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데시코 외전 : 호넷 - 작가 : Frank
글 수 87
2202년 06월 07일. 01시 30분. 스웨덴 우데발라
"..."
'우용인'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창 너머로 보이는 들판을 바라보
았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 부탁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확고한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의 어린 여동생 '우보라'는 문 틈으로 보이는 오빠의 모습을 보면
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 이곳에 정착했지만, 남매에겐 편안한 나날이
란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소재를 파악한 한국 국방부가 보라
앞으로 해군 함정에 승무원으로 승선할 것을 지시하는 서류를 보냈
고, 그 기한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나 때문에...'
거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보라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걸터
앉고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보라야."
"오, 오빠...?"
"나 다녀와야 할 곳이 생겼어.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올게."
"오빠, 꼭 가야 돼? 응?"
"..."
"오빠, 부탁이야. 가지마. 제발..."
"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못 본 척 할 수 없어. 그리고 대장
님께 용서를 빌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난 평생 떳떳하게 살 수 없
을 거야."
그렇게 자신의 의지를 말한 후 용인은 집 차고로 가 소형 컨테이너
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2202년 06월 07일. 03시 05분. 스웨덴 베네르스보리
"..."
글렌 소위는 총을 든 채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
론 밖에서 눈에 띄는 걸 피하기 위해 간격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
다. 두 사람의 24시간은 늘 이랬다. 글렌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망
을 봤으며, 루리는 그 반대였다.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방을 따로 썼지만, 시간
이 흐르면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속편하게 서로를 쉽게 돕기
위해서라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기 쉬웠다.
'이걸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지?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 갈 데 까
지 간 변태? 나노코프(문제의 소설 로리타를 쓴 러시아계 미국 소
설가)가 보면 아예 박수를 치겠군...'
그렇게 속으로 빈정 대면서도 그의 시선은 가끔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루리를 향하곤 했다. 나이가 문제이긴 했지만, 그가 보기에 그
녀는 아름다웠다. 마치 동화속에나 나올 법한 요정처럼...
'그만 생각하자. 글렌, 정신 차려라. 그저 그림의 케익일 뿐이다. 저
분은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 남자들과 맺어져야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추스린 그는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케빈."
"!"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난데없이 자기 뒤에 서 있는 루리를 보고 깜짝 놀란 글렌 소위는
그녀가 계급 대신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
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조차도...
"이것 좀 마시겠어요?"
"고, 고맙습니다."
얼떨결에 루리가 준 음료수를 급히 마신 그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
이 들었다.
'이, 이게 대체 뭐냐?'
"죄송해요.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다, 당신..."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이내 쓰러졌고, 루리는 그를 침대위로 끌
어다 놓은 후 군복 바지를 벗기며 말했다.
"저도 간단한 약품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최음제 같은 것도..."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글렌 소위 몸 위에 앉은 채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2202년 06월 07일. 03시 30분. 카테카트 해협
특별한 임무 없이 대기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상륙 모함의 선실에
서 잠을 자고 있는 '조니 테일러' 중위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눈을 뜨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봐 당신들 누구야?"
"입 닥치고 이거나 봐. 긴급 명령이다."
부니햇을 쓴 포스 리컨 대원 한 명이 서류를 그의 눈 앞에 내밀자
상황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테일러 중위는 군말 없이 비행복을 챙
겨 입고 나와 갑판에 주기 중인 MV-45 호크의 조종석에 올랐고
포스 리컨 대원들은 장갑차를 끌고와 호크에 올랐다.
"항공 관제반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륙해. 이건 어차피 비밀 임무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곧 호크는 상륙 모함의 갑판으로부터 벗어나 스웨덴 쪽으로 날아갔
다.
2202년 06월 07일. 05시 00분. 스웨덴 국도 32호선
"드디어 시작된 건가?"
"모두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언덕 위에서 출발 중인 에스테바리스들을 바라보는 나데시코 크루
들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고 있었다. 당분간 작전 전면에 나설
일이 없게 된 미군들도 느긋하게 장갑차 위에 걸터 앉은 채 쌍안경
으로 다섯 대의 에스테바리스들을 바라보았다.
