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링커 1979년 - 작가 - 요한(windkju)
글 수 29
링커
21.
그녀는 드레스 위로 숄을 걸쳤다. 바들거리는 손의 움직임은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니라 경악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한동안 숄 끝자락을 매만지다가 문득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다. 그녀는 손가락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어서 말해. 어떻게 그 약을 구한거지? 뺐었나? 훔쳤어? 아니.......왜 약을 먹은거지? 네가 어째서.」
아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링마스터인 그녀가 그 약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왜 제레미를 쫓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왜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했다.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퍽. 주먹이 날아왔다. 배를 맞은 탓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포핀스의 주먹에는 가감이 없었다.「대답을 잘해야 할꺼야.」라고 하는 그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있었다. 링마스터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마! 그 약은 여분이 얼마 없었어. 어떻게 그 약을 구할 수 있었던 거지? 설마......유실자에게서 받았나?」
「유실자?」
「그 찢어죽일 도망자들 말이야! 그 녀석들만, 그 녀석들만 아니었다면 원대한 계획이 이미 완성되었을......아. 설마 그렇게 된 거였나?」
그녀의 표정이 찰라 얼음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키득거리는 작은 웃음에서 곧 폭소가 되었다. 얼음조각이 부서져버릴까 걱정될 정도로 웃어제끼던 그녀는 시작처럼 갑작스럽게 웃음을 그쳤다. 여전히 웃음의 잔재가 남아있는 입가로 그녀가 말했다.
「유인책이었군.」
「.......」
「오. 놀라워. 누가 나치차일드 아니랄까봐. 궁한 가운데서도 영악한 머리를 굴렸군. 하하. 그래. 내가 쫓아올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곧 깨달았다. 유인책. 링마스터는 제레미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링마스터의 추적수단이 그 약을 먹은 사람을 추적하는 것이기에, 나를 유인책으로 썼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인 것일까?
순간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나. 그러나 딱히 어느쪽도 아닌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분지을 수 없었다.
나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연신 제레미의 행동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못 쫓아올거라 생각했단 말이지. 아니 알면서, 시간을 끌려고 했던건가? 상관없지. 어차피 손바닥 안인데 도망칠 수 있을거라 여겼다니......날 무시해도 유분수지. 좋아. 그랬단 말이지.」
그녀에게 있어, 유인책을 쓴 것보다 자신을 무시한 것이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관심밖인 듯 하다. 나무에 온몸이 엉킨채 무시를 당하고 있자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제발 이 나무만은 어떻게 해주었으면. 발목부터 어깨까지 길게 뻗어있는 나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후우.」
나뭇가지에 뻗어있는 자그만 입사귀 하나가 코를 간질이는 통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 행동을 본 포핀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짓이냐.」
「이 나뭇가지 때문에.......」
「너란 녀석은......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거냐? 널 이대로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고작 생각하는 게 그런것이냐?」
포핀스의 말이 맞았다. 나뭇가지에 신경 쓸 재간이 아니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제서야 그녀도 나의 상태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무가 만든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링마스터는 손을 내밀어 나무를 쓰다듬었다. 애무하듯 나무를 매만지던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 나무에서 피어난 꽃가지 같다. 그리고 그녀는 감정을 고르며 물어왔다.
