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스트릭트 9>은 기존 SF 블록버스터의 유형을 따르지 않은 참신한 설정으로 가득한 작품인데, 전후 설명이 약간 부족하여 몇 가지 의문점이 들기도 합니다. 이후 게시물은 내용누설을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께선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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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이상한 점은 바로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프런들 중 우주선을 다룰만한 기술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작중 해설을 보면, 초기에 프런들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왔을 때는 동력 부족과 폐쇄 환경 때문에 다수가 아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9지역에 정착한 프런들은 수가 불어나 약 18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죠. 희한한 건 항성간 혹은 무려 은하간 여행을 할 정도로 뛰어난 프런 대다수가 9지역에서 우둔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영어를 알아듣기는 하는데 제대로 된 소통은 힘들고, 논리적인 대화보다는 단순한 폭력을 선호하며, 무엇보다 모성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유전자로만 작동하는 총기나 엄청난 성능의 파워드 슈츠를 만든 종족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죠. 거기다 폭력을 행한다 해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보다 단순히 감정을 해소하는 데 그칠 뿐입니다.

 

어쩌면 이는 우주선에 갇혀 있을 때 지식 계층이 죄다 굶어 죽고, 노동자 계층만 살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에 정착한 프런들이 번성했다 해도 지식을 대물림할 세대가 없으니 인구수 따위는 모성으로 돌아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된 거죠. 허나 이 대답은 모호한 구석이 있는데, 지식 계층만 죽고 노동자 계층만 살아남는 게 아귀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층은 지배계급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최소 인원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프런들 사회가 어떨지는 몰라도 어느 사회든지 지배층은 자신이 살아남을 최후의 구멍은 남겨두기 마련이니까요. 프런이 외계인이긴 해도 사고 방식이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은 걸 보면 지배층도 인간과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인류 지도자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요.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어떻게든 수를 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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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지구에 온 우주선은 애당초 지식 계층이 없이 노동자들만 탄 우주선이 아니었을까요. 우주선의 항해 목적은 작중에 나오지 않지만, 지식층이 탄 우주선과 같이 항해하다 따로 떨어졌을 수도 있고, 노동자의 피난이나 유배 수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층(지배층)이 없는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됩니다. 아니면 우주선 내부에서 폭동이 벌어져 소수 지식층이 모두 살해를 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케이프 타운의 프런은 언제나 감정적으로만 움직이며, 논리적으로 미래를 계획하는 행동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식량이 떨어지고 당장 죽을 고비가 닥치자 지금껏 자신들을 지배했던 지식층에게 반기를 들고 모두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피라미드 구조라는 걸 고려하면, 압도적인 하위층에 밀려 극소수이던 고위층이 모두 죽어나갔다는 뜻. 지배층을 말살한 노동계층은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였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지식층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주연이기도 한 크리스토퍼는 상당한 기술자로 우주선의 연료를 만들고 마침내 모선을 움직여 고향별로 돌아가기까지 합니다. 희한한 건 크리스토퍼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혼자 일한다는 것. 동료가 하나 있긴 한데, 하는 짓이 듬직하지 못하고 덤벙대는 걸 보아 크리스토퍼 같은 지식층은 분명 아닙니다. 남아공 정부의 허가를 얻어 어떻게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을 가르쳐 조수 겸 동료 연구원으로 이용하곤 있긴 한데, 머리는 좋아도 감성은 유치원생이라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고요. 도대체 크리스토퍼는 왜 다른 지식층 프런과 같이 일을 하지 않은 걸까요. 혹은 왜 학교 같은 걸 설립하여 다른 프런을 가르치거나 어린 프런을 교육하지 않은 걸까요. 그랬더라면 연료를 채취하고 우주선을 조종해 고향별로 돌아갈 확률도 높아지고, 지구에 체류하는 기간도 짧아졌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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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학교 문제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겁니다. 현존하는 프런은 단순 노동자들이니까 고급 기술을 가르치기 힘들었을 거에요. 프런이 계층에 따라 타고나는 지성이 다른지 아닌지 알 수야 없습니다만. 설사 계층에 상관없이 지적 능력이 똑같았어도 단순 노동자를 가르친다고 뚝딱 고위 기술자가 생기는 게 아니죠. 어린 프런을 가르치려고 해도 정부에서 출산을 엄격히 제한했으므로 가르칠 인원이 많지 않았을 거고. 거기다 남아공 정부는 프런이 컴퓨터 등을 소유하는 걸 막습니다. 이들이 기술 체계를 발달시키면 지구를 공격할까 봐 불안했던 듯. 하긴 저 같아도 거대 우주선을 몰고 온 외계인이 있다면 기술 발달을 금지시키겠습니다. 더군다나 먹고 살기도 빡빡하니 학교를 세울 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여차여차 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았다 하더라도 문제는 9지역을 관리하는 다국적 군수산업체 MNU의 눈초리가 도사리죠. MNU는 어떻게든 프런 무기를 사용하려고 안달이 났는데, 만약 크리스토퍼가 대놓고 교육을 했다면 프런 기술을 몽땅 빼앗아 무슨 짓을 벌였을지 모릅니다. 아마 그런 점 때문에 쉬쉬하며 자기 자식만 가르친 것이겠죠.

