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98
최근 일본 게임과 게임기는 제게 있어서는 일종의 미답사 지대입니다. 한때 오락실에서 킹오파도 하고 메탈슬러그도 했었고 영웅전설이나 파랜드 택틱스나 판타지 스타를 붙잡고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 그쪽 게임들은 어째 제 취향은 아닌 게 많기도 하고, 어쨌건 전 콘솔 게임하고 PC 게임 중 하나를 고르라면 PC를 고를 테고 이제 둘 다 할 여력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비행시뮬에도 쓸 수 있을까 하고 엑박 패드도 샀었고(없는 것 보다는 낫더군요), 얼마 전에 PC판으로 나와서 꽤 잘 팔렸다고도 하니 전장의 발큐리아를 해봤습니다.
* SRPG와 전술게임의 간격
전장의 발큐리아는 조금 특이한 방식의 SRPG입니다. 턴방식 분대전술게임이라고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하면 할수록 예전에 하던 슈퍼로봇대전이나 메타녀 같은 일본 SRPG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2D 전체지도에서 유닛들을 움직여 전투시에는 전투창으로 넘어가던 게, 2D 지도에서 조작시에만 3D로 바뀐다고 해야 할까나요.
대놓고 2차 대전 비슷한 세계관을 짜놓고 플레이어가 전차나 보병들을 이용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인데, 턴방식이긴 해도 많이 특이한 방식입니다. 턴마다 유닛을 한 번씩 움직이거나 하는 게 아니라, 턴마다 일정량의 행동수치가 주어지고 그 수치를 이용해서 같은 유닛을 여러 번 움직이거나 다양한 유닛을 한 번씩 움직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신 같은 유닛을 한 턴에 여러 번 움직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유닛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한 번만 사격이 가능하며, 일부 무기는 한 턴마다 탄약이 보충되는 식이라 한 유닛만 움직여서 다 때려잡기는 어렵습니다만...
더군다나 유닛을 움직일 때는 3인칭 시점으로 직접 조작해서 이동하고 사격하게 되고요, 헤드샷이나 엄폐 등의 개념도 있으며 적에게 접근하면 대응사격을 받기 때문에 조작을 서둘러야 하는 등 슈팅 게임에 가까운 느낌도 줍니다.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실제 플레이 자체는 유닛별 엄폐에 교차사격 같은 걸 써먹는 '전술' 게임이라기보다는 그냥 퍼즐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적들의 인공지능 자체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각 스테이지별로 거대 보스가 나온다거나 모래 폭풍이 몰아친다거나 보통 뭔가 특이한 장치가 들어가고요, 게임상 지도로는 상황 파악이 쉽지 않은데다, 턴이 지날수록 증원군이 온다거나 스토리상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도록 미리 짜놓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외워야 하는 식이죠.
-종이 질감의 지도 화면은 멋지긴 해도 현 상황을 정확히 알기는 힘듭니다.
이외에도 가장 기본적인 우회 공격 같은 것만 해보려고 해도 제대로 된 엄폐물은 샌드백뿐이고, 엄폐물 뒤에 숨으면 맞춰도 피해 자체가 적게 들어가며 그 뒤로 돌아와서 적과 바로 앞에서 마주보고 있어도 여전히 적이 엄폐 판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수류탄이나 화염방사기로 날려버리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병과별이나 지휘 커맨드 등의 밸런스 문제도 있고요. 주인공이나 특수능력이 강한 거야 그렇다 쳐도,캐릭터 별로 있는 특성은 너무 무작위적으로 발동하는데다 대전차화기 병과인 랜서는 갈수록 쓸모가 없어지죠.
대부분의 미션 목표가 적의 전멸이나 아군 사망 같은 것과 상관없이, 특정 지역에 아군 유닛을 빨리 보내서 점령하기만 하면 좋은 등급을 받고 경험치와 돈을 잔뜩 받게 되어 있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유닛들을 움직이고 적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최대한 빨리 목적지까지 이동할 방법만 찾으면 되는 것이고 이에 관한 해법은 그리 다양하지도 쉽지도 않거든요.