"작전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걸친 위장 그물은 저격포의 센서에
7Km 까지 접근하기 전까지 우리를 은폐해줄 것이다. 예정 위치에
이르게되면 저격포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곧바로 이탈한다."
다케다(임대형) 대령의 작전 설명에 료코, 히카루, 이즈미, 사부로타
네 사람은 발광 신호로 답해주었다. 그들이 탄 에스테바리스가 걸
치고 있는 스웨덴제 최신형 위장 그물은 인근 스웨덴군의 물자 집
적소에서 억지로 뺏다시피해서 가져온 것들로 스웨덴군 장교는 통
합군에 항의하겠다고 화를 냈지만,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크게 나쁜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웨이포인트 알파를 통과했다. 웨이포인트 브라보로 향하라."
곧 방향을 바꾼 다섯 대의 에스테바리스가 웨이포인트 알파와 브라
보의 중간에 이르는 순간 일이 터졌다. 매복한 목성군 중기관포 진
지 십 수개가 그들을 향해 기과포탄을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대령님, 적입니다!
"제기랄! 다카스키(사부로타의 성), 뒤를 맡아!"
침투가 실패하자 곧바로 퇴각하려는 그들의 머리 위로 조명탄이 터
졌다. 목성군 전체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그 후 저격포가
포탄을 내뱉었고, 155mm 고폭탄은 음속으로 비행해 료코의 에스테
바리스의 코어 부근에 명중했다.
"료코! 괜찮아?"
무전기로 료코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다케다 대령은 아무런 응답이
없자 즉시 조치를 취했다.
"히카루, 이즈미. 료코를 빨리 후방으로 데려가!"
-네. 대령님.
어쩔 수 없이 도망치는 신세가 된 삼인랑을 엄호해 주며 돌아가려
던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저격포가 다시 포격을 가해 아직 무사
하던 이즈미와 히카루의 기체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으윽..."
히카루는 코어를 뚫고 들어온 미세한 파편이 몸에 박히자 피를 흘
리며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히카루?
"대령님..."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자 대형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미칠 지경이었
다.
"통합군의 쥐새끼들. 여기가 너희들의 무덤이다. 포수, 포탄이 장전
되는 대로 끝내라."
-네. 차장님.
저격포 차장은 노출되기 쉬운 액티브 방식이긴 하지만 자연광을 이
용하기 때문에 탐지 거리에 한계가 있는 기존 장비보다 훨씬 선명
한 영상을 제공하는 신형 주야간 광학 센서를 통해 포착한 다섯 대
의 에스테바리스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전 끝났습니다."
바로 그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포탑 위에 무언가가 부딪
친 것이다. 둔탁한 충격음을 듣고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이 모두 깜
짝놀랐고, 차장은 급히 지시했다.
"공격을 중지하라. 우릴 향해 쏜 놈이 누군지 찾아야 한다."
"레이더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FLIR(전방 감시 적외선 장비)와 광학 센서를 써라."
그렇게 지시한 후 차장은 식은 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대체 누구지? 우리와 같은 저격포인가? 설마 이탈리아군이...?'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의 귀에 보고가 들어왔다.
-찾았습니다!
"저격포인가?"
-아닙니다. 우릴 공격한 적은...
거기 까지 들은 차장은 자기 자리의 다용도 디스플레이로 센서가
포착한 영상을 확인하고는 치를 떨었다.
"IA로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저 거리에서?
"좀 더 확대해라."
-네.
곧 더 선명한 화면이 들어오자 차장은 '과연 그렇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님, 대체 저 놈은 뭡니까?
"한국군의 전설적인 특수부대 워울프의 대원 중 한 명이다. 더 정확
히 말하자면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우용인' 중위다."
