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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쏘고 튀는 게 전부였습니다. 엄폐와 탐지는 그저 유저의 재량일 뿐, 시스템이 안 받쳐줬죠.]

총격전이라고 하면 흔히 사격술을 떠올리지만, 진짜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병사는 잘 숨는 병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몸을 숨기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FPS 게임에도 예외는 아닌지 요즘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엄폐 지점을 찾는 것이 전술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어디나 그렇듯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울펜슈타인>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냥 미로를 돌아다니며 총을 쏘는 게 전부였죠. <둠>이나 <듀크 뉴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뛰어다니면서 쏘는 게 전부였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엄폐를 중시하는 게임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로그 스피어>가 본격적이라고 봅니다. 그전에도 몸을 숨긴다는 개념이야 있었지만, 나무나 벽 뒤에 숨었다가 재빨리 튀어나오는 게 전부였죠. 요즘 나오는 최신 게임들도 아직 이런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로스 스피어>는 상체만 기울이는 시스템을 적용했고, 말 그대로 숨은 채로 쏘는 게 가능했습니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현재 위치를 벗어나거나 뛰어다닐 필요 없이 총구만 내밀고 쏘는 식이었습니다. 비단 플레이어만 그런 게 아니라 인공지능도 이렇게 사격을 합니다. 이 기법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최근에는 3인칭 시점 개발로 빛이 좀 바랜 듯합니다. 3인칭 시점을 이용하면 바리케이드, 벽, 나무에 숨었다가 (역시 상체만 전환하여) 쏠 수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1인칭 시점의 시야 각도는 좁은 편이지만, 3인칭 시점은 주위 환경 전체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난이도도 대폭 내려가죠. 1인칭과 3인칭을 혼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게임의 경우, 하드 유저들은 3인칭 시점을 배제하기까지도 합니다. 사격 게임은 아닙니다만, <멕워리어> 유저들도 1인칭을 고수하는 편이죠.

 

한편으로 앉거나 포복해서 쏘는 자세를 중시하기도 합니다. 수풀 속에 앉으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잽싸게 일어나서 쏠 수 있습니다. 언덕을 기어올라가 납작 엎드려도 발견하기 힘들기에 엄폐가 가능하죠. 요즘에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포복했는지 보여주는 인터페이스도 유행입니다. 그만큼 유저가 자세를 능동적으로 바꾼다는 뜻이겠죠. 전술이나 작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모던 워페어> 같은 작품에도 이런 인터페이스가 있습니다. 당연히 앉거나 엎드려서 숨을 장애물이 있어야 이런 시스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맵을 살필 때 어디에 나무가 몇 그루 있는가, 통나무가 쓰러졌는가, 방치된 차량이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저의 동선을 고려하여 나무나 차량, 수풀을 비치하는 맵도 있습니다. 전술적인 유저라면 그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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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왼쪽은 전술용 레이더, 오른쪽은 나노 슈트 모드. 이 두 가지는 '엄폐 경로 계산기'와도 같습니다.]

 

/엄폐를 장려하는 게임들 중에는 단순히 숨는 것만을 떠나 공격적으로 탐지하는 시스템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숨는 자가 있다면 찾는 자도 있듯이 엄폐와 탐지는 동전의 앞뒤면 같은 관계입니다. 글쎄요, 실제 전투 교리가 어떨지 모르겠으나 몇몇 게임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저는 <크라이시스>와 <고스트 리콘 : 어드벤스트 워파이터>를 예시로 들고 싶습니다. 이들 작품은 여타 게임과 달리 일종의 가상 탐지 시스템을 제공하고, 이를 활용하는 게 게임의 주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총 쏘고 뛰는 것을 벗어나 새로운 체계를 제시한다고 할까요. 레이더를 주고 적군을 빨간 점으로 표시하는 게임이야 많지만, 이를 전술적으로 활용하게끔 유도하는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장애물 뒤로 숨으면 안 보이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적을 관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크라이시스>에서는 나노 슈트와 전술용 레이더가 등장합니다. 나노 슈트는 근력, 속도, 방어, 은폐 등 총 4가지 모드로 조절할 수 있는 강화복입니다. 힘이 세지면 자동차도 내던지고, 방어가 강하면 총탄도 막고, 그런 식입니다. 이중에서 제일 빈번하게 쓰는 것이 은폐 기능인데, 짧은 시간 동안 광학 위장이 가능합니다. 급격한 동작을 하면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해서 위장이 풀리고, 공격을 할 경우 에너지가 순식간에 바닥납니다. 따라서 유저는 혼자 많은 적을 해치우기 위해 은폐와 위장을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몸을 숨겨야 합니다. <크라이시스>의 전투는 은폐 기능과 실제 은폐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다행히도 배경이 되는 정글에는 수풀이 수북하게 자라서 숨을 곳은 많습니다. 유저는 위장 에너지 소모를 고려하여 어느 수풀에, 언제 숨을지를 재빠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참고로 나노 슈트의 오퍼레이팅 보이스는 남성, 여성으로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유저들은 남성으로 하더군요. 원래 SF 오퍼레이터의 로망은 여성 아닌가.