개발진이 심어놓은 이 최적의 해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과정 자체는 나름 재밌습니다만, 뭔가 열심히 상황을 보고 파훼법을 찾으려 든다기보다는 될 때까지 외워서 노가다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특히 최고 등급을 받으려면 말 그대로 총알을 온몸으로 맞아가면서 미친 듯이 돌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재밌긴 한데, 덕분에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뭔가 좀 문제가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 저패니메이션 게임
일본 게임들의 그래픽이(사실 상당수의 한국 게임들도) 보통 일본 만화를 그대로 화면상에 재현하려 들지만, 전장의 발큐리아는 개중에서도 꽤 성공적인 축에 듭니다. 모델링이 비교적 단순하고 텍스쳐 해상도도 낮지만 색감이 워낙 좋은데다가, 위 스크린샷에서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펜자국처럼 명암 처리를 해줘서 분위기가 상당히 멋지죠. 나온 지 꽤 오래된 게임인데도 그래픽적으로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냥 예뻐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별로 전쟁 같지 않은 전쟁과 별로 군인 같지 않은 군인과 별로 로맨스 같지 않은 로맨스와 참 쓸데없는 귀여운 마스코트 동물 등등 그쪽 애니메이션의 경향을 정말로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 자체는 공식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좀 끔찍합니다. SRPG라는 건 말이 RPG지 그냥 전투 한 번 하고 대사 스토리 한참 쭈욱 보고 다시 전투 한 번 하는 식이라 스토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으니 이건 꽤 큰 문제죠.
전차 등의 디자인에서도 티가 나지만, 설정만으로도 2차 대전을 아주 약간 바꿔놓은 것에 불과한 배경 설정은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습니다. 플롯 자체의 구성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아요. 개성 있는 등장인물도 있고, 복선도 있고, 반전도 있고, 배신도 있고, 갈등도 있고, 교훈도 있고, 수영복 입고 나오는 서비스씬까지 있죠. 있어야 할 건 다 있어요.
다만 그 모든 게 너무나도 얕다는 게 문제입니다. 꽤 넓지만 동시에 손가락 넣으면 바닥에 닿을 만큼 얕아요. 대사량은 엄청나게 많으나 딱히 기억에 남을 대사는 없고요, 캐릭터들의 개성은 설정상으로 존재하고 가끔씩 표현은 되지만 별 의미가 없으며, 복선은 너무 뻔해서 손발이 오그라들고 반전은 너무 예상하기 쉬우며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최종장의 반전은 그나마 좀 괜찮긴 합니다만, 그것도 마지막 보스를 마주치기 전까지의 이야기죠.
동시에 중요해야 할 심리적 갈등들은 참으로 간단히도 튀어나왔다가 간단히도 봉합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몇몇 장면에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바닥을 뒹굴면서 으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 정말로. 거기서 노래를 불러? 정말로? 우리는 서로를 믿으니까 그런 건 필요가 없어? 정말로? 정말로? 이에는 영문 성우(전 일본어를 못하니까요)의 미묘하게 어색한 연기와 미묘하게 어색한 번역(한글 패치가 있다는데 그냥 영문으로 돌렸습니다)도 한 몫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스토리는 좋게 평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 기타 잡설
원래 콘솔 게임이고 PC로 넘어오면서도 그리 크게 손본 건 없으니 인터페이스는 뭐 그저 그렇습니다. 패드로만 해서 마우스와 키보드로 조작하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별로 편하진 않을 것 같네요. 다만 왜 뭐 할 때마다 확인창이 뜨는가는 정말 큰 의문입니다. 하다못해 기지 화면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예 / 아니오 하고 창을 띄우는 이유가 뭘까요.