-저 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나도 오늘 처음 봤지만, 이런 얘기를 들었다. 22세기 말에 우리군
이 화성에서 통합군을 상대로 싸울 때 사이도니아의 한국군 물자
집적소를 접수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 임무에 1개 완편 기계화 대
대가 투입되었지. 하지만, 물자 집적소에 접근하려 할 때마다 우리
군은 하나씩 죽었다고 한다. 결국 장갑 보병 1개 분대만이 목적지
에 간신히 도착했지만, 그들 눈엔 아무 것도 없었어. 오직 전쟁의
폐허만 남아 있었지. 얼마 못가 그들도 전멸했다. 후에 회수된 미션
컴퓨터들을 조사한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다. 열 명에 불과한 한국
군 장갑 보병 저격 분대가 원거리 저격으로 아군을 모두 몰살시킨
거야. 그들을 지휘했던 자가 바로 '우용인' 중위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
"한국인은 올림픽 양궁과 사격에서 과녁 한 가운데에 있는 카메라
렌즈 정 중앙을 십 수차례에 걸쳐 명중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 자
들이 있다면 한국군엔 그보다 더한 저격수가 없으란 법은 어디에도
없는 거다."
-두, 두렵습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소문은 부풀려지는 법이니까. 화력, 방어
력, 조준기 모두 우리가 놈보다 한 수 위다! 지난 전쟁에서 놈에게
죽어간 동포들을 대신해 우리가 복수하는 거다!"
'우용인' 중위는 침착하게 다음탄을 장전한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괴, 굉장하다..."
"함장 대리! 빨리 몸을 숨기세요!"
"아, 그렇지. 미안 리리스쨩."
유리카가 멋적게 웃으며 참호 안으로 몸을 숨기는 동안 리리스는
옆에 앉아 있는 보라를 바라보았다. 다들 손에 땀을 쥐며 '우용인'
중위의 싸움을 지켜보는 가운데 도착한 한국군도 침묵을 지킨 채
이 일 대 일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저..."
"말씀하세요."
"걱정되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없죠. 하지만 오빠를 믿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어요."
자기처럼 금빛 눈을 한 보라의 말에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
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대장님. 접니다."
-녀석. 결국엔 왔구나.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 외엔 드릴 말씀이 없군요..."
-괜찮아.
"실은 부탁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봐라.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대장님 밑에서 다시 싸우고 싶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잘 들어라. 난 네게 전역을 허가한 적이 없다.
"감사합니다."
-빨리 서둘러라. 이제 놈이 다음탄을 쏠 거다. 그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제가 반드시 놈을 날려버리겠습니다!"
우 중위는 그렇게 말한 후 40mm 저격총의 장전 손잡이를 당겼다.
곧 철커덕 소리와 함께 탄창에 든 새로운 탄이 약실에 장전되었고,
그는 광학 조준기로 차체와 포탑의 결합 부분을 조준했다.
'놈의 취약점은 여기 뿐이다. 40mm라면 승산이 있어!'
곧 그는 방아쇠를 당겼고, 저격포도 포탄을 쏘았다.
"맞았나?"
유리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50m 떨어진 곳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먼지와 흙더미가 밀려들자 비명을 질렀다.
"함장 대리! 괜찮으세요?"
"나, 난 괜찮아. 그보다 대령님의 동료분은?"
"모르겠어요."
"오빠!"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먼지가 걷히면서 '우용인' 중위의 IA가
천천히 걸어왔다.
"오빠."
보라는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고, 용인은 그런
동생을 끌어 안으며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캡틴 유리카. 저격포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가 폭발한 저격포에서 나오는 불빛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유
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빨리 옮겨."
"히카루, 료코!"
"이즈미. 지금 이런다고 해서 아무 소용도 없어."
"그렇지만..."
산소 호흡기를 입에 단 채 의무실로 후송되는 히카루와 료코를 바
라보던 이즈미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잘 들으세요. 아마노는 고비를 넘겼지만, 스바루 중위는 지금
수혈을 받아야 해요."
"네?"
식당에 급히 모인 주요 멤버들 앞에 선 수술복을 입은 이네스의 입
에서 료코가 수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길 하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때문에 료코가..."
"대령님..."
심한 자책감에 빠진 다케다 대령이 머리를 싸맨 가운데 이네스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승무원 모두의 건강 기록을 확인한 결과 유일하게 수혈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바로..."
이네스는 곧 안경을 벗으며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얘기를 끝냈
다.
"저, 저란 말입니까?"
"네. 당신 밖에 없어요."
다케다(임대형) 대령은 곧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답했다.
