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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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습니다. 과연 "1984"와 더불어 디스토피아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데엔 다 이유가 있더군요. "멋진 신세계"에서 국민들은 난교적인 성관계와 4D영화(?), 마약, 골프 등에 빠져 생각하지 않는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거기에다 태어나기 전 태아상태에 가하는 조작과 수면 암시 교육, 어렸을 때의 훈련으로 정권에 순응하는 태도가 아예 무의식내까지 박혀버리니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은 계급제도를 비롯한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에 불평하지 않고,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20세기 초반에 유전자 조작, 4D(?)영화, 국가가 나눠주는 합법적인 마약 같은 걸 생각한 올더스 헉슬리의 상상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멋진 신세계"를 다 읽고 보니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더군요. 과연 레니나 크라운은 죽었을까? 레니나가 야만인 존에게 채찍을 맞게 된 후의 운명은 소설에선 나와있지 않습니다. 존이 자신의 몸과 레니나를 채찍으로 때리는 동안 그 둘을 지켜보는 알파계급 어느 누구도 말릴 생각을 안하고, 존의 행동에 빠져들어 서로 자신들을 때린다는 대목 이후엔 레니나가 어떻게 되었는 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레니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여부는 작품의 내용에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존이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다는 거고 결국 그의 자살로 이끌게 된 거죠. 그래도 책장을 덮으면서 내심 과연 레니나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게 궁금하더군요.
한편으론 레니나와 존과의 관계가 비극적이기 짝이 없다고 생각되네요.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고 무의식 단계에서 배워오고 난교관계가 바람직하고 일부일처제는 구시대의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자라온 레니나의 사고방식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존은 그런 레니나를 매춘부라 하지만 레니나는 존의 그런 반응을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죠. 레니나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도 존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레니나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대로 존에게 접근 한 건데 그것이 좌절되고 오히려 존에게 실컷 채찍으로 얻어맞게 되니..레니나가 작품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고 나름 감정이입하다 보니 레니나와 존의 관계가 안타깝더군요. 게다가 서로가 처음에 호감을 갖고있었는 데 결말이 그렇게 되버리니...(특히 존은 처음엔 레니나를 천사처럼 여기고 그녀에게 흠뻑 빠져 온갖 미사여구로 그녀를 묘사하기까지 했죠)
자신의 어머니가 일부일처제의 사회(구시대적 사회)에서 적응 못하고 린치를 받아온 걸 본 존에겐 레니나의 행동이 자신의 어머니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를 일깨워줬기에 존의 그런 반응도 이해못가는 건 아닙니다.
어쨋든 레니나와 존의 관계가 파탄나는 게 너무 안타까운지라 레니나가 과연 죽었을 지 살았을 지 더욱 궁금하네요.
밤새도록 채찍질 당했으면 죽었을 가능성이 크겠지만요...
레니나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실은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은 꽤 무시무시한 내용을 다루고 있을 때도
의외로 작가가 직접 묘사하는 수위가 그렇게 강하지는 않게 넘어가는 편입니다.
헉슬리는 아주 비관적인 내용을 다룰 때도, 주인공은 살려두고 전체를 목격하게 합니다.
비극을 대하면서도 의외로 초연하게 비극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특징이죠.
<멋진 신세계>의 마지막 대목도 그러하고, <금지된 섬>에서 유토피아가 짓밟히는 대목도 그렇습니다.
다른 작가와는 달리 감정적인 묘사를 하면서도 관조하는 톤을 유지하는 게 매우 특이한 데,
올더스 헉슬리가 젊은 시절 아주 심한 눈병으로 앓고 맹인이 되어 고생했던 경험이
나중에 작가가 되어 글을 쓸 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젊은 시절 눈병 때문에 본래 지망했던 의학/생물학 공부를 중도포기하고
맹인이 되어 점자로 공부를 하다가 뒤늦게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작가가 된 사람입니다.
헉슬리 집안이 워낙에 의학/생물학 쪽에서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 대단한 명문가이고
(조부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동료 연구자, 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생물학상 수상)
최신 의술을 직접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간신히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면 그냥 평생 맹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겠죠.
<멋진 신세계>에서 레니나의 운명은 불투명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린치를 당하는 정도만 묘사되어 있지, 그 결과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1984>의 경우 주인공 윈스턴이 "빅 브라더를 사랑하면서" 총을 맞는 마지막 대목을 읽노라면,
아마도 줄리아 역시 윈스턴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요.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쓴 뒤 27년 후 에세이 <다시 가 본 멋진 신세계>를 씁니다.
<다시 가 본 멋진 신세계>는 소설 <멋진 신세계>의 속편에 해당하는 글이 아니고,
<멋진 신세계>가 얻은 반응, 유사한 다른 작가의 책들, 세상의 변화를 함께 조망하면서
사회 변화와 <멋진 신세계>의 내용을 대비시켜가면서 의견을 기술한 진지한 에세이입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레니나의 운명같은 것은 작가가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의 작중 인물들의 삶과 행동에 대해 썼던 것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할 뿐이고,
세상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 작품의 목표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죠.
역시나 올더스 헉슬리다운 생각이라고나 할까요.
- 자신이 쓴 작품과 작중 인물에 대해서도 관조적인 시각을 보이니까요.
헨리 포드가 거의 구세주 수준으로 나오죠. 책을 읽고, (에디슨이랑 싸잡아서) 포드를 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자동 공정과 노동자 복지 문제로 이런저런 말이 많은 사람이지만….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 포드를 신격화한 게 퍽 어울리더군요. 일반적으로 디스토피아 사회의 우상은 가상 인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요.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가 행복하게 끝나는 작품들도 많습니다만. <멋진 신세계>는 그런 책이 아니었죠. 야만인 존은 결코 사회에 어울릴 수 없는 아웃사이더였고, 레니나는 절대 사회 체계를 부정하지 않을 인사이더였고요. 가만히 보면, 디스토피아 문학에는 꼭 주인공을 뒤흔드는 여성 캐릭터가 나옵니다. <우리들>에 나오는 I-330, <1984>에 나오는 줄리아, <화씨 451>에 나오는 클라리스가 그렇죠. 다만, 이들은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아웃사이더 계열인데, 레니나는 인사이더 계열이죠. 애초에 서로 엮일 수가 없는 사이라서 그런지, 야만인 존의 결말이 참 먹먹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레니나는 안 죽었을 것 같습니다. 야만인 존이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일을 회상하는데, 그건 살인이 아니었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육체적 욕구를 풀었다 어쨌다고 언급합니다. 물론 시체에다가 그 짓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두 사람이 떡방아를 찧은 다음에 헤어졌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합니다. 그 다음에 몰려든 기사들도 살인자를 인터뷰하는 기색은 아니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