게임 음악 좋아하는 입장에서 음악 역시 꽤 괜찮군요.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전반적으로 일본쪽 게임 음악들은 서구쪽보다 좀 더 튀는 경향이 있다 싶습니다. 개성적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전자가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으니 게임 분위기에 의외로 잘 어울린다 싶은 그런 느낌이라면, 후자는 게임 특유의 분위기에 맞춰 나가는 데 치중하고 전면으로는 잘 나서지 않는 식이죠. 둘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사실, 완벽히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일본쪽 게임들은 추상적이고 시스템적인 접근법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 했었죠 아마. 장기가 그렇듯이 규칙을 만들고 이 규칙에 맞춰 게임이 굴러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걸 선호하는 것 같아요. 서구쪽에서 인기가 있는 RTS나 FPS는 반면 규칙이 있더라도 좀 더 직관적이며 가상현실적인 느낌이고, 플레이어의 체험을 중시하죠. 똑같이 전투를 묘사하더라도 장기와 전장의 발큐리아와 스타크래프트와 배틀필드는 서로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파이널 판타지 13은 여전히 전투시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어디 이상한 공간으로 날아가서 싸우지만 엘더 스크롤은 처음부터 1인칭으로 움직이며 버튼 누를 때마다 칼 휘두르는 식이라던가요.
이 역시 장단점이 있습니다. 다만 컴퓨터 성능이 부족하고 컨트롤러에 달린 거라곤 십자키에 A B 버튼밖에 없던 시절에라면 별 차이가 없겠지만,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득 보기 쉬운 건 후자라는 게 차이점이겠죠. 음악의 느낌이 다른 것 역시 체험과 경험이라는 이런 접근법상의 문제로 해석하면 어떨까...뭐 스토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대충 넘겨버리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총평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견딜 수 있다면, 혹은 더 나아가 이런 쪽 이야기가 취향이라면 꽤 좋아하실 수 있는 물건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좀 개인적 편견이 심하게 반영된 평가긴 합니다만 어쨌건 재밌게 해본 사람도 많고, 저도 꽤 재밌게 했듯이 상당히 괜찮은 게임인 건 사실입니다. 스토리는 마음에 안 들면 좀 길긴 해도 대충 넘기면 되고, 전투는 단점은 있으나 독특하고 재밌긴 하니까 말이죠. 국내에서는 스팀에서 판매를 막아놔서 아마존이나 구매대행으로 넘어가야 하는 게 좀 귀찮긴 하네요.
그래도 비행시뮬에도 쓸 수 있을까 하고 엑박 패드도 샀었고(없는 것 보다는 낫더군요), 얼마 전에 PC판으로 나와서 꽤 잘 팔렸다고도 하니 전장의 발큐리아를 해봤습니다.
* SRPG와 전술게임의 간격
전장의 발큐리아는 조금 특이한 방식의 SRPG입니다. 턴방식 분대전술게임이라고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하면 할수록 예전에 하던 슈퍼로봇대전이나 메타녀 같은 일본 SRPG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2D 전체지도에서 유닛들을 움직여 전투시에는 전투창으로 넘어가던 게, 2D 지도에서 조작시에만 3D로 바뀐다고 해야 할까나요.
대놓고 2차 대전 비슷한 세계관을 짜놓고 플레이어가 전차나 보병들을 이용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인데, 턴방식이긴 해도 많이 특이한 방식입니다. 턴마다 유닛을 한 번씩 움직이거나 하는 게 아니라, 턴마다 일정량의 행동수치가 주어지고 그 수치를 이용해서 같은 유닛을 여러 번 움직이거나 다양한 유닛을 한 번씩 움직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신 같은 유닛을 한 턴에 여러 번 움직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유닛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한 번만 사격이 가능하며, 일부 무기는 한 턴마다 탄약이 보충되는 식이라 한 유닛만 움직여서 다 때려잡기는 어렵습니다만...
더군다나 유닛을 움직일 때는 3인칭 시점으로 직접 조작해서 이동하고 사격하게 되고요, 헤드샷이나 엄폐 등의 개념도 있으며 적에게 접근하면 대응사격을 받기 때문에 조작을 서둘러야 하는 등 슈팅 게임에 가까운 느낌도 줍니다.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실제 플레이 자체는 유닛별 엄폐에 교차사격 같은 걸 써먹는 '전술' 게임이라기보다는 그냥 퍼즐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적들의 인공지능 자체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각 스테이지별로 거대 보스가 나온다거나 모래 폭풍이 몰아친다거나 보통 뭔가 특이한 장치가 들어가고요, 게임상 지도로는 상황 파악이 쉽지 않은데다, 턴이 지날수록 증원군이 온다거나 스토리상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도록 미리 짜놓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외워야 하는 식이죠.
