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링커 1979년 - 작가 - 요한(windkju)
글 수 29
와륜
7
제레미의 다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인력’의 이끌림으로 창밖을 자주 바라보았지만, 그의 인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인력과 착각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양 리는 아직 제레미가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아직 중국을 헤매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는 곧 결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벌써 일주일째, 이제 한주만 더 있으면 비행선이 떠오른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요셉은 양 리를 의심하며 늘 그를 추궁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 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요셉은 제레미를 유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가두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잘 모른다. 제레미와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비행선이 떠오르기 하루 전, 도망치는 겁니다. 그리고 제레미를 찾아 몽골로 떠나는 거지요.」
요셉이 말했다. 나는 그의 생각에 찬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들려왔다. 심장 소리처럼 들려오는 그 소리가 내속에서 들리는 것인지 밖에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무거워서 두려울 지경이었다.
제레미도 이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다.
며칠 뒤. 양 리는 좋은 소식을 알려왔다.
「비적때들은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덕분에 추적이 쉬워졌습니다. 그들의 비행선은 어디에서도 눈에 잘 띄니까요. 아마도 그들은 독일에서 네오나치와 접선을 할 모양입니다.」
니나를 찾을 수 있다. 유럽으로 갔다면 훨씬 일이 수월해진다. 유럽의 경찰력을 동원한다면 네오나치의 패거리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과연 여자 한명을 찾기 위해 경찰력이 움직여줄까. 이때까지도 위험존재이면서 네오나치를 건드리지 않은 것은, 비밀리 움직이는 조직이기에 섣불리 건드리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니나의 존재마저 그림자속으로 숨어버린다면......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요셉은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데 기쁜 모양이었다.
「니나도 곧 올겁니다. 우리는 몽골로 가면 되겠군요.」
「네. 그리고 또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혐의가 없는 바.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떠나셔도 됩니다. 하지만 어디 묵을데가 없으시면 일단 저희집에 머무르는게 나을 겁니다. 이 시기의 중국에는 범죄도 그만큼 많으니까요.」
요셉은 기쁨의 탄성을 지른 뒤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면 굳이 떠날 이유는 없었다. 자유롭게 나가서 제레미를 찾을 수도 있었다.
「폐가 안된다면 머무르도록 하지요.」
「별 말씀을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행운을 빌며, 저는 사무를 보러 가보겠습니다. 아래의 민경에게도 미리 알려두었으니 그저 나가셔도 괜찮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양 리는 그런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양 리가 나간 후, 잠시 여유를 보던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계획에 대해 말했다.
「아무래도 유인책일까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제레미와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레미를 유인하기 위해 우리를 풀어준다는 것은 좀 어거지라고 봅니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양 리를 피해 제레미와 접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 겠군요. 내일 쯤 두명이 같이 나가서 따로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인력으로 제레미를 찾는 거구요.」
요셉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제레미를 믿을 수 있을까요? 라는 말이 입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약을 먹은 드미트리를 죽인 것은 제레미였다. 그리고 나도 약을 먹었다. 나는 제레미가 드미트리를 죽인 것뿐만 아니라 먹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체를 통해 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오히려 제레미가 나를 죽이기 위한 유인책이 아닐까?
나를 죽이기 위해서.
-잡아먹으러 간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요셉은 공모자의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8.
아침 나절 우중충하던 하늘은 마침내 비를 뿌렸다. 동당거리는 빗방울 소리에 축제의 피리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인간의 축제가 끝나고 자연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살이 많은 중국식 우산을 펼친 요셉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우리는 삼거리에서 헤어졌다. 비에 젖은 홍등거리를 지나고나자 큰길이 나왔다. 조용하게 젖어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우산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많은 인력거가 빗속을 달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우산과 짚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간간히 증기탑이 보였다. 수도인 북경마저 증기탑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개화가 덜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 리의 말이 맞았다. 중국은 개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새로운 나라였다.
마음의 이끌림을 따라 길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기 위해 꼼꼼히 기억하며 걷다보니 걸음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나를 쫓는 사람이 있을까해서 가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쫓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마 나를 쫓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마찬가지이겠지.