 

나노 슈트의 은폐를 돕는 기술이 전술용 레이더입니다. 전술용 레이더에는 자신의 은폐 상태가 어떠한지 색으로 구분해서 보여줍니다. 만일 발각되었다면 적색일 테고, 적이 유저를 놓쳤다면 경계 상태인 노란색이나 녹색으로 나타납니다. 적들의 경계 상황과 시야, 숫자가 레이더에 나타나기 때문에 유저는 풀숲에 가만히 숨어서도 주변 동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덤불 속에서도 누가, 얼마나 세심하게, 어느 방향을 노리는지 알 수 있고, 어느 쪽으로 이동하면 시야를 피할 수 있을지 계산이 가능하죠. 즉, 단순히 적의 유무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유저의 경로 계산을 도와주는 전술적 계산기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 레이더는 유저가 장비한 쌍안경과도 연동됩니다. 쌍안경으로 목표를 지적하면, 멀리 있는 목표가 레이더에 잡히는 식이죠. 적군만 아니라 차량이나 배, 헬기, 전차 등도 이런 식으로 이동 상태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고스트 리콘 : 어드밴스트 워파이터>는 크로스-콤이란 시스템을 선보입니다. (어우, 뭔 놈의 게임 제목이 이렇게 긴 건지.) 이는 원본인 <고스트 리콘>에는 없는 가상의 탐지 방식으로 이거 때문에 광고에서 미래형 FPS 운운하죠. <레인보우 식스>에도 심장박동 감지기를 활용하긴 했는데, 사실 이는 단순한 적군 보여주기에 불과합니다. 크로스콤은 부대장이 휘하의 대원 위치, 시야, 주변 지도, 적군 위치, 이동 경로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도 대원들이 무얼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 교전 상황이 어떻고 어디가 최적의 장소인지 판단할 수 있죠. 게임 내에서는 거의 전술 맵에 가깝기 때문에 전략 게임을 하는 것처럼 웨이포인트를 찍거나 부대원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작전을 계획하고, 대원에게 바로 지시가 가능하며, 지휘관이 함께 움직인다는 점에서 현장 참여형 레이더라 하겠습니다. 아마 미군이 말하는 랜드 워리어를 실제로 구현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강화복이 없는 게 아쉬운 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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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상황, 아군 위치, 적군 위치 등 정보의 홍수입니다. 가히 전장의 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크로스콤은 단순히 아군과 적군의 위치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무인 정찰기와 탐지기와도 연동되기에 이를 직접 조종할 수 있습니다. 혹은 웨이포인트를 찍어줄 수도 있고요. 위성 관측이 불분명하다면 정찰기를 띄워 탐색하는 것도 괜찮죠. 아니면 유인 항공기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고요. 당연히 무인기든 유인기든 시야를 공유하고, 이를 현장 데이터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원군으로 타격부대와 전투 차량을 불러 공격하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이 정도면 단순한 탐지를 넘어 현장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다목적 장치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이 게시물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은폐와 탐지니까 타격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유저의 역할은 이런 정보를 최대한으로 수집해 어느 경로로 진격하면 좋을지 빠르게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출발점에 가만히 앉아서 대원들이 수집한 정보만을 분석해 임무를 달성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을 위해선 주인공 캐릭터가 일정 지점으로 움직여야 하긴 하지만.)

 

사실 정보 수집만 해도 대단한 건데, 여기에 타격 시스템까지 결합하면 거의 사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병사 1인이 모든 역할을 해내는 만능은 아니지만, 한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상당히 막대하니까요. 톰 클랜시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게임은 꽤 많은데, 그 중에서 테크노 스릴러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이라면 <어드밴스드 워파이터>일 거에요. 내년 즈음에는 <퓨처 솔져>가 나와서 사기를 넘은 먼치킨 시스템을 선보이겠지만. 이거 뭐, 외계인도 때려잡을 기세인데, 언제까지 테러범이나 죽치고 있을 건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이 정도까지 오면 당하는 테러범이 더 불쌍합니다…. 기술이 어느 정도 대등한 것도 아니고요. 톰 클랜시 게임에 외계인이 나오면 그건 그거대로 웃기겠습니다만.

 

상기에서 이야기한 두 게임은 모두 SF가 배경입니다. <크라이시스>야 전형적인 하이퍼 게임이고, <어드밴스드 워파이터>는 단순한 밀리터리처럼 보이지만 크로스콤은 현재 기술로 구현이 힘들죠. 광범위한 탐지 기술을 응용한 SF와 일인칭 사격이라는 장르 특성을 모두 조합한 것이 이들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냥 레이저총이랑 강화복 나오고, 외계인들 나와서 싸우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거죠. 최첨단 기술을 적용해 제한적인 시야의 한계를 극복한 작품들이야말로 하이퍼 FPS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밀리터리 게임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국내 FPS는 너무 사격 위주로만 편성된 게 아닌가도 싶어요. 정보 수집이나 전술 판단이 거의 전무한 듯합니다. 해외라고 해서 이런 부류의 작품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국내 시장에선 시도조차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