 

하지만 크리스토퍼가 동료 지식층을 찾지 않은 건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상주하는 프런 인구 자그마치 180만. 그 중에서 크리스토퍼만큼의 기술을 갖춘 프런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크리스토퍼 같은 인물이 살아있는 걸로 봐서 기술진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모양인데, 도대체 다들 어디선 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구인이 프런들의 기술 연구를 엄격하게 금지하니까 드러내놓고 지식인이요~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비밀리에 자기들끼리 연구 세력을 조직하거나 전산 통신망을 연결할 수는 없었을까요. 크리스토퍼만한 지식층 프런이 더 있다면 분명히 서로를 찾았을 테고,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신호를 주고받았을 법한데,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크리스토퍼 집에서 수송선이 떠올랐을 때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죠. 정체를 감추고 있던 기술자 중 누군가 파워드 슈트를 입고 달려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상황인데도요. (이러면 비커스가 활약할 여지가 줄어드니까 영화 전개상 좋지 않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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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수송선이 크리스토퍼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면, 아마 다른 기술자들이 있었어도 고향별로 돌아가는 걸 포기했을지 모릅니다. 9지역 같이 난감한 환경에서 수송선 같은 걸 혼자 힘으로 만든다는 건 아무리 천재라도 불가능할 테니까요. 설사 만든다 하더라도 몇 백 년이 걸렸을지 모르는 일. 그러니 수송기 존재 여부를 모르는 기술자들은 아예 다 포기하고 노동자들 틈에 섞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수송선이 부상하고 추락했을 때 목숨을 걸고서라도 접근할 프런이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어서 좀 놀랐습니다. 혹여 감독은 중심인물을 더 이상 늘리면 이야기 전개가 복잡해지니까 일부러 다른 기술자 프런을 뺐을 수도 있습니다. 비커스,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퍼 자식 이 셋만 해도 사건 진행에 무리가 없는데, 굳이 기술자 프런을 더 집어넣으면 잉여 캐릭터가 되었을 테지요.