"좋아요. 수혈 하겠습니다."
"..."
'우용인'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창 너머로 보이는 들판을 바라보
았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 부탁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확고한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의 어린 여동생 '우보라'는 문 틈으로 보이는 오빠의 모습을 보면
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 이곳에 정착했지만, 남매에겐 편안한 나날이
란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소재를 파악한 한국 국방부가 보라
앞으로 해군 함정에 승무원으로 승선할 것을 지시하는 서류를 보냈
고, 그 기한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나 때문에...'
거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보라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걸터
앉고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보라야."
"오, 오빠...?"
"나 다녀와야 할 곳이 생겼어.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올게."
"오빠, 꼭 가야 돼? 응?"
"..."
"오빠, 부탁이야. 가지마. 제발..."
"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못 본 척 할 수 없어. 그리고 대장
님께 용서를 빌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난 평생 떳떳하게 살 수 없
을 거야."
그렇게 자신의 의지를 말한 후 용인은 집 차고로 가 소형 컨테이너
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2202년 06월 07일. 03시 05분. 스웨덴 베네르스보리
"..."
글렌 소위는 총을 든 채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
론 밖에서 눈에 띄는 걸 피하기 위해 간격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
다. 두 사람의 24시간은 늘 이랬다. 글렌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망
을 봤으며, 루리는 그 반대였다.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방을 따로 썼지만, 시간
이 흐르면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속편하게 서로를 쉽게 돕기
위해서라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기 쉬웠다.
'이걸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지?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 갈 데 까
지 간 변태? 나노코프(문제의 소설 로리타를 쓴 러시아계 미국 소
설가)가 보면 아예 박수를 치겠군...'
그렇게 속으로 빈정 대면서도 그의 시선은 가끔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루리를 향하곤 했다. 나이가 문제이긴 했지만, 그가 보기에 그
녀는 아름다웠다. 마치 동화속에나 나올 법한 요정처럼...
'그만 생각하자. 글렌, 정신 차려라. 그저 그림의 케익일 뿐이다. 저
분은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 남자들과 맺어져야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추스린 그는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케빈."
"!"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난데없이 자기 뒤에 서 있는 루리를 보고 깜짝 놀란 글렌 소위는
그녀가 계급 대신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
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조차도...
"이것 좀 마시겠어요?"
"고, 고맙습니다."
얼떨결에 루리가 준 음료수를 급히 마신 그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
이 들었다.
'이, 이게 대체 뭐냐?'
"죄송해요.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다, 당신..."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이내 쓰러졌고, 루리는 그를 침대위로 끌
어다 놓은 후 군복 바지를 벗기며 말했다.
"저도 간단한 약품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최음제 같은 것도..."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글렌 소위 몸 위에 앉은 채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2202년 06월 07일. 03시 30분. 카테카트 해협
특별한 임무 없이 대기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상륙 모함의 선실에
서 잠을 자고 있는 '조니 테일러' 중위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눈을 뜨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봐 당신들 누구야?"
"입 닥치고 이거나 봐. 긴급 명령이다."
부니햇을 쓴 포스 리컨 대원 한 명이 서류를 그의 눈 앞에 내밀자
상황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테일러 중위는 군말 없이 비행복을 챙
겨 입고 나와 갑판에 주기 중인 MV-45 호크의 조종석에 올랐고
포스 리컨 대원들은 장갑차를 끌고와 호크에 올랐다.
"항공 관제반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륙해. 이건 어차피 비밀 임무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곧 호크는 상륙 모함의 갑판으로부터 벗어나 스웨덴 쪽으로 날아갔
다.
2202년 06월 07일. 05시 00분. 스웨덴 국도 32호선
"드디어 시작된 건가?"
"모두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언덕 위에서 출발 중인 에스테바리스들을 바라보는 나데시코 크루
들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고 있었다. 당분간 작전 전면에 나설
일이 없게 된 미군들도 느긋하게 장갑차 위에 걸터 앉은 채 쌍안경
으로 다섯 대의 에스테바리스들을 바라보았다.