큰길은 의식하지 못한 새에 다시 좁은 길로 바뀌었다. 마치 골목길같은 느낌에 적잖이 당황해야 했다. 천을 널어놓은 듯한 골목길 아래에서는 빗소리도 잦아들었다. 흙길과 도로가 번갈아가며 이어져 갔다. 그러나 막다른 길은 없었다. 아주 좁은 틈새길도 있었기에 가끔은 우산을 접어야만 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나는 시야가 갑자기 크게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
가장 처음 든 생각은 광활하다. 라는 것이었다. 도시한가운데에 펼쳐진 광장은 광활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절로 탄식음이 나왔다. 빗방울이 장막처럼 여기저기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광장의 광활함은 충격적이었다. 둥글게 펼쳐져 있음이 분명한 광장이었지만, 너무 넓은 나머지 경계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위에서 본것이 아님에도 내 모습이 개미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개미들이 바글거리며 길을 지나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그 개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광장의 끝에 어디서든 보일 만한 건물이 서 있었다.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가 산다는 성이었다. 커다랗게 솟아있는 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였다. 그 주위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그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이 경도되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힘이었다. 이런 건물을 지은 것은.
-곧 잡아먹으러 간다-
두근거림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위대한 건물을 바라본 마음의 동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인력의 방향은 정확히 나를 이끌었다. 제레미. 그가 저곳에 있었다. 굳건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곳은 들어갈 수 없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10여분을 넘게 걸어서야 문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대한 성벽에 어울리게 문의 크기도 일반인이 열수 있는 크기의 문이 아니었다. 거인이나 되어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장식인 모양으로 옆에 조그만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본래 많은지, 내가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그들은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제레미가 이 성벽안에 있다. 어째서 그가 이 안에 있을까. 나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분명히 안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한참을 성벽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인력거 두 대가 급하게 달려왔다. 때마침이라고 할정도로 절묘한 순간이었다. 인력거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앞에 멈춰섰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를 가리는 장막이 치워졌을때, 나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산을 펼쳐드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중국고유의 변발을 하고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양 리. 그였다.
9.
양 리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우산을 펼쳐들고 뒤편의 인력거로 걸어갔다. 나는 그가 왜 황궁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경찰이 황궁에 들어갈 일이 있을까? 그리고 황궁안에 제레미가 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그런 생각은 새로운 인물이 나왔을때 모조리 잊혀져 버렸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두근. 하는 심장의 울림이 증기기관처럼 가열차게 뛰기 시작했다. 금발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눈에 박힐듯이 심어졌다. 그의 눈짓이 성벽을 향할때도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무엇이라고 할까. 그래. 경외심. 경외감이었다. 그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를 가지고 싶었다. 소유하고 싶었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의 몸짓. 그의 손짓. 그의 눈빛 모두 그를 닮고 싶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금발의 벽안인 그는 순수하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분위기를 위해서인지 중국전통복장을 차려입은 그는 유려한 몸가짐으로 인력거에서 내렸다. 양 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에게 우산을 씌웠다.
머릿속에 벌떼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빗소리가 후두둑 하고 들려왔다. 우산을 두드리는 음률 너머로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걸어왔다. 그를 호위하던 양 리는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몇 발자국 앞. 그가 멈춰섰다.
「안녕.」
섬세한 목소리.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비하면 나의 목소리는 까마귀의 우짖음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도저히 그의 앞에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는 얼어붙어 있는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어루만졌다. 마치 빗방울을 주조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빗소리를 즐기고 있는거야? 아니면......」
그의 음색이 갑자기 낮아졌다.
「나를 만나러 온거야?」
두근.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모든 소리가 멈춰진 것만 같다. 그러나 머릿속을 울리는 웅웅대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한켠이 아려왔다. 나는 심장을 뜯어낼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나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환한 미소에 빛이 비칠것만 같다.