 

여하튼 간에 그 수많은 프런 중 크리스토퍼만 유독 튀었다는 게 이상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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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궁금한 점이라면, 비커스가 파워드 슈트를 입었을 때. 비커스가 변형 중이었으니까 프런 유전자로 조작하는 파워드 슈트를 조종한 건 이상할 게 없습니다. 문제는 강화복이니까 입는 방식이고, 이 강철 옷은 비커스 체형에 맞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프런은 체격이 꽤 큽니다. 거기다 사지가 달리긴 했으나 체형이 인간과 똑같지도 않고요. 그러니 유전자가 좀 바뀌었다고 해서 비커스가 강화복을 조종할 수는 없을 겁니다. 거구의 슬라브 인종이 입으려고 만든 옷을 키 작은 극동 아시아인이 입는 거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만약 이게 강화복이 아니라 조종석에 탑승하는 이족 보행 병기였으면 상황이 달랐을 겁니다. 아마 이랬다면 비커스가 탑승은 가능해도 조종하는 방식을 몰라 움직일 수가 없었겠죠. 허나 작중 묘사를 보면 영락없는 강화복. 외계 기술에 문외한인 비커스가 용병 부대와 조직 폭력배를 상대로 그렇게나 분투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냥 입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후반부 비커스의 상황은 몸에 전혀 맞지도 않은 작업복을 입고 엄청난 작업 효율을 내는 거랑 똑같은 거죠. 어쩌면 강화복 안에 체격에 맞도록 조종 장치가 줄어드는 프로그램이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정도 기술력이라면 필경 그랬겠죠. 허나 비커스는 인간이니만큼 아무리 이런 프로그램이 있어도 무리였을 겁니다. 프런 강화복을 보면 외형조차 프런이랑 똑같이 생겼습니다. 심지어는 툭 튀어나온 머리에 더듬이와 큰턱까지 있습니다! 겉모습도 이런데 속은 더하겠죠. 비커스가 우주선을 보려고 할 때는 강화복도 고개를 하늘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일정한 압력을 주고 그 피드백으로 움직이는 강화복의 기본 원리는 프런 병기도 똑같을 텐데, 과연 몸에 걸맞지 않는 옷을 입고 비커스가 제대로 된 압력을 줄 수 있었을까요. 뭐, 어쩌면 착용자의 사고를 읽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강화복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착용자의 체격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고, 비커스가 입자마자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도 그나마 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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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스가 용병 부대와 사투 끝에 쓰러진 건 옷이 몸에 잘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죠.

 

이건 이야기해도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작중 뉴스를 보면 조직 폭력배가 프런에게 매춘 서비스를 한다고 나옵니다. 허나 프런은 자웅동체이고, 단성생식을 하죠. 크리스토퍼는 인간의 시점에서 아버지처럼 보이나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며, 크리스토퍼의 자식 역시 아들처럼 보이나 성별이 없습니다. 관객 입장으로서는 그냥 아버지/아들로 생각하는 게 속 편하지만요. 여하튼 이성이 없는 관계로 인간과 같은 성적 욕구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무엇보다 인간과 프런은 생김새가 상이하게 다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나 프런이라면 서로에게 성적 욕구를 느낄 까닭이 없죠. 그러니 이는 일반인의 오해이며, 뉴스에서 왜곡된 보도를 한 셈이 되겠죠. 허나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같은 속담이 있는 것처럼 조직 폭력배가 뭔가 매춘 사업을 이용해 서비스를 하긴 했을 겁니다. 그럼 그게 뭘까요? (더 이상 이야기하면 수위가 연소자 열람 불가로 높아질 테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중요한 건 <디스트릭트 9>가 꽤나 흥미로운 작품이란 겁니다. SF 블록버스터를 보는 게 아니라 신예 작가가 쓴 장편 소설을 보는 느낌이에요. 대개 블록버스터들이 이전 유형을 그대로 따라가는 반면, 이 작품은 감독이 소설을 읽고 영감을 받은 아이디어로 채워져서 그럴 겁니다. 프런을 대하는 지구인의 태도나 후반부 강화복 전투는 이 영화만의 차별성이라고 봐요. 특히, 강화복 전투를 보면, 감독이 로망을 좀 아는구나 뭐,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날아가는 RPG를 낚아채는 장면은 시쳇말로 폭풍간지! 아무쪼록 수작. 이걸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는 점이 한스러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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