"작전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걸친 위장 그물은 저격포의 센서에
7Km 까지 접근하기 전까지 우리를 은폐해줄 것이다. 예정 위치에
이르게되면 저격포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곧바로 이탈한다."
다케다(임대형) 대령의 작전 설명에 료코, 히카루, 이즈미, 사부로타
네 사람은 발광 신호로 답해주었다. 그들이 탄 에스테바리스가 걸
치고 있는 스웨덴제 최신형 위장 그물은 인근 스웨덴군의 물자 집
적소에서 억지로 뺏다시피해서 가져온 것들로 스웨덴군 장교는 통
합군에 항의하겠다고 화를 냈지만,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크게 나쁜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웨이포인트 알파를 통과했다. 웨이포인트 브라보로 향하라."
곧 방향을 바꾼 다섯 대의 에스테바리스가 웨이포인트 알파와 브라
보의 중간에 이르는 순간 일이 터졌다. 매복한 목성군 중기관포 진
지 십 수개가 그들을 향해 기과포탄을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대령님, 적입니다!
"제기랄! 다카스키(사부로타의 성), 뒤를 맡아!"
침투가 실패하자 곧바로 퇴각하려는 그들의 머리 위로 조명탄이 터
졌다. 목성군 전체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그 후 저격포가
포탄을 내뱉었고, 155mm 고폭탄은 음속으로 비행해 료코의 에스테
바리스의 코어 부근에 명중했다.
"료코! 괜찮아?"
무전기로 료코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다케다 대령은 아무런 응답이
없자 즉시 조치를 취했다.
"히카루, 이즈미. 료코를 빨리 후방으로 데려가!"
-네. 대령님.
어쩔 수 없이 도망치는 신세가 된 삼인랑을 엄호해 주며 돌아가려
던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저격포가 다시 포격을 가해 아직 무사
하던 이즈미와 히카루의 기체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으윽..."
히카루는 코어를 뚫고 들어온 미세한 파편이 몸에 박히자 피를 흘
리며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히카루?
"대령님..."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자 대형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미칠 지경이었
다.
"통합군의 쥐새끼들. 여기가 너희들의 무덤이다. 포수, 포탄이 장전
되는 대로 끝내라."
-네. 차장님.
저격포 차장은 노출되기 쉬운 액티브 방식이긴 하지만 자연광을 이
용하기 때문에 탐지 거리에 한계가 있는 기존 장비보다 훨씬 선명
한 영상을 제공하는 신형 주야간 광학 센서를 통해 포착한 다섯 대
의 에스테바리스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전 끝났습니다."
바로 그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포탑 위에 무언가가 부딪
친 것이다. 둔탁한 충격음을 듣고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이 모두 깜
짝놀랐고, 차장은 급히 지시했다.
"공격을 중지하라. 우릴 향해 쏜 놈이 누군지 찾아야 한다."
"레이더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FLIR(전방 감시 적외선 장비)와 광학 센서를 써라."
그렇게 지시한 후 차장은 식은 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대체 누구지? 우리와 같은 저격포인가? 설마 이탈리아군이...?'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의 귀에 보고가 들어왔다.
-찾았습니다!
"저격포인가?"
-아닙니다. 우릴 공격한 적은...
거기 까지 들은 차장은 자기 자리의 다용도 디스플레이로 센서가
포착한 영상을 확인하고는 치를 떨었다.
"IA로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저 거리에서?
"좀 더 확대해라."
-네.
곧 더 선명한 화면이 들어오자 차장은 '과연 그렇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님, 대체 저 놈은 뭡니까?
"한국군의 전설적인 특수부대 워울프의 대원 중 한 명이다. 더 정확
히 말하자면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우용인' 중위다."