「너는 참 재미있구나.」
-널 잡아먹으러 간다-
두근. 그의 목소리 너머로 이명처럼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함께 가겠어?」
-널 잡아먹으러 간다-
두근.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에 다가갔다. 그와 손끝이 맛닿을 것만 같다. 망설임이 들었다. 손가락끝을 슬며시 당겼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에게 물어왔다.
「재미있을꺼야. 같이 가자.」
-널 잡아먹으러 간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양 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카엘님.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속히 황궁에 드셔야 합니다.」
두근.
그 순간 나는 공간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이름을 알아버렸다. 미카엘. 누리살의 생존자. 새로운 히틀러. 999명을 잡아먹은 살인마. 그는 그런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존재였다. 마치 신이 존재한다면.......아니 악마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내가 손을 끌어당기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자, 미카엘은 싫증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랜만에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너 때문에 망쳐버렸잖아.」
-널 잡아먹으러 간다-
미카엘은 짐짓 짜증난다는 듯 양 리를 바라보고는 손사래를 치듯 양 리를 후려쳤다. 아주 가벼운 손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양 리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몇발자국 물러났다. 고개를 든 양 리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시끄러워. 거기 너희들.」
미카엘은 도열한 병사들을 손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마치 황제처럼 미카엘은 병사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더니 나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를 잡아.」
「안돼!」
나는 도망갈 새도 없이 붙잡혀버렸다. 도망치려고 발버둥친 탓에 나는 바닥에 엎어진채 병사들에 의해 짓눌리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자, 미카엘이 천천히 걸어와 무릎을 굽히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찔한 아름다움에 눈을 찡그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 약을 먹었구나. 그렇지? 너에게서 인력의 방향이 느껴져. 그래도 넌 재미난 녀석이니까 천천히 먹어줄게. 일단 마지막 유실자를 먹고 말이지.」
그렇게 말한 그는 일어섰다. 그에 따라 병사들도 나를 일으켰다. 그는 행복한 목소리로 손벽을 치며 소리쳤다.
「자 그럼 미래를 열러 가볼까?」
어린아이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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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업중..
그리고...
축하해주세요
완결했습니다.
7
제레미의 다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인력’의 이끌림으로 창밖을 자주 바라보았지만, 그의 인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인력과 착각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양 리는 아직 제레미가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아직 중국을 헤매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는 곧 결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벌써 일주일째, 이제 한주만 더 있으면 비행선이 떠오른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요셉은 양 리를 의심하며 늘 그를 추궁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 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요셉은 제레미를 유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가두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잘 모른다. 제레미와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비행선이 떠오르기 하루 전, 도망치는 겁니다. 그리고 제레미를 찾아 몽골로 떠나는 거지요.」
요셉이 말했다. 나는 그의 생각에 찬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들려왔다. 심장 소리처럼 들려오는 그 소리가 내속에서 들리는 것인지 밖에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무거워서 두려울 지경이었다.
제레미도 이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다.
며칠 뒤. 양 리는 좋은 소식을 알려왔다.
「비적때들은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덕분에 추적이 쉬워졌습니다. 그들의 비행선은 어디에서도 눈에 잘 띄니까요. 아마도 그들은 독일에서 네오나치와 접선을 할 모양입니다.」
니나를 찾을 수 있다. 유럽으로 갔다면 훨씬 일이 수월해진다. 유럽의 경찰력을 동원한다면 네오나치의 패거리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과연 여자 한명을 찾기 위해 경찰력이 움직여줄까. 이때까지도 위험존재이면서 네오나치를 건드리지 않은 것은, 비밀리 움직이는 조직이기에 섣불리 건드리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니나의 존재마저 그림자속으로 숨어버린다면......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요셉은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데 기쁜 모양이었다.
「니나도 곧 올겁니다. 우리는 몽골로 가면 되겠군요.」
「네. 그리고 또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혐의가 없는 바.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떠나셔도 됩니다. 하지만 어디 묵을데가 없으시면 일단 저희집에 머무르는게 나을 겁니다. 이 시기의 중국에는 범죄도 그만큼 많으니까요.」
요셉은 기쁨의 탄성을 지른 뒤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면 굳이 떠날 이유는 없었다. 자유롭게 나가서 제레미를 찾을 수도 있었다.
