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23일

  평소라면 소문에 소문이 붙어 내 주변이 시끄러웠어야 했겠지만, 그날로부터 며칠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와 스베틀라냐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 상대가 그녀이기 때문일까? 아니, 생각해 보면, 그러한 그녀이기 때문에 더욱 복잡한 억측이 성행할 것은 뻔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런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역시...

  “이봐, 라이너, 요즘 저 자식 왜 저러냐?”

  평소와는 달리 조용한 휴식 시간에 의문을 가진 것일까? 한스가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걸었다.

  “뭐가?”

  물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역시 내 스스로 그런 상황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뭐긴, 이상하지 않냐. 저거.”

  라면서 가리킨 저 쪽에는 걸어다니는 스피커, 자칭 유머킹이라는 토머스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렇게 로리스 분대장의 철저한 훈련이 끝나고 난 후에 언제나 시작되는 장광설은 커녕, 썰렁한 농담 한마디조차 꺼내지 않은 채.

  “뭐, 녀석도 고민이 있는 법 아니겠냐? 이해해 줘야지.”

  라고 말하는 나 스스로도 요즘의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스베틀라냐와 함께 외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어딘지 이상했던 것 같다. 그날의 나로서는 그녀에 대해 신경쓰느라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지만, 그 후로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일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한 이상한 느낌은 나나 한스만이 가진 것은 아닌 듯 했다. 분명, 우리 분대원들도, 아니 엑스컴 유럽 지부의 전원이 그의 태도 변화에 대해 의아해 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곤 했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는 파트너인 나조차도.

  “전 육상 대원은 지금 즉시 브리핑실로 집합해주십시오. 반복합니다...”

  그때, 휴게실의 스피커로부터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오~. 마릴린 아가씨의 호출인가?”

  그것은 얼굴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혹자의 말에 따르면 컴퓨터 음성이라고도 했다) 엑스컴 내의 방송으로 친숙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엑스컴 일반 대원들에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24시간 때를 가리지 않고 들려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일부 남성 대원들은 ‘마릴린’이라 부르면서 일종의 아이돌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던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흩어져 있던 대원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브리핑은 정확한 정보를 위한 일이고, 얼마 전 브리핑에서 불길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더욱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날의 브리핑은 일전의 정신 공격에 대한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미소를 가져다주게 한 점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것은 본래 다음 달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던 레이저 라이플의 지급이 훨씬 빨라질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 제 2 부대의 충실한 도움을 받아서 ’(사령관은 이 점을 특히 강조했으며, 이는 분대장을 통하여 멋진 식사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레이저 라이플의 훈련은 예상보다 좋은 성과를 올렸으며, 연구부의 스텝이 철야로 노력한 결과 레이저 라이플의 실용화가 보다 앞당겨 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며칠 전 화면으로 본 마린의 피곤한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그녀가 말한 대로, 그녀 자신은 결코 전투에 참가할 수 없지만, 그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나를, 그리고 동료들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레이저 라이플의 지급 시간은 4월 2일로 결정되었으며(4월 1일이 아닌 것은 그 날이 에이프릴 풀(만우절)이기 때문일까?) 이를 위해 앞으로 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레이저 라이플 훈련으로부터 고작 40여일. 그렇게 짧은 훈련으로 익숙해졌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이제까지의 모든 무기를 능가하는 예리한 ‘암살자’에 대한 기대감은 누구 하나 덜하다고 할 수 없었다.

  단 일격으로 코뿔소보다 강하다는 외계인을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 소리도 빛도 내지 않는 완벽한 은밀성. 비록, 몇 가지 제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한 불편 따위는 간단히 날려버릴 정도의 매력이 이 무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브리핑을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향하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모처럼만의 밝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물론, 요즘 들어 멍해 있던 토머스 역시 뭔가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얼굴로...

  “그건 별로 재미있는 농담이 아니군요. 토머스씨.”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면서 스쳐지나갔다. 토머스도 나도,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지만 수많은 대원들이 뒤섞인 가운데 그 누군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 또 내 입이 멋대로 떠든 모양이지?”

  뒤늦게 토머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나 역시 토머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때 어색한 침묵을 뚫고 ‘마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2, 제 4 강하 분대는 전투 준비를 갖추고 준비해 주십시오. 반복합니다...”

  “어,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어느 사이 우리 둘을 제외하고 텅 비어버린 통로를 따라 토머스와 나는 전투 준비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을 뒤로 한 채...

profile

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SF&판타지 도서관 : http://www.sflib.com/
블로그 : http://spacelib.tistory.com
트위터 : http://www.twitter.com/pyodogi  (한글)    http://www.twitter.com/pyodogi_jp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