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4일

마린과 약속한 데이트가 내일로 다가왔기에 내 기분은 더욱 들뜨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의 정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가 싫지 않았고, 조금은 진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그녀 또한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추측일까?)

이번의 네 번째 데이트는 무엇보다 첫 번째 데이트 장소를 찾기 위한 모험. 이미 그날의 기억을 총동원하여 개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곳을 찾고 다시 돌아오기 위한 준비도 철저히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위해 차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급 과자도 상당 부분 준비해 놓았기에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래, 분명 뭔가 진전이 있을거야. 어쩌면...'

나는 일순 그녀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조금 불손한 생각이라는 느낌에 머리를 휘저었다. 만약 그녀가 근처의 평범한 여성들이었다면-물론 내게 있어 평범이라는 기준은 조금 특별하겠지만-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달랐다. 전쟁터에서 용병의 남성과 여성이 만나게 되면 결론은 항상 하나로 귀결되었다. 물론 그것은 상호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 후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기지 않는 일종의 유희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그녀-마린 파커는 평범(?)한 용병의 여성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아마도 일반적인 민간인 여성들과도 다른 사람이라고 할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만으로도 편안 기분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아우토반을 달리며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라인 강을 바라보면서, 심지어 한 밤 중에 길을 잃어 지도를 붙들고 논쟁을 벌이면서도 그런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항상 가득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이나마 사라지는 느낌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평온이라는 것일까 하면서...

여하튼,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의 많지 않았던 임무에서는 평소보다도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지금껏 긴장 속에서 적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내가, 지난 얼마간의 전투에서는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주위의 상황-심지어 파트너 만이 아닌 다른 팀들-과 연계를 하여 활동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분대장의 한쪽 팔인 게오르그의 말을 빌자면 '투사에서 전사로의 성장'이었으며, '장래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 장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의 변화를 가장 처음 눈치채고 보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물론 그 말 끝엔 '역시 사람은 이렇게 바뀌는 것이지.'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마린과의 첫 번째 데이트 이후로 8번의 작전이 있었다. 적지 않은 작전이었지만 우리 분대의 피해는 제로(0). 어쩌면 그러한 측면에는 내 변화의 도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소와는 달리-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했다.

여하튼, 매 순간 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한 순간이라도 편한 기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일까? 따분하기 짝이 없었던 주말이 조금씩 기다려지기 시작한 것으로도 하나의 변화가 시작된 것일까?

물론, 여러 가지 복잡한 소문이 있었지만, 적어도 마린 파커는 이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고, 어느샌가 나도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조금의 진전을 기대하는 것도 어쩌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뭐, 그녀의 반응을 볼 때 아직 이른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이? 라이너 대체 뭘 그렇게 멍하고 있는거냐? 밥은 안 먹어?"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는 식당. 나는 분명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어느새 내 앞에는 내가 주문했던-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음식이 나와 있었다. 토머스는 이미 칼을 들고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고... 가만 내가 언제 스테이크를 주문했지?

"쯧쯧. 알만하다. 또 내일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겠지."

토머스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 그게..."

핵심을 찔렸기에 나로서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여하튼 이 녀석은 눈치가 보통 빠른게 아니다.

"뭐, 됐다. 항상 썰렁하기 짝이 없는 파트너가 불쌍해서 어쩔 수 없었는데. 가끔은 그런 일도 있어야지. 여하튼..."

토머스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가속되는 불길함...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뭔가...

"대체 내일은 어디에서 어떻게 할 예정이냐. 거참 소문만 무성하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니 말야. 이 근처라면 버얼써, 모든 것이 알려졌겠지만, 대체 어디로 가는지 볼 수도 없으니."

역시... 불길한 소문과 함께 한때 잠잠했던 루머가 부활한 것은 분명 이 녀석의 덕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뒤에 있던 두 번의 데이트가 완벽하게 모두에게 알려진데다, 내용은 더욱 불어서 정말이지 엄청나게 거창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에 시작되었던 SM 정도는 약과이고, 이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괴상한 소문까지 붙어있었다. 그중 반 이상은 바로 눈 앞의 -자칭- 세계 제일의 파트너 덕분이라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응? 어때? 이 파트너님께만 진실을 털어 놓지 않겠냐? 내가 다른 사람에게는 입 싹 닦고 있을테니까."

"입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문을 내겠지."

"그야 당연... 아, 그게 아니고. 여하튼, 정말 궁금하다니까. 그렇게 외골수에다 이론만 밝히지 좋아하는 아가씨하고, 몸으로 때우는 것 밖에 모르는 용병의 러브 스토리. 캬. 그거 멋진 주제 아니겠냐?"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휴... 그래도 어떻게 생각하면, 녀석 덕분에 그녀와 더욱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감사해야 할까?

어차피, 이런 곳에서는 소문이 퍼지게 마련이었다. 그것을 진작부터 지나치게 과장해서 떠들어 버리면 도리어 우스개 소리 정도로 가볍게 지나갈 수 있고, 어색한 느낌도 금방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심지어, 지난번 데이트 때는 우리들조차 그런 소문에 대해 우스개 소리를 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녀석의 경우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했다기 보다, 다만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 우연히 결과가 좋았다고 하는게 옳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악운은 엄청나게 강한 녀석이고, 모든 결과가 좋게만 나오는 묘한 녀석이니 말이다.

"뭐, 적당히 생각해."

결국 나는 이렇게 말을 끝냈고, 언제나처럼 '전투적'으로 식사에 달려들었다. 눈 앞의 녀석이 항상 말하듯 '밥과 술을 대할 때는 항상 적을 완벽하게 처리하라.'던가? 물론, 녀석은 술에는 항상 패하는 입장이지만 말이다.

토머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었다. 언제나처럼 '불길(?)한 예감'을 주는 미소를 안면에 가득 담으며...


★∼을 사랑하는 표도기였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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