「폐가 안된다면 머무르도록 하지요.」
「별 말씀을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행운을 빌며, 저는 사무를 보러 가보겠습니다. 아래의 민경에게도 미리 알려두었으니 그저 나가셔도 괜찮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양 리는 그런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양 리가 나간 후, 잠시 여유를 보던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계획에 대해 말했다.
「아무래도 유인책일까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제레미와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레미를 유인하기 위해 우리를 풀어준다는 것은 좀 어거지라고 봅니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양 리를 피해 제레미와 접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 겠군요. 내일 쯤 두명이 같이 나가서 따로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인력으로 제레미를 찾는 거구요.」
요셉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제레미를 믿을 수 있을까요? 라는 말이 입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약을 먹은 드미트리를 죽인 것은 제레미였다. 그리고 나도 약을 먹었다. 나는 제레미가 드미트리를 죽인 것뿐만 아니라 먹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체를 통해 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오히려 제레미가 나를 죽이기 위한 유인책이 아닐까?
나를 죽이기 위해서.
-잡아먹으러 간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요셉은 공모자의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8.
아침 나절 우중충하던 하늘은 마침내 비를 뿌렸다. 동당거리는 빗방울 소리에 축제의 피리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인간의 축제가 끝나고 자연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살이 많은 중국식 우산을 펼친 요셉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우리는 삼거리에서 헤어졌다. 비에 젖은 홍등거리를 지나고나자 큰길이 나왔다. 조용하게 젖어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우산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많은 인력거가 빗속을 달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우산과 짚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간간히 증기탑이 보였다. 수도인 북경마저 증기탑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개화가 덜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 리의 말이 맞았다. 중국은 개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새로운 나라였다.
마음의 이끌림을 따라 길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기 위해 꼼꼼히 기억하며 걷다보니 걸음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나를 쫓는 사람이 있을까해서 가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쫓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마 나를 쫓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마찬가지이겠지.
큰길은 의식하지 못한 새에 다시 좁은 길로 바뀌었다. 마치 골목길같은 느낌에 적잖이 당황해야 했다. 천을 널어놓은 듯한 골목길 아래에서는 빗소리도 잦아들었다. 흙길과 도로가 번갈아가며 이어져 갔다. 그러나 막다른 길은 없었다. 아주 좁은 틈새길도 있었기에 가끔은 우산을 접어야만 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나는 시야가 갑자기 크게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
가장 처음 든 생각은 광활하다. 라는 것이었다. 도시한가운데에 펼쳐진 광장은 광활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절로 탄식음이 나왔다. 빗방울이 장막처럼 여기저기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광장의 광활함은 충격적이었다. 둥글게 펼쳐져 있음이 분명한 광장이었지만, 너무 넓은 나머지 경계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위에서 본것이 아님에도 내 모습이 개미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개미들이 바글거리며 길을 지나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그 개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광장의 끝에 어디서든 보일 만한 건물이 서 있었다.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가 산다는 성이었다. 커다랗게 솟아있는 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였다. 그 주위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그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이 경도되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힘이었다. 이런 건물을 지은 것은.
-곧 잡아먹으러 간다-
두근거림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위대한 건물을 바라본 마음의 동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인력의 방향은 정확히 나를 이끌었다. 제레미. 그가 저곳에 있었다. 굳건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곳은 들어갈 수 없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10여분을 넘게 걸어서야 문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대한 성벽에 어울리게 문의 크기도 일반인이 열수 있는 크기의 문이 아니었다. 거인이나 되어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장식인 모양으로 옆에 조그만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본래 많은지, 내가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그들은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제레미가 이 성벽안에 있다. 어째서 그가 이 안에 있을까. 나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분명히 안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한참을 성벽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인력거 두 대가 급하게 달려왔다. 때마침이라고 할정도로 절묘한 순간이었다. 인력거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앞에 멈춰섰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를 가리는 장막이 치워졌을때, 나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산을 펼쳐드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중국고유의 변발을 하고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양 리. 그였다.
