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seworm.jpg

[파충류는 추운 기후에 약하지만, 파충류가 모티브인 용은 의외로 북쪽 지역에 종종 등장합니다.]



어따, 요즘 날씨가 겁나게 춥습니다. 뭐, 12월 겨울이니까 오죽할까요.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 생각나는데, 이럴 때 게임 <스카이림>을 하면 감정이입이 몇 배로 높아진다고 하더군요. <엘더 스크롤 5: 스카이림>은 제목대로 탐리엘 대륙의 북부 지방이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선 황량한 벌판과 침엽수림, 눈 내리는 산자락, 뾰족한 목재 건물, 길다랗고 좁은 롱보트 등을 구경할 수 있어요. 이 지역에 주로 사는 인종은 노르드(Nord)라고 하는데, 북부를 나타내는 Nordic을 변형한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딱 봐도 알겠지만, 북유럽 신화와 바이킹 문화를 모티브로 했죠. 게임의 주제는 도바킨(드래곤본)인데, 세상을 끝내려는 용과 싸워 막아내는 내용입니다. 주제곡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정도로 용이 많이 나오는데, 시작하자마자 나타나 마을 하나를 끝장내는가 하면 최종 보스로 군림하기도 합니다. 노르드 사이에서는 드래곤본 전설이 상당히 유명하고, 그만큼 용을 자주 접하기도 해요. 하얗게 눈 쌓인 고산지대를 날아다니는 풍경이 상당한 장관이죠.


<스카이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북부와 용은 막역한 사이입니다. 판타지 작품에서 용이 썰렁한 설원지대를 방황하거나 고지대에서 살아가는 설정을 종종 찾아볼 수 있죠. 말이 나온 김에 사례를 좀 더 들자면, 영화 <베오울프>가 있네요. 스칸디나비아 영웅으로 이름 높은 베오울프 서사시를 원작으로 합니다. 기트족 출신인 이 인물은 고전 영웅이 다 그렇듯 온갖 괴물을 죽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이 식인귀 그렌델과 용이죠. 초반부에 그렌델을 처치한 다음 그 어미까지 없애고, 막판에 용과 싸워 이기고 최후를 맞는 것으로 끝납니다. 영화는 원작을 좀 더 현대적으로 각색했으나, 쓸쓸하게 얼어붙은 숲, 눈이 쌓인 성곽과 마을, 두툼한 털옷으로 감싼 의상을 강조하며 고대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용이 나타나 모든 걸 불태우고 파괴하는데, 이 작품의 절정이자 가장 화려한 볼거리일 겁니다. 작중 직접 등장하는 놈은 황금용 하나지만, 흐로스가나 주변 인물의 대사를 고려하면 더 많은 용이 나타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신화에서 용을 잡아죽인 영웅으로는 지크프리트(시구르드)도 빼놓을 수 없죠. 아이슬란드 뵐중 서사시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엄청나게 많은 괴물을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라 머릿수가 달라지긴 하나, 그걸 떠나 이 분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바그너가 뵐중 서사시와 에다 그리고 ‘니벨룽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만들었죠. 지크프리트는 총 4막 중 3막에 등장하며, 여기서 보물을 지키는 용 파프니르와 대면합니다. 파프니르와 박 터지게 싸우다 배를 찔러 죽이고, 그 피를 마셔서 불사의 육체와 뛰어난 지혜를 얻었다는 에피소드로 명성이 높습니다. 아이슬란드 설화니까 당연히 얼음투성이 대지에 용이 뛰어다니는 살풍경은 아니고, 파프니르는 동굴에 짱박혔기에 눈밭을 뛰어다니거나 하진 않습니다. <니벨룽의 반지>가 함박눈 펑펑 내리는 겨울을 노래하지도 않고요. 다만, 스칸디나비아 부근이므로 날씨는 그리 쾌적하다 하기 힘들겠습니다. 그러니 파프니르도 춥고 차가운 동굴에서 지냈겠죠.


