠. 미래 전쟁답게 신기종을 대거 보여준 시도는 정말 좋았습니다. 허나 신기종만 보여줄 뿐 중심 캐릭터가 될 기계, 그러니까 악당을 정해놓지 않아 기계측은 꽤 산만한 편입니다. 인류 저항군 쪽엔 중요 인물이 수두룩한데도요. 인류 쪽에만 너무 무게를 두어 스카이넷 쪽은 가벼워 보일 정도. 그렇다고 스카이넷 군대가 그렇게 압도적인 면을 보인 적도 없습니다. 전장이 무대이긴 한데, 정작 저항군과 스카이넷 군대가 본격적인 전투를 펼치는 장면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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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스카이넷의 중심 인물이라고 할만한 마커스가 있긴 합니다만. 1, 2편에서 보여준 기계다움보다 인간적인 면이 더 크기에 기계적인 공포를 조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뻔하디 뻔한 인간형 로봇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데 그치죠. 설정도 좋았고 시도도 괜찮았으나 이런 부류의 캐릭터가 꽤 흔하기에 묻혀버린 사례. 언뜻 필립 K.딕의 <사기꾼 로봇>과도 통하는 점이 있는데,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원자가 된 탓에 결말에서의 암울함이나 충격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차라리 <사기꾼 로봇>처럼 인류 저항군을 싹쓸이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감독의 역량이 그 정도까진 아니었나 봅니다. (맥G 감독이 이런 결말을 만들었는데 바꾸었다는 루머도 있더군요) 후반에 등장하는 T-800, 아마 시간대상으로 제일 먼저 쓰였을 T-800은 기존의 터미네이터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위협을 자랑하지만 후반부에 짧게만 나온 터라 작품의 중심이 되진 못하고요. 존 코너가 최초의 T-800을 처음 보는 순간 느꼈을 법한 복잡한 감정 또한 전혀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저 놈이 나를 죽이고, 보호해주고, 또 죽인 놈이구나 등등)

 

이러다 보니 시리즈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스릴은 없어지고 기계와의 전형적인 사투만 늘어놓을 뿐입니다.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닌데, 이미 거대변신 로봇이나 그런 소재의 영화들이 몇 편 나왔던 터라 신선하진 않습니다. 인류의 희망인 누군가가 쫓기고, 그를 처치하러 기계가 추격한다는 공식도 희미하고요. 작중에서 인류의 희망이라면 이미 사령관 처우에 맞먹는 존 코너보다는 성장 중인 카일 리즈일 텐데, 딱히 카일을 처치할 킬러가 없으니, 원. 거기다 이전의 터미네이터들은 목표를 발견하면 주위 상황이 어떻든 그 즉시 해치우려고 했는데, 이 영화의 헌터 킬러는 카일 리즈라는 중요한 목표를 인식했음에도 죽이지 않고 수용소로 끌고만 갑니다. 목표를 죽이지 않는 터미네이터라니, 너무 무른 거 아닌가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카일을 죽였다면 존 코너가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다음 시간대의 세계에선 스카이넷이 저항군을 잠재웠을 수도 있는데요. 존 코너를 꾀기 위해서라면 다른 미끼도 얼마든지 던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전파장치를 만든 것처럼요.

 

