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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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남의 아이디어를 티나게 베껴서 쓰는 글입니다.
그래도 클럽이 명색이 SF 사이트인데, 톰 갓윈의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을 읽어보신 분들이 많이 있으시겠죠.
안 읽어보셨다고요? 짧은 단편이니까 빨리 읽고 오세요.
http://cs.sungshin.ac.kr/~dkim/cold-equation.html
-제목의 차가운 방정식보다는 그 아래 작게 쓴 Other stories에 관심이 더 많은 표지인가 보네요.
읽고 돌아오셨다면 이제 스포일러로 넘어가도록 합시다.
인상깊은 단편입니다만, 무엇보다 기본적으로는 장르 SF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걸 생각해볼 만합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해 주인공 일행이 위기를 맞게 되면 현란한 과학 용어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는 SF에서 너무나도 흔한 전개죠. 단지 닥터 후처럼 마법 수준의 거짓말을 하던지 스타 트렉처럼 말 되는 듯 적당적당히 때우던지 더 마션처럼 진짜 열심히 말 되는 해결책을 찾으려 애쓰던지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헌데 차가운 방정식은 그 반대입니다. 멋모르고 우주선에 몰래 숨어탄 소녀를 계속 태우고 있다간 무게 초과로 목적지에 못 미쳐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조종사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거의 운명처럼 받아들이죠. 소녀 역시 빠르게 체념하기로는 마찬가지입니다. 극복하려는 노력조차 거의 하지 않고 의문조차 거의 던지지 않아요.
물론 이는 앞서 말한 클리세에 대한 반발로서 명확히 의도된 것입니다. 파일럿과 소녀의 감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차가운 방정식 -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변수도 허용하지 않는 물리 법칙과 극명히 대조되는 것과 동일하게 말이에요. 우주는 그 사람이 어리건 나이 들었건, 여자건 남자건, 그리고 그것이 작은 실수였건 의도된 행동이었건 신경 쓰지 않는 존재니까요. 차가운 방정식은 그냥 정해진 법칙에 따라 굴러갈 뿐이고, 이 두 등장인물은 그 사실을 깨닫고서는 포기합니다.
흥미로운 건 사실 톰 갓윈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고 편집장인 존 캠벨이 이상한 해법을 생각해내 해피 엔딩을 만들려고 할 때마다 퇴짜를 놓은 덕분에 결국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만...
아무튼, 그 덕분인지 이 단편은 과학적으로는 말이 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에 꾸준히 시달려 왔습니다.
-Pre-flight checklist. 비행기나 우주선이나 항상 출발 전에는 이렇게 긴 목록을 보면서 이것저것 점검을 합니다.
가령, 우주선 이함 전에 점검은 안 할까요? 화물칸에 뭐가 실려 있는지 보고 이상은 없는지 확인했어야 할 텐데 대충 숨어 있는 소녀 정도는 찾기 쉬웠을 것 같은데 말이죠. 게다가, 연료가 그렇게 적게 실려 있었고 우주선이 가벼웠다면 출발시 소녀의 무게로 인해 속도가 느려져 궤도가 틀어지거나 연료를 더 소모하는 게 티가 많이 났을 텐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소녀의 몸무게는 고작 50킬로그램에 불과합니다. 예비 연료가 얼마나 적게 실렸기에 50킬로그램의 추가 질량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던 건지, 아무리 급박한 임무였다지만 예비 연료를 그렇게 적게 투입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는 언제나 안전장치가 붙고 대책이 따라오는 게,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거든요. 설령 처음 궤도 계산이 정말로 정확해서 여분이 필요없었다고 쳐도, 대기가 있는 행성에 착륙할 예정이었으니 궤도 수정용이나 자세 제어용의 연료는 확실히 좀 더 실어줬여야겠죠.
또 무엇보다 한 사람이 몰래 숨어탈 수 있을 만큼 내부 공간이 넓은 우주선인데도 고작 50킬로그램의 추가 중량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죠. 그렇게 큰 우주선이었다면 뭔가 중량을 더 줄일 방법은 없었을까요?
밀항자를 방출하라는 규정을 조종사나 사령관 둘 다 쉽게 알고 있고. 우주선에 생체 감지기를 달고 조종사가 무기를 휴대하고 우주선에 탑승했다는 부분에 이르면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혼란스러워집니다. 밀항자가 꽤 흔한 일인데도, 그냥 에어록 밖으로 집어던지는 것 이외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니까 말이죠.
즉, 차가운 방정식은 확실히 좋은 주제와 메시지를 갖고는 있지만, 이야기 전개가 그걸 억지로 구현하기 위해 질질 끌려가면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입니다. 아마도 약간 더 손을 보면 좀 더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전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차가운 방정식은 인기 단편이니만큼 이후에 몇 차례 영상화가 되면서 이런 문제점을 고치려고도 했었죠.
