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12일(2)

"공군의 약간은 이런 건가?"

토머스의 투덜대는 목소리에 전원이라곤 할 수 없지만, 여하튼 많은 이들이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종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작전 지역에서 ' 아주 조금 ' 외각으로 벗어나서 땅에 내린 우리들이 작전 지역을 향해 조금 빠른 속도로 이동을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주변에는 적의 기척은 커녕 총격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미군과 비밀 작전을 수행했을때, 운동장 구보를 하는 우리를 보고 '활주로 구보와는 비교도 안되게 편하군.'이라던 공군 병사들의 말을 실감하는 상황이었다고 할까? 분명히 작전 지역인 제 2 청사의 모습은 저 멀리 보이고 있지만 풀을 헤치면서 걷는 우리들이,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 듯한 것은 우리 옆에 길게 뻗어있는 활주로 때문일지도 몰랐다.

활주로 한쪽 끝에서 한쪽 끝까지, 그것도 단순한 구보가 아닌 적과의 조우를 대비한 경계 전진. 이건 그야말로 고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까? 아마도 강철같은 하사관들을 지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여하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기로 둘러싸인 제 1 청사의 모습이 조금씩 크게 보이고 총성과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계 태세. 각자 적과 마주치는 상황에 대비하여 주의 깊게 전진하라."

분대장의 명령이 내려오기에 앞서 경험이 풍부한 대원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몸을 낮추고 있었다. 작전 지역까지는 아직 1km 정도 남았지만, 외계인의 무질서한 행동을 고려하면 어디쯤에 적이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무질서한 행동 덕분에 우리들은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전투에 나설 수 있었지만.

새로 지급된 암시경을 통해 연기에 둘러싸여 있을 청사의 외관이 컴퓨터 그래픽의 한 장면처럼 뚜렷하게 나타났다. 마린이 이끄는 연구팀이 새로 개발한 이 암시경은 적외선과 광증폭식 외에도 레이저로 물체의 외형을 판단하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 이와 같이 불길과 연기로 가득한 전장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상황에선 스타라이터 스코프는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며 적외선 암시경도 불길에서 쏟아져 나오는 적외선 때문에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략적인 외곽의 모양 만을 보여주긴 했지만, 이 복합 암시경은 이런 상황에서 매우 유용한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제길. 뭐든 좋으니 빨리 나오던지."

청사에 절반쯤 다가왔을 즈음, 토머스가 여전히 뭔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물론,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시선과 몸은 경계 태세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때.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긴장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여긴. 브라보 2. 깡통을 발견했습니다. 전방 300 미터."

브라보 2. 페트로프의 목소리와 함께 전원이 자세를 낮추면서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깡통. 우리는 아직 한번도 이 놈과 마주친 일은 없었지만, 다른 지부의 정보로 그 정체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외계인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목표물로 간주하는 소형 포대였고,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하는 냉혹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 놈을 발견했을 때의 대책은 단 하나, 바로 얼어붙는(Freeze) 것이었다. 고성능 모션 스캐너가 장착된 이 놈은, 움직임을 감지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긴 했지만, 정지하고 있는 물체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더욱이, 곳곳의 풀들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에서는 말이다.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활주로 끝 부분에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는 납작한 원통형의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깡통. 그 별명을 처음 붙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은 표현이라고 밖엔 할 수 없었다. 암시경의 와이어프레임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놈의 형태는, 위, 아래로 조금 부풀어 오르긴 했지만 납짝한 레이션 깡통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냉혹한 살인 병기에 어울리는 별명이 아니긴 했지만...

"전원 정 위치에서 대기하라. 레인저의 지원을 받아 저 놈을 처리하고 작전 지역으로 돌격한다."

순간 안도의 기분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오늘의 분대장이라면 직접 깡통을 공격하라고 명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외계인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먼 거리에서 깡통과 대면해서 살아남을 자신은 솔직히 말해 없었다. 물론, 이놈과 마주칠 것을 대비해서 로켓포를 갖고 있는 대원들도 있었지만 로켓포라고해서 깡통을 100% 처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솔직히 오늘만큼은 평소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던 Ax-1a 레이저 라이플을 당장 보급받았으면 하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두께 10cm의 강철판을 단번에 관통하는 그 무기라면 깡통을 처리할 가능성이 소총보다는 높을 테니까.

그러나, 일단 이 깡통에서만큼은 위험성이 높지 않았다. 잠시 후, 페트로프의 암시경을 통해서 정확한 위치를 보고받은 스카이레인저로부터 지원 포격이 실시된 것이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수발의 포탄이 활주로 한쪽 끝에 떨어지고 잠시 후 그 자리엔 여기저기 부서진 아스팔트 조각 위에 놓여진 우그러진 깡통 모양의 물체 만이 남아있었다.

"깡통이 정지되었는지 확인하도록. 브라보 3. 로켓탄으로 저놈을 쏠 수 있겠나?"
"문제없습니다!"
브라보 3. 게오르그의 대답과 함께 한발의 로켓탄이 깡통을 향해 날아갔다. 충격음과 함께 깡통은 더 심하게 우그러지고 말았지만(그럼에도 산산조각이 나지 않은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놈에게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듯 합니다."
"듯 하다고? 확실한가?"
"확실한 것을 확인하려면 저놈의 사정권 내로 시험 삼아 들어가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까요?"