-저 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나도 오늘 처음 봤지만, 이런 얘기를 들었다. 22세기 말에 우리군
이 화성에서 통합군을 상대로 싸울 때 사이도니아의 한국군 물자
집적소를 접수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 임무에 1개 완편 기계화 대
대가 투입되었지. 하지만, 물자 집적소에 접근하려 할 때마다 우리
군은 하나씩 죽었다고 한다. 결국 장갑 보병 1개 분대만이 목적지
에 간신히 도착했지만, 그들 눈엔 아무 것도 없었어. 오직 전쟁의
폐허만 남아 있었지. 얼마 못가 그들도 전멸했다. 후에 회수된 미션
컴퓨터들을 조사한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다. 열 명에 불과한 한국
군 장갑 보병 저격 분대가 원거리 저격으로 아군을 모두 몰살시킨
거야. 그들을 지휘했던 자가 바로 '우용인' 중위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
"한국인은 올림픽 양궁과 사격에서 과녁 한 가운데에 있는 카메라
렌즈 정 중앙을 십 수차례에 걸쳐 명중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 자
들이 있다면 한국군엔 그보다 더한 저격수가 없으란 법은 어디에도
없는 거다."
-두, 두렵습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소문은 부풀려지는 법이니까. 화력, 방어
력, 조준기 모두 우리가 놈보다 한 수 위다! 지난 전쟁에서 놈에게
죽어간 동포들을 대신해 우리가 복수하는 거다!"
'우용인' 중위는 침착하게 다음탄을 장전한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괴, 굉장하다..."
"함장 대리! 빨리 몸을 숨기세요!"
"아, 그렇지. 미안 리리스쨩."
유리카가 멋적게 웃으며 참호 안으로 몸을 숨기는 동안 리리스는
옆에 앉아 있는 보라를 바라보았다. 다들 손에 땀을 쥐며 '우용인'
중위의 싸움을 지켜보는 가운데 도착한 한국군도 침묵을 지킨 채
이 일 대 일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저..."
"말씀하세요."
"걱정되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없죠. 하지만 오빠를 믿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어요."
자기처럼 금빛 눈을 한 보라의 말에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
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대장님. 접니다."
-녀석. 결국엔 왔구나.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 외엔 드릴 말씀이 없군요..."
-괜찮아.
"실은 부탁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봐라.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대장님 밑에서 다시 싸우고 싶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잘 들어라. 난 네게 전역을 허가한 적이 없다.
"감사합니다."
-빨리 서둘러라. 이제 놈이 다음탄을 쏠 거다. 그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제가 반드시 놈을 날려버리겠습니다!"
우 중위는 그렇게 말한 후 40mm 저격총의 장전 손잡이를 당겼다.
곧 철커덕 소리와 함께 탄창에 든 새로운 탄이 약실에 장전되었고,
그는 광학 조준기로 차체와 포탑의 결합 부분을 조준했다.
'놈의 취약점은 여기 뿐이다. 40mm라면 승산이 있어!'
곧 그는 방아쇠를 당겼고, 저격포도 포탄을 쏘았다.
"맞았나?"
유리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50m 떨어진 곳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먼지와 흙더미가 밀려들자 비명을 질렀다.
"함장 대리! 괜찮으세요?"
"나, 난 괜찮아. 그보다 대령님의 동료분은?"
"모르겠어요."
"오빠!"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먼지가 걷히면서 '우용인' 중위의 IA가
천천히 걸어왔다.
"오빠."
보라는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고, 용인은 그런
동생을 끌어 안으며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캡틴 유리카. 저격포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가 폭발한 저격포에서 나오는 불빛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유
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빨리 옮겨."
"히카루, 료코!"
"이즈미. 지금 이런다고 해서 아무 소용도 없어."
"그렇지만..."
산소 호흡기를 입에 단 채 의무실로 후송되는 히카루와 료코를 바
라보던 이즈미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잘 들으세요. 아마노는 고비를 넘겼지만, 스바루 중위는 지금
수혈을 받아야 해요."
"네?"
식당에 급히 모인 주요 멤버들 앞에 선 수술복을 입은 이네스의 입
에서 료코가 수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길 하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때문에 료코가..."
"대령님..."
심한 자책감에 빠진 다케다 대령이 머리를 싸맨 가운데 이네스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승무원 모두의 건강 기록을 확인한 결과 유일하게 수혈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바로..."
이네스는 곧 안경을 벗으며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얘기를 끝냈
다.
"저, 저란 말입니까?"
"네. 당신 밖에 없어요."
다케다(임대형) 대령은 곧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답했다.
"좋아요. 수혈 하겠습니다."
SF를 좋아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 곳에서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