소설가 존 로널드 톨킨은 북유럽 전승을 모티브로 자신만의 창작 세계관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유혹하는 마법 반지, 보물을 탐하다 재난을 부르는 드워프, 창세 신화를 이끄는 엘프, 영웅과 용에 얽힌 비극, 룬 문자, 9를 상서로운 숫자로 강조하는 등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죠. 동화 <호비트>는 언뜻 가벼운 모험담으로 보이겠지만, 이런 색체가 잘 드러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중 주인공은 드워프로서 잃어버린 왕국과 보물을 되찾고자 용을 죽이러 떠납니다. 용 스마우그가 사는 곳은 북쪽으로 멀리 올라가는 외로운 산이고요. 뭔가 북유럽의 차디찬 냄새가 풍기지 않나요. 이보다 더 북쪽은 눈으로 뒤덮인 회색산맥이 있는데, 여기에는 용에 관련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듀린 일족인 다인 왕이 냉룡에게 죽었고, 프람 군주가 스카사를 없앤 곳이기도 하죠. 이를 반영해서 그런지 게임 <중간계 전투> 2편에서는 회색산맥에 용 군주가 기거한다고 나오며, 시종일관 하얀 눈이 쏟아집니다. 비록 공식 설정은 아닐지라도 스산한 북부 기후와 용을 잘 그려낸 편입니다.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도 북유럽과 용이 주제입니다. 주인공인 히컵은 바이킹 지도자의 아들이며, 바이킹 마을은 오래 전부터 용과 싸웠습니다. 용이 마을을 습격해 가축을 물어가기 때문에 이놈들의 씨를 말리려고 항상 벼르던 중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히컵은 부상당한 나이트 퓨리와 조우하고, 어쩌다 보니 서로 우정을 쌓아갑니다.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간 난리가 날 것이 뻔하므로 바이킹 소년이 용과 마을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것이 갈등의 주된 골자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도 북유럽답게 눈 쌓인 설원이나 고산지대가 눈에 들어오는 편입니다. 다만, 가족영화라 색감이 화사해야 하고, 따라서 녹음이 짙은 숲이 더 자주 나오긴 해요. 하긴 북반구라고 해서 항상 춥고 꽁꽁 어는 건 아니죠. 어쨌든 설정상 바이킹 마을이니만큼 작중 기후는 상당히 춥겠습니다. 단편 영화나 게임 같은 외전에는 눈 쌓인 광경이 흔하게 보이고요. 그런데 작중의 나이트 퓨리는 초고속으로 날아다니던데, 그 기후에서 빠른 속도를 내며 엄청나게 춥지 않으려나.


수작도 아니고 이름값이 높은 작품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드라칸: 오더 오브 플레임>이란 게임도 있습니다. 사악한 암흑 군대가 평화로운 마을을 습격하고, 주인공 린은 혼자서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사라지고 동생까지 잡혀간 암울한 상황이죠. 이에 죽어가던 주민 하나가 옛 맹약을 가르쳐주고, 린은 용의 동굴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아록이란 용과 계약을 맺고 악과 싸워나간다는 플롯입니다. 내용이야 뻔하지만, 당시 <툼레이더> 식의 액션을 고대 판타지에 적용한 아이디어가 정말 참신했습니다. 특히 용을 타고서 고산지대를 누비며 공성무기를 파괴하거나 상대 용과 공중전을 펼치는 액션도 뛰어났죠. 무엇보다 산자락을 누비며 눈 내리는 풍경을 둘러보는 게 기가 막혔습니다. 절경이 따로 없었어요. 하얀 눈을 바탕으로 붉은 용이 날아가는 것도 색감 대비가 두드러져 보기 좋았고요. 아무래도 초반부를 타이가 기후로 잡았기 때문인지, 표지그림이나 스크린샷 등도 고산이나 설원이 배경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북유럽 신화나 전설을 차용하는 판타지 작품은 하얀 눈밭과 용을 조화시키는 사례가 더러 있습니다. 그 이유를 찾자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크프리트나 베오울프 등의 선례 때문이겠죠. 한편으로 니드호그도 연관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에는 거대한 나무 이그드라실이 우주를 지탱합니다. 그런데 뿌리에 니드호그란 용이 살면서 나무를 갉아먹고 독기를 뿌리죠. 운명의 여신들이 나무에 생명을 주므로 이그드라실이 썩지 않고 계속 살아가지만요. 니드호그는 다른 괴물에 비해 하는 일이 별로 없는지라 위세를 떨칠 용이 못 되긴 합니다. 차라리 늑대 펜리르나 바다뱀 요르문간드가 영웅과 싸우는 괴물로 더 낫죠. 오딘, 토르, 티르 등의 신을 죽이거나 물어뜯기도 했으니까요. 음, 생각해보니 니드호그보다는 차라리 베오울프의 용이나 파프니르가 이후 판타지에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용이란 동물이 워낙 다양한 전설에 나오긴 하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저런 걸 보면서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서양의 용, 그러니까 드래곤은 뱀이 원형이잖아요. 그런데 뱀은 파충류이고, 파충류는 변온동물입니다. 기온이 낮으면 활동이 둔해지고, 추워지면 아예 움직이질 못하죠. 한겨울에 나돌아다니는 파충류는 없습니다. 그런데 뱀을 원형으로 삼은 용은 눈이 펑펑 내리는 한대 기후에서도 훨훨 잘 날아다닌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렸을 적에 왜 북부 용들은 기후를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궁금해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북유럽 용들은 밖에 안 쏘다니고, 비교적 따뜻한 동굴 안에만 짱박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했고요. 아니면 불을 뿜으니까 몸이 뜨거워서 추위를 안 타거나….


, 고대 전설이나 판타지에 현대적인 생물학 잣대를 들이대는 게 별 의미 없는 일이긴 합니다. 요즘 한파가 닥쳐오다니 보니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라 이야기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