9.
양 리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우산을 펼쳐들고 뒤편의 인력거로 걸어갔다. 나는 그가 왜 황궁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경찰이 황궁에 들어갈 일이 있을까? 그리고 황궁안에 제레미가 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그런 생각은 새로운 인물이 나왔을때 모조리 잊혀져 버렸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두근. 하는 심장의 울림이 증기기관처럼 가열차게 뛰기 시작했다. 금발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눈에 박힐듯이 심어졌다. 그의 눈짓이 성벽을 향할때도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무엇이라고 할까. 그래. 경외심. 경외감이었다. 그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를 가지고 싶었다. 소유하고 싶었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의 몸짓. 그의 손짓. 그의 눈빛 모두 그를 닮고 싶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금발의 벽안인 그는 순수하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분위기를 위해서인지 중국전통복장을 차려입은 그는 유려한 몸가짐으로 인력거에서 내렸다. 양 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에게 우산을 씌웠다.
머릿속에 벌떼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빗소리가 후두둑 하고 들려왔다. 우산을 두드리는 음률 너머로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걸어왔다. 그를 호위하던 양 리는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몇 발자국 앞. 그가 멈춰섰다.
「안녕.」
섬세한 목소리.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비하면 나의 목소리는 까마귀의 우짖음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도저히 그의 앞에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는 얼어붙어 있는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어루만졌다. 마치 빗방울을 주조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빗소리를 즐기고 있는거야? 아니면......」
그의 음색이 갑자기 낮아졌다.
「나를 만나러 온거야?」
두근.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모든 소리가 멈춰진 것만 같다. 그러나 머릿속을 울리는 웅웅대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한켠이 아려왔다. 나는 심장을 뜯어낼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나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환한 미소에 빛이 비칠것만 같다.
「너는 참 재미있구나.」
-널 잡아먹으러 간다-
두근. 그의 목소리 너머로 이명처럼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함께 가겠어?」
-널 잡아먹으러 간다-
두근.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에 다가갔다. 그와 손끝이 맛닿을 것만 같다. 망설임이 들었다. 손가락끝을 슬며시 당겼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에게 물어왔다.
「재미있을꺼야. 같이 가자.」
-널 잡아먹으러 간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양 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카엘님.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속히 황궁에 드셔야 합니다.」
두근.
그 순간 나는 공간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이름을 알아버렸다. 미카엘. 누리살의 생존자. 새로운 히틀러. 999명을 잡아먹은 살인마. 그는 그런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존재였다. 마치 신이 존재한다면.......아니 악마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내가 손을 끌어당기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자, 미카엘은 싫증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랜만에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너 때문에 망쳐버렸잖아.」
-널 잡아먹으러 간다-
미카엘은 짐짓 짜증난다는 듯 양 리를 바라보고는 손사래를 치듯 양 리를 후려쳤다. 아주 가벼운 손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양 리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몇발자국 물러났다. 고개를 든 양 리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시끄러워. 거기 너희들.」
미카엘은 도열한 병사들을 손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마치 황제처럼 미카엘은 병사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더니 나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를 잡아.」
「안돼!」
나는 도망갈 새도 없이 붙잡혀버렸다. 도망치려고 발버둥친 탓에 나는 바닥에 엎어진채 병사들에 의해 짓눌리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자, 미카엘이 천천히 걸어와 무릎을 굽히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찔한 아름다움에 눈을 찡그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 약을 먹었구나. 그렇지? 너에게서 인력의 방향이 느껴져. 그래도 넌 재미난 녀석이니까 천천히 먹어줄게. 일단 마지막 유실자를 먹고 말이지.」
그렇게 말한 그는 일어섰다. 그에 따라 병사들도 나를 일으켰다. 그는 행복한 목소리로 손벽을 치며 소리쳤다.
「자 그럼 미래를 열러 가볼까?」
어린아이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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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업중..
그리고...
축하해주세요
완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