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 13일

며칠 전의 작전 이후로 이렇다할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맞이하는 휴일. 훈련광이라 불리는 마녀, 로리스 분대장도 그간의 작전 결과에 만족하고 있는 듯 오늘만큼은 훈련이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얼마만의 한가로운 시간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겨울이라고 해서 작전이 줄어들었나 했더니 불행한 사건으로 UFO 공격 훈련이 계속되었고, 겨우 익숙해져서 편해졌나 했더니 외계인의 습격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간 한가한 시간이 주어질리 없었다.

제 아무리 전쟁이나 훈련을 좋아한다고 해도 한번 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을 때가 생기는 법. 때문에 나는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분명, 본래는 그럴 예정이었지만...

"라이너. 빨리 빨리. 저쪽에 동물원이 있대요."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랑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새하얀 색의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아가씨.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독일의 겨울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이름은 마린 파커. 바로 스탠포드 공대를 수석에 졸업하고 이미 박사 학위까지 갖고 있는 천재 소녀, 우리 엑스컴의 기술 연구 부장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아가씨의 모습. 어느 부잣집 딸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 옷차림에서 하얀 가운에 안경을 깊게 눌러쓰고 있는 연구 부장 모습을 연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외모 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차려입은 그녀의 행동 또한 평소의 차분한 느낌과는 어딘가 달랐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0대 소녀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점잖고 위엄있게 행동하려고 하는 연구실에서의 그녀와는 분명히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밖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런 우충충한 날씨 속에서도 그녀는 연구실에서의 밝은 조명 속에서보다 한껏 밝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끔씩 드러나곤 했던 어두운 느낌의 표정은 전혀 찾을 수 없는... 순진함 그 자체로 가득차 있는 듯한 얼굴.

그런 그녀의 모습은 왠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굳이 말하자면, 평소에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 어쩌면, 내 앞에서 때때로 보여주었던 아이같은 분위기는 그녀의 본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함께 나온게 더 나을지도 몰라.' 왠지 나중에 더 곤란해 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속에서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결국 휴식을 포기하고 함께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데이트-라기보다는 아이를 돌보는 아버지가 된 듯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로서는 이렇게 평온한 거리를 여성과 함께 돌아다닌 일이 없었다. 내 주변에는 항상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용병의 여성들 뿐이었고 그녀들은 토머스나 한스와 같은 단순한 전우에 불과했다.

때로는 관계를 가진 일도 없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 토머스와 함께 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그런 평범한 전우들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머물렀던 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애들조차 총을 들고 돌아다니는 그런 곳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전사의 한 명일 뿐이었다. 내 주변의 용병 전우들과 같은...

하지만, 내 손을 잡아 끌 듯이 뛰어가고 있는 이 여성은 왠지 달랐다.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전해져 왔다. 왠지 낯설지만 결코 싫지 않은 이상한 감정.

어쩌면 이것이 평온함이라는 것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이곳이 내가 있었던 ' 그곳 '들과는 다른 장소라는 기분의 정체일지도...

이곳은 남미나 아프리카의 어떤 도시가 아니었다. 항상 먼지와 매캐한 화약 냄새가 흐르고 언제 어디에서 폭탄이나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 거리들. 여기서는 긴장감을 가질 필요도 주위를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상대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까지 이 것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 분명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이 곳에 왔을텐데. 설마, 이제껏 이 곳을 예전에 있던 도시와 똑같이 생각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이 거리를 걸으며 긴장감을 떨쳐버렸던 일은 한번도 없었다. 엑스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있는 그곳은 바로 전장이었기에... 동료들, 전우들과 함께 있는 장소였기에...

'내게는 역시 전장이 맞는지도 몰라.'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나쁘지 않은 느낌임에도 내 머리 속에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시간이 더 길어졌으면 하는 느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이 것이 즐겁다는 감정인 것일까?

여하튼, 불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이 감정에 몸을 맡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때였다. 앞서 달려가던 그녀가 멈추어 선 것은. 나는 문득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정신을 돌렸다. 토머스의 말대로 '여성과의 데이트에선 딴 생각은 금물'이니까...

"에... 모처럼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들어갈 수 없다니."

마린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수리 관계로 휴관 합니다. ' 정문에 붙어있는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그리고, 새하얀 팻말 위에 크게 새겨진 붉은 색 V 자....

그것은 내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붉은 색 V. 그것은 이 동물원이 휴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나타내는 말없는 분노의 표시였다.

오래 전 미국의 어떤 드라마에서 등장했던 그 표시는 바로 외계인의 침략을 나타내는 글자였기에....