분대장과 게오르그의 대화가 잠시 이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됐다. 드론을 발사하겠다."

미국 지부에서 개발되어 며칠 전 실전 배치된 드론은 외계인이 움직이는 물체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을 노리고 만들어진 소형의 로봇이었다. 회피 동작을 취하면서 정해진 경로를 따라 이동하고 2km까지 연장되는 와이어에 의해 조종되는 이 물체는 외계인이나 깡통의 주의를 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량의 화약을 갖추고 자폭시킴으로서 수류탄같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아직은 시험 단계인 관계로 분대장 만이 갖추고 있었지만, 상당히 기대할만한 물건이라고 할까?

그와 함께 풀숲을 가르며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토끼를 연상시키는 움직임. 바로 드론이었다. 드론은 미리 프로그래밍된 경로를 따라 활주로를 통해 우그러진 깡통을 향해 전진하였다. 놈 가까이로 시선을 옮기자, 어둠 속에서 상대에게 잘 띄지 않도록 어두운 색깔로 칠해진 드론의 모습이 들어왔다. 색깔만 하얗다면 웅크리고 있는 토끼를 연상케하는 물체. 드론이 놈에게 접근했지만 놈으로부터는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정상이군. 모두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전진한다."

분대장은 드론을 계속 이동시키도록 놔둔 채로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쉰 대원들이 전진을 시작했다.

그때, 활주로 끝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들려왔다.

"뭐, 뭐야!"

토머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나역시 마찬가지였겠지만...

"무슨 일인가?"

분대장의 목소리가 귀 뒤에 착용한 이어폰을 통해 머리에 울려퍼졌다. 그녀 역시 당황한 듯,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높았고 진동식 이어폰으로 인해 울리는 머리는 조금 멍할 정도였다.

"2시 방향. 지금 처리한 놈으로부터 100m 쯤 떨어진 곳에 새로운 깡통이 있습니다. 숫자는 2체. 주변에 공항 시설을 비롯한 장해물이 많아 포격은 어려울 듯 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 역시 당황한 듯. 자신의 호출 번호를 말하지 않고 연락을 마쳤지만, 분대장은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2체의 깡통. 드론 덕분에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좋지만, 놈과는 400m 가까이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다 포격 지원도 어려운 상태.

"영상을 전송하도록. 모드는 12A"

잠시의 침묵을 깨고 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나를 비롯한 전원의 암시경에는 작은 가스 탱크 같은 물체 근처에 떠 있는 깡통 2개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래 쪽에 표시된 브라보 10이라는 글자로 그것을 한스가 보낸 영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영상이 꺼지고 본래의 시점으로 되돌아왔지만, 방금의 영상은 마치 잔상처럼 머릿 속에 떠 오르고 있었다.

"브라보 10. 그 지점에서 로켓탄으로 공격을 시도해 볼 수 있겠나?"

분대장의 목소리에 한스는

"가능은 하겠습니다만, 그 뒤에 있는 물체가 가스 탱크라면 청사 건물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 지금 즉시, 공항 관리국에 연락을 취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다. 전원 그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분대장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름없어보였지만 왠지 그녀가 느끼고 있을 긴장감과 같은 것이 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브라보 10. 지금 깡통들이 활주로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한스의 기쁨에 들떠있는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 우그러진 깡통 뒤편으로 2개의 깡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아. 아까와 마찬가지로 레인저의 폭격을 요청한다. 놈들의 영상과 위치를 전송하도록."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활주로 끝에는 우그러진 깡통 3개가 사이좋게 모여있는 장면이 펼쳐졌다.


"주변의 확인은 끝났겠지? 좋아. 청사에 숨어있는 쓰레기들을 처리하기 위해 출동한다."

청사의 외형이 바로 보이는 지점까지 전진하고 전원의 모션 스캐너를 통해 주변에 아무 것도 없음이 확인된 직후, 브라보 리더. 분대장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이지만 들뜬 듯한 느낌이 남아있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전투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기대되었던 청사 접근이 포격으로 인한 깡통 3개의 제거라는 매우 간단한 결과로 끝났으며, 이는 비록 공적을 스카이 레인저의 지원팀에 넘기는 일이 되긴 했지만, 우리 팀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공항 청사 내부에서 벌어질 결전 뿐. 안 쪽에 깡통이 몇대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넓은 평원이었던 활주로 주변과는 달리 엄폐물과 은폐물이 가득한 실내에서 깡통을 처리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놈에 대한 모든 정보를 분석한 연구팀의 노력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놈의 약점은 얼마든지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비록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긴 해도 밝은 실내에선 외계인 따윈 그다지 두려울 게 없었다.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긴 하지만 말이다.

"좋아. 모두 약진 앞으로."

분대장의 목소리와 함께 분대원들은 자신들이 맡은 자리로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소총을 쏘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지구인 동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 PYODOGI >-------
profile

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SF&판타지 도서관 : http://www.sflib.com/
블로그 : http://spacelib.tistory.com
트위터 : http://www.twitter.com/pyodogi  (한글)    http://www.twitter.com/pyodogi_jp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