-종이 질감의 지도 화면은 멋지긴 해도 현 상황을 정확히 알기는 힘듭니다.
이외에도 가장 기본적인 우회 공격 같은 것만 해보려고 해도 제대로 된 엄폐물은 샌드백뿐이고, 엄폐물 뒤에 숨으면 맞춰도 피해 자체가 적게 들어가며 그 뒤로 돌아와서 적과 바로 앞에서 마주보고 있어도 여전히 적이 엄폐 판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수류탄이나 화염방사기로 날려버리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병과별이나 지휘 커맨드 등의 밸런스 문제도 있고요. 주인공이나 특수능력이 강한 거야 그렇다 쳐도,캐릭터 별로 있는 특성은 너무 무작위적으로 발동하는데다 대전차화기 병과인 랜서는 갈수록 쓸모가 없어지죠.
대부분의 미션 목표가 적의 전멸이나 아군 사망 같은 것과 상관없이, 특정 지역에 아군 유닛을 빨리 보내서 점령하기만 하면 좋은 등급을 받고 경험치와 돈을 잔뜩 받게 되어 있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유닛들을 움직이고 적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최대한 빨리 목적지까지 이동할 방법만 찾으면 되는 것이고 이에 관한 해법은 그리 다양하지도 쉽지도 않거든요.
개발진이 심어놓은 이 최적의 해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과정 자체는 나름 재밌습니다만, 뭔가 열심히 상황을 보고 파훼법을 찾으려 든다기보다는 될 때까지 외워서 노가다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특히 최고 등급을 받으려면 말 그대로 총알을 온몸으로 맞아가면서 미친 듯이 돌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재밌긴 한데, 덕분에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뭔가 좀 문제가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 저패니메이션 게임
일본 게임들의 그래픽이(사실 상당수의 한국 게임들도) 보통 일본 만화를 그대로 화면상에 재현하려 들지만, 전장의 발큐리아는 개중에서도 꽤 성공적인 축에 듭니다. 모델링이 비교적 단순하고 텍스쳐 해상도도 낮지만 색감이 워낙 좋은데다가, 위 스크린샷에서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펜자국처럼 명암 처리를 해줘서 분위기가 상당히 멋지죠. 나온 지 꽤 오래된 게임인데도 그래픽적으로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냥 예뻐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별로 전쟁 같지 않은 전쟁과 별로 군인 같지 않은 군인과 별로 로맨스 같지 않은 로맨스와 참 쓸데없는 귀여운 마스코트 동물 등등 그쪽 애니메이션의 경향을 정말로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 자체는 공식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좀 끔찍합니다. SRPG라는 건 말이 RPG지 그냥 전투 한 번 하고 대사 스토리 한참 쭈욱 보고 다시 전투 한 번 하는 식이라 스토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으니 이건 꽤 큰 문제죠.
-주인공이 타는 에델바이스 전차는 누가 봐도 3호 돌격포 G형에 티거 2 비슷한 포탑을 올린 물건입니다.
전차 등의 디자인에서도 티가 나지만, 설정만으로도 2차 대전을 아주 약간 바꿔놓은 것에 불과한 배경 설정은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습니다. 플롯 자체의 구성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아요. 개성 있는 등장인물도 있고, 복선도 있고, 반전도 있고, 배신도 있고, 갈등도 있고, 교훈도 있고, 수영복 입고 나오는 서비스씬까지 있죠. 있어야 할 건 다 있어요.
다만 그 모든 게 너무나도 얕다는 게 문제입니다. 꽤 넓지만 동시에 손가락 넣으면 바닥에 닿을 만큼 얕아요. 대사량은 엄청나게 많으나 딱히 기억에 남을 대사는 없고요, 캐릭터들의 개성은 설정상으로 존재하고 가끔씩 표현은 되지만 별 의미가 없으며, 복선은 너무 뻔해서 손발이 오그라들고 반전은 너무 예상하기 쉬우며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최종장의 반전은 그나마 좀 괜찮긴 합니다만, 그것도 마지막 보스를 마주치기 전까지의 이야기죠.