분명, 이곳은 며칠 전 출동한 다른 분대의 전투가 있었던 장소이리라. 그리고, 아마도 처참하게 파괴되어 당분간 문을 열 수 없겠지. 정치가들과 같은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별로 없는 동물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좋았겠지만, 아이들로서는 놀이 공간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럼 어디로 가야하나..."

박사는 그 소리없는 메시지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표정으로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나와 다른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과 살육이 살아있는 전장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인종... 하지만, 왜일까? 그런 그녀의 모습은 아까보다도 더욱 친근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동물원이라면 옆 도시에도 있지 않을까?"

내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의 왠지 불편했던 불안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 그래요. 옆 도시에는! 하지만, 꽤 오래 걸릴텐데..."

왠지 말끝을 흐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온 몸에서는 가고 싶다는 마음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항상 어른인척 하는 그녀가 왠지 어린애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때일까? 어쩌면 내 앞에서만 드러낼지도 모르는 진심... 왠지 그녀와 보다 친숙해진 느낌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어?"

마린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잿빛의 하늘로부터 한 방울 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면서 세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아. 비가..."

마린은 미처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그녀의 스커트는 빗 속에서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웠다. 불안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나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점퍼를 벗어서 그녀에게 씌워주면서 말했다.

"여하튼, 빨리 비를 피해야..."

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내가 가장 익숙하지 않은 -이라기보다는 약한- 표정을 보았다. 토머스나 로리스 분대장의 얼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얼굴. 바로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생각되었을때의 그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럼... 안아줘요."

그 말은 나를 경악케 했다. 저런 스커트를 입은 상태로 빗 속을 뛰어갈 수는 없으니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껏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무어라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그게..."

내가 당황한 듯이 말을 하자. 그녀의 표정이 또 다시 바뀌었다. 더욱 공포감(?)이 들게 하는 표정으로...

"그럼 업어줘도 좋고... 이 옷을 입고는 뛸 수도 없는걸요."

'그럼 입고오지 않으면 되잖아.' 문득 이런 대답이 튀어나올 뻔 했다. 아무리 당황했다곤 하지만 농담이라도 이런 말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그녀는 나를 위해서 스커트를 입고 나온 셈이 아닌가? 오늘 일이 비록 그녀가 강요한 일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 그러면, 주차장까지 뛰어갈테니까..."

나는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런 상황은 그녀 또한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설사 그녀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없이 달린 끝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들은 흠뻑 젖은 상태로 차에 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흥분한 느낌이 가시지 않은 듯 마린은 아직도 발그레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있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상태였을지도 모르지만...

"저... 저기."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동시에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곁눈으로 보니 마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아... 여, 여하튼 놀랐죠?"

나는 의미도 알 수 없는 말을 꺼냈고, 그녀는 역시 왠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야, 오늘은 그냥 돌아갈 수 밖에 없겠네요."

"싫어요."

마린이 짧게 대답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대답-아니 어쩌면 바라고 있었던 대답-을 듣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내려서야..."

나는 본심과는 반대로 말을 하고 있었다.

"아직, 점심도 같이 못 먹었잖아요. 게다가, 고속도로(아우토반)로 조금 달려가면 맑은 날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아... 그런가. 하지만, 이렇게 젖은 상태로는..."

"어차피 갈아입을 옷은 가져왔으니까... 이 옷은 어차피 세탁소에 맡길거니까요."

"그. 그럼... 그렇게..."

조금 전의 당혹함이 가시지 않을 것인가. 내 스스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로서도 그녀와의 데이트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을 뿐.

"그럼. 결정되었으니까. 자. 아우토반으로 렛츠고!"

그녀는 순식간에 밝은 얼굴로 이렇게 소리쳤다.

"저기. 옷은?"

"옷이라면 여기 뒤에 있으니까. 지금 갈아 입을 거에요."

어느새 그녀와 나의 대화는 왠지 어른과 아이의 말투로 바뀌고 있었다.

"하... 하지만."

"대신 절대로 엿보면 안 돼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 두 사람이 탄 승용차는 아우토반 위를 달리고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경치.' 언젠가 엑스컴에 올 때의 느낌과는 달리, 이렇게 달리는 아우토반의 경치는 매우 시원한 기분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래. 이런 것이 진정한 평온함일지도 몰라.' 언제부터인가. 마린은 카세트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래를 조그맣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보니, 하늘을 덮고 있던 잿빛 구름들이 이미 사라지고 도로 위에는 밝은 햇살이 내려 쬐고 있었다.

거봐요. 나를 바라보는 미소가 담긴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 컨트리송을 따라 부르면서 아우토반을 질주해나갔다.


★∼을 사랑하는 표도기였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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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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