가령 1989년 환상특급에서 영상화한 버전에서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조종사가 필요 없는 것들을 떼어내고 중량을 줄이려 애써 보았지만 우주선 자체가 워낙 가벼운데다 별다른 공구도 없는 덕에 필요 중량의 절반 정도밖에 떼어내지 못하죠.
또 싸이파이 채널에서 1996년에 단편 영화로 만들었을 때는 우주선의 여분 연료가 부족했던 이유가 윗선에서 비용 절감을 시켜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주제가 자연법칙 대 인간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바뀐다는 문제가 생기지만...
물론 이런 비판들은, 어쩌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이겨내는 전통적인 주인공상을 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역으로 그 덕분에 이 단편은 오늘날까지도 알려지게 되었지만 말이죠.
그럼, 결과적으로 차가운 방정식에는 해법이 있을까요? 원작의 전제를 바꾸지 않으면서 살아남는 기발한 방법을 누군가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소설이 나름 인기를 끈 이후 여러 사람들이 해결 방안들을 생각했었습니다. 개중에는 돈 세이커스(Don Sakers)가 1991년에 쓴 단편 차가운 해법(The Cold Solution)이 있죠.
그러니까 50킬로그램을 줄이기 위해 조종사와 소녀의 다리를 잘라 우주선 밖으로 던져버린다는 거죠.
결국, 차가운 방정식에 어울리는 건 차가운 해법일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Our last, best hope for peace.
어라, 이거랑 비슷한 소설을 읽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아니면 예전에 이걸 읽었는데, 까먹었나. 하긴 비좁은 우주선에서 보급품 때문에 생과 사를 가른다는 내용은 자주 쓰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런 소재를 써먹은 단편소설 중에 꽤 골 때린 게 <고스트의 기준>이었습니다. 냉혹하고 자비 없는 분위기는 거의 비슷한 듯.
그나저나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가서 동정심을 자극하는 방법도 많이들 쓰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녀의 죽음 중에서는 <타임머신>의 위나와 <화씨 451>의 클라리스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둘 다 디스토피아 내지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암울하고 잔인한 배경에 걸맞게 소녀를 희생양으로 삼는군요. 뭐, 소녀의 죽음을 내세우는 게 꼭 SF의 특징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SF 장르는 배경이 비일상적이라는 점에서 희생이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겠죠.
어느새 서른이 넘는 나이가 되었지만, 처음 '차가운 방정식'을 접했던 중학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 결말에는 뭔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것이 남자가 아닌 여자, 그것도 소녀여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차라리 주인공이 자기희생이라는 명목으로 죽었다면 납득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소녀라는 부분이 좀 걸리긴 했는데...번역시 girl의 어감을 제대로 못 살린 축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야 girl 하면 흔히 소녀라고 생각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좀 더 나이의 폭이 넓은 단어죠. 분위기를 보면 좀 더 어린 아이가 나와야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일단 여자의 몸무게가 좀 무거울 필요가 있고, 이야기 전개상 어리긴 해도 죽음의 개념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야 하니 연령이 좀 더 올라간 거라고 봐야겠죠.
원래 단편은 이야기의 완결성이 주는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연성이나 정합성은 차순위로 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러 그러기도 하죠. 그리고 그건 SF 뿐아니라 순수장르를 포함한 모든 장르의 단편에 똑같이 적용되죠(콩트의 얼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가령 차가운 방정식은 단순히 한 소녀에 대한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라 '한 인간은 하나의 우주'라는 '문학적 정서(=인간의 바람)'와, '우주는 우주'라는 '엄혹한 실제(=현실)'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죠. 당장 여기 달린 덧글들이 하나같이 해당 작품의 결말을 어떻게든 (부정이 아니라)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미 작품의 의도는 성공했다는 의미겠죠.
p.s 물론 해서는 안 되는 불평이라는 건 아니고, 그 보다는 그런 쌈싸먹은 부분을 아예 문학적 장치로 보는 것이 단편을 감상하는 기술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왕년에 "서울창작"에서 SF/팬터지 단편 중 괜찮은 것들을 골라 잇달아 출간하던 시절...
SF 앤솔러지 [환상특급]의 가장 앞머리에 실린 작품이 바로 <차가운 방정식>이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 저는 그 조종사가 고지식하여 다른 답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침 <차가운 방정식>을 읽을 당시 저는 김용의 <녹정기>를 같이 읽고 있었는데,
융통성이 있는 위소보라면 괜찮을 답을 구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좀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