시각효과도 좋습니다만, 역시 이전 것들을 그대로 답습한 까닭에 안면을 강타하는 충격은 찾기 힘듭니다. 흠잡을 데 없는 로봇 연출이지만, 딱 거기까지. 헌터 킬러는 물론이거니와 새로 등장하는 기계들도 이미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 아마 새롭게 시도할만한 설정이 없었던 만큼, 새로운 시각효과 기법을 개발할 필요도 없었겠죠. 기술 이전에 상상력이 있어야 놀라운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례가 되겠습니다. 새로운 시도가 없으니 영화는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안정적인 덕분에 스릴이나 박진감은 비교적 많이 떨어집니다. 아마 당시에 이 영화가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과 경합을 벌였을 텐데, <패자의 역습>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네요. 얼굴만 잠깐 비치는 소형 살인 기계들과 몇 분 출현도 안 한 거대 로봇을 가지고 변신로봇 한 무리와 맞서기엔 무리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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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을 많이 꼽긴 했으나 소소한 장점은 나름대로 풍부한 작품입니다. 다양한 신종 기계들은 다채로움으로 승부하고, 크리스챤 베일이나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연기한 존 코너, 케이트 코너도 괜찮았습니다. 3편의 배역을 생각하면, 후. 특히, 1편에서 그리고 시리즈 전반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나 그 이후로 중요성이 점점 떨어지는 카일 리즈를 주연으로 올렸다는 점이 대만족. 존 코너의 부모로 사라 코너 한 명만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카일 리즈는 생물학적인 아버지이며, 사라 코너에게 전사의 강인함을 가르친 정신적인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미래 저항군 중 과거에 왔던 유일한 인간인 만큼 그 의미가 클 텐데, 1편에서 죽었다고 다들 너무 무시하는 듯. 카일 리즈가 군대에서 어떻게 자랐고, 어떤 사상을 키우는가도 존 코너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죠. 물론 카일을 키운 건 존이기 때문에 부자가 서로를 키우는 돌고 도는, 재미있는(?) 시간 패러독스가 발생하고요. 존 코너가 카일 리즈를 처음 만나는 그 장면은 아들보다 어린 아버지를 보는 장면이기도 하고, 앞으로 발생할 사건을 암시하기도 하죠. 존 코너의 복잡미묘한 표정이 포인트.

 

아마 4편 엔딩 이후로는 존이 시시때때로 카일을 불러서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고, 지프 안에서 세퍼드와 같이 찍은 사진까지 건네주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나이를 좀 먹은 후에 스카이넷 기지에 쳐들어갔다 타임머신을 보고 자원해서 과거로 오겠죠. 1편의 카일 리즈는 강단 있어 보이는 마이클 빈이 연기했는데, 4편의 안톤 옐친도 괜찮더군요. 그 역에 어울리기도 했고, 마이클 빈과 이미지도 비슷하고요. 1편의 대사로 보건대 아마 카일은 자기가 존의 아버지가 될 거라는 확신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사진을 보면서 사랑에 빠졌을 테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요. 카일을 타임머신에 태우는 존이나 타임머신에 타는 카일이나 서로 상당히 심정이 복잡했을 듯. 고독한 미래 전사의 숙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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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나온 성인 존 코너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데, 그 흉터가 생긴 연유도 나옵니다. 1, 2편의 시간여행적 재미는 소소한 부분까지 챙긴 것 같습니다.

 

중반에 등장한 거대 기계는 좀 더 써먹을 소지가 충분했는데, 예산 때문인지 등장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움직임과 화력을 보면 거의 배틀메크 수준. 확실히 기술만 보자면 블록버스터로 <맥워리어> 시리즈를 찍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트랜스포머>로 흥행 좀 했을 텐데, 왜 이 유명한 전투기계 영화를 안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걷다가 차에 받혀 넘어지는 장면에선 역시 보행병기는 다리가 약점이군.이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니까 보행병기는 역관절을 써야. 1, 2편에선 90년대 영화라 레이저 빔을 쏘며 싸웠는데, 4편은 2000년대 영화라 현대적인 소총이 대거 나옵니다. 어째 시대가 흐를수록 레이저 빔보다 질량 병기가 더 대접을 받네요. 1편에서 어른 카일이 회상한 미래와 4편에서 청소년 카일이 겪는 미래는 아마 다른 평행세계(3편에서 평행세계가 갈렸죠)에 속했을 테니 별 문제는 아닐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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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터미네이터 타이틀이라기엔 좀 가볍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기계 아포칼립스 영화입니다. 큰 기대감을 접으면 괜찮게 볼 여지도 많아요. 특히, 오래도록 묻혔으나 이 영화 이후로 카일 리즈를 다시 조명할 거란 점에서 시리즈상 의의도 크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