동시에 중요해야 할 심리적 갈등들은 참으로 간단히도 튀어나왔다가 간단히도 봉합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몇몇 장면에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바닥을 뒹굴면서 으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 정말로. 거기서 노래를 불러? 정말로? 우리는 서로를 믿으니까 그런 건 필요가 없어? 정말로? 정말로? 이에는 영문 성우(전 일본어를 못하니까요)의 미묘하게 어색한 연기와 미묘하게 어색한 번역(한글 패치가 있다는데 그냥 영문으로 돌렸습니다)도 한 몫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스토리는 좋게 평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 기타 잡설
원래 콘솔 게임이고 PC로 넘어오면서도 그리 크게 손본 건 없으니 인터페이스는 뭐 그저 그렇습니다. 패드로만 해서 마우스와 키보드로 조작하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별로 편하진 않을 것 같네요. 다만 왜 뭐 할 때마다 확인창이 뜨는가는 정말 큰 의문입니다. 하다못해 기지 화면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예 / 아니오 하고 창을 띄우는 이유가 뭘까요.
게임 음악 좋아하는 입장에서 음악 역시 꽤 괜찮군요.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전반적으로 일본쪽 게임 음악들은 서구쪽보다 좀 더 튀는 경향이 있다 싶습니다. 개성적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전자가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으니 게임 분위기에 의외로 잘 어울린다 싶은 그런 느낌이라면, 후자는 게임 특유의 분위기에 맞춰 나가는 데 치중하고 전면으로는 잘 나서지 않는 식이죠. 둘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사실, 완벽히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일본쪽 게임들은 추상적이고 시스템적인 접근법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 했었죠 아마. 장기가 그렇듯이 규칙을 만들고 이 규칙에 맞춰 게임이 굴러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걸 선호하는 것 같아요. 서구쪽에서 인기가 있는 RTS나 FPS는 반면 규칙이 있더라도 좀 더 직관적이며 가상현실적인 느낌이고, 플레이어의 체험을 중시하죠. 똑같이 전투를 묘사하더라도 장기와 전장의 발큐리아와 스타크래프트와 배틀필드는 서로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파이널 판타지 13은 여전히 전투시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어디 이상한 공간으로 날아가서 싸우지만 엘더 스크롤은 처음부터 1인칭으로 움직이며 버튼 누를 때마다 칼 휘두르는 식이라던가요.
이 역시 장단점이 있습니다. 다만 컴퓨터 성능이 부족하고 컨트롤러에 달린 거라곤 십자키에 A B 버튼밖에 없던 시절에라면 별 차이가 없겠지만,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득 보기 쉬운 건 후자라는 게 차이점이겠죠. 음악의 느낌이 다른 것 역시 체험과 경험이라는 이런 접근법상의 문제로 해석하면 어떨까...뭐 스토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대충 넘겨버리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총평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견딜 수 있다면, 혹은 더 나아가 이런 쪽 이야기가 취향이라면 꽤 좋아하실 수 있는 물건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좀 개인적 편견이 심하게 반영된 평가긴 합니다만 어쨌건 재밌게 해본 사람도 많고, 저도 꽤 재밌게 했듯이 상당히 괜찮은 게임인 건 사실입니다. 스토리는 마음에 안 들면 좀 길긴 해도 대충 넘기면 되고, 전투는 단점은 있으나 독특하고 재밌긴 하니까 말이죠. 국내에서는 스팀에서 판매를 막아놔서 아마존이나 구매대행으로 넘어가야 하는 게 좀 귀찮긴 하네요.
Our last, best hope for peace.
일본식 턴제 SRPG는 옛 향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제는 너무 구식이 되긴 했죠.
서양식 블록버스터 RPG들이 워낙 인기를 끌고 있고, 그러다보니 실시간성과 액션성과 타격감이 이제 기본이 되어버렸으니깐요.
그래도 일러스트는 꽤 잘 뽑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