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의 단점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이용하기에 훼손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이 점은 도서관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손을 거쳐 가니 망가지기도 그만큼 쉽겠고, 인기가 높을수록 상태가 엉망일 확률도 비례합니다. 문제집이나 참고서 같은 것들은 깨끗하리라는 생각을 일찌감치 접어야 합니다. 자격증 열풍 덕분에 가뜩이나 대출 이용률이 높은데다가 공부한답시고 밑줄 긋거나 해답을 적어놓기 일쑤니까요. 도서관 참고서는 하루도 성할 날이 없습니다. 소설책이나 교양서적은 사정이 좀 나으나, 베스트셀러나 인기작으로 등극하는 순간 진흙탕에 뒹굴 각오를 해야 합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는 원작소설이 그런 경향이 심한 듯하네요. 이렇듯 책이 망가지면 훼손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야 하나,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죠. 시립 도서관만 해도 들어오고 나가는 양이 상당합니다. 반납할 때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일일이 찾아낼 인력도, 시간도 없어요.



훼손 방법도 다양합니다. 가장 흔한 것이 위에서도 말한 낙서가 아닌가 싶네요. 문제집과 참고서는 중요 단어에 동그라미 치고, 밑줄 긋고, 해답을 적어놓느라 엉망진창입니다. 개인적으로 소설책이나 다큐멘터리 서적을 빌리기에 참고서는 대출한 적이 없습니다만. 다른 이용자들이 빌리는 걸 어깨 너머로 슬쩍 봤는데도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자료실 곳곳에다가 낙서하지 말라는 경고문으로 도배를 해놨을까요. 안타깝게도 소설책이라고 이런 난관을 피해가지는 못합니다. 밑줄 그으며 독서하는 관습이 있는지 주요 대목마다 볼펜이나 형광펜으로 죽죽 그어놓은 걸 본 적 있거든요. 연필이면 지우려는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볼펜은 그럴 수도 없으니, 원. 혹은 작품의 핵심 단어를 여백에 적거나 표지에 임의로 목차를 만들어놓기도 해요. 제일 열 받는 건 내용누설입니다. 아니, 추리소설 앞부분에, 범인 이름에다가 동그라미를 굵게 쳐놓으면 어쩌라는 겁니까. 아우, 진짜.



이물질을 잔뜩 묻혀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커피나 홍차 마시다가 실수로 흘리는 거라면 이해합니다. 누구나 사소한 잘못은 저지르니까요. 하지만 커피 자국도 아니고 웬 지저분한 무언가를, 한두 페이지도 아니고 몇 십 장에 걸쳐 그래 놓으면, 책 읽는 사람 심정이 어떨까요. 어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승전결에 맞춰 시커먼 자국이 여기저기 달라붙기도 했습니다. 이건 아예 책을 망가뜨릴 작정으로 그랬다는 생각 밖에 안 드네요. 다른 대출 이용자를 골탕 먹이려는 심보일까요. 재미있는 소설책은 많은 사람들이 빌려가니까 무작위 다수를 상대로 테러할 수 있잖아요. 아니면 작가 안티일지도 모르죠. 망상이긴 하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작가라서 일부러 훼손시킨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해봤습니다. 누가 무슨 이유로 그랬든 책 읽는 사람은 기분 좋게 책장을 펼쳤다가 이내 기분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어요. 어쩔 때는 하도 열 받아서 소설 내용조차 머리에 안 들어오기도 합니다.



책장을 파손시키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죠. 귀퉁이를 접거나 혹은 아예 페이지 절반을 접기도 합니다. 표지 날개를 책 중간에 끼워 넣어서 너덜거리기도 하고요. 실수로 접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어디까지 읽었나 표시해두려고 그랬나 봅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이 혼자만은 아닐 테고, 다른 사람들이 빌려갈 수도 있는데요. 이게 무슨 주점 바에 키핑하는 고급 양주도 아니고 말이죠. 더 열불 나는 건 책장을 찢어놓는 겁니다. 소설이 한창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결정적인 몇 페이지가 뜯겨나갔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거에요. 외부로 터져야 할 카타르시스가 거꾸로 흘러 넘치는 기분이랄까요. 오래된 책이라 제본 상태가 안 좋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일부러 찢은 흔적이 보이면 심정이 참담합니다. 어떤 책은 남녀 주인공이 관계하는 부분만 오려가기도 했더군요. 왜 그랬는지야 뻔하죠. 아이고, 낯 뜨거워라.



저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SF 소설을 좋아하는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SF 소설은 그리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안 빌려보고, 그래서인지 상태가 깨끗하거든요. 하긴 <중력의 임무>나 <크리스탈 월드>, <인간을 넘어서>처럼 골 때리는 책이 인기가 좋을 리 없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에는 SF 영화가 늘어나서인지, 독자 저변이 넓어져서 그런지, SF 소설들도 예전에 비해 훼손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허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튼 도서관에서 책 대출하기 전에 전반적으로 훑어보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리던 책이라도 꺼림칙한 뭔가가 덕지덕지 묻어있으면, 기분 좋게 읽을 수 없을 테니까요. 내용 누설 때문에 어지간하면 책을 안 훑어보는데, 하도 당하다 보니 독서 습관까지 바뀔 지경이네요. 그렇다고 읽고 싶은 책을 죄다 사는 건 경제적/공간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요즘 갈수록 전자책이 대세인데, 도서관 서적이 전부 전자책으로 바뀌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다운로드 형식으로 대출하면 저런 훼손을 걱정할 일도 없을 텐데, 언제나 그럴 수 있을지, 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