「조슈라고 했던가. 재미있는 남자로군. 어때? 포핀스. 난 처음 보았을때부터 이 자에게서 그의 모습을 떠올렸어. 닮지 않았어?」
「아가씨......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분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포핀스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링마스터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진한 제비꽃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녀의 눈에 나의 모습이 비쳐졌을 때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분명 닮았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머나먼 기억을 더듬으며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뒤에서 포핀스가 슬며시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망설이던 그는 그녀의 숄을 목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목숨을 바쳐서 미래를 산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포핀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조슈.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다른 어떤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어느덧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순식간에 급변하는 그녀의 감정에 대응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 급격한 변화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아. 그는 늘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야. 넌 그가 아니구나. 그래. 그랬지.......」
「아가씨.」
포핀스가 말했다. 링마스터는 다가오는 포핀스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그녀의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꿈과 생명을 맞바꾼다면 그것은 괜찮은 교환일까?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꿈이라고 해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뿐인 생명을 소비할 수 있을까? 난 공감할 수 없었어. 지금도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지. 그런데 그는 그렇게 했어. 그리고 죽어버렸지. 그토록 말렸는데 말이야.」
‘목숨을 바쳐서 미래를 산다’
그녀의 말에는 깊은 수렁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하지만 슬픈 감정만은 가슴에 닿았다. 나의 머나먼 심장에 슬픔 하나가 콕하고 박혀버린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서 슬픈 빛이 사라지고 점점 일그러진 미소가 자라났다. 미소라고 불리기에도 부적합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는 앙주먹을 쥐었다. 나무를 부술듯 내리쳤다.
「그를 보고 싶어. 알아? 무슨 말인지?.」
그녀의 말에 나는 한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수께끼의 소녀. 놀랍게도......니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링마스터의 반지 하나가 눈 가득히 들어왔다. 붉은 빛이 도는 섬세한 반지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내밀어 나의 눈 가까이에 내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시야는 그 반지로 모조리 가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당신을 죽여도 되겠지?」
화염이 뿜어나왔다.
22.
가장 먼저 짙은 먼지 냄새가 떠오른다. 다음으로는 미지근한 물의 감촉을 느낀다. 그 물 속에서 나는 끝없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증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소리같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래서는 실패인지, 성공인지 알 수가 없군.」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실패입니다.
「아니지. 내가 원하는 것은 완전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정도면 성공이겠지.」
아니요.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실패입니다. 당신은 실패했어요.
「그래. 마침내 성공했어.」
그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성공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껏 떨리고 있었다. 무슨 감정에 비교해야 할까. 그래. 혐오감. 그것은 혐오감이었다. 나는 그것에 공감했다. 혐오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둬야 할까.」
제발. 그대로 죽여버리세요. 그것을 살려두면 안됩니다.
「그래. 그건 너의 선택에 맡겨야겠다.」
가혹합니다. 나는 그런 선택은 하지 못합니다.
「언제든 나를 찾아와라. 그녀라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는 알아서 살아라. 앞으로는 너의 자유다. 모든 것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가혹합니다. 잔인한 자유라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이대로 버려두면 난 어떻게 살아가라는 겁니까.
「알겠지? 나의 피노키오.」
제발. 죽여버리세요. 제발......
23.
「하아!」
숨이 터져나왔다. 모든 생명이 처음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숨을 터뜨렸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멈추지마. 계속 숨을 쉬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가 나를 계속 다급하게 불렀다. 누구인것일까. 눈을 뜰수 없었다. 주위는 모두 어둠에 휩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따스한 손길이 다가왔다. 그 손길은 나의 얼굴을 쓸었다. 나는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어떤 것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새까맣게 타버린 조각들이 벗겨지자 눈이 부셨다. 마치 처음보는 세상처럼. 희게 번뜩이는 시선이 곧 초점을 되찾았다. 나는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나. 그녀였다.
「니나......」
「일어날 수 있겠어? 우리는 빨리 움직여야 해.」
「니나 나는......」
「괜찮아. 나도 알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억나고 말았다. 기억저편에 자물쇠를 채워두고 잊어두었던 가라앉은 기억. 쓴 기억. 아픈 기억. 그것이 떠올라 버리고 말았다. 나는 격한 숨을 몰아쉬며 니나를 끌어앉았다. 니나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니나. 니나......」
「그래. 조슈. 떠올라버리고 말았구나. 괜찮아. 괜찮아.」
「나는......크흑.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안겨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을리 없는 마음이었지만 그녀에게 안겨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정말로 괜찮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떠올라버리고 만 것일까.
「미안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것입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자 니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된거야......‘창조의알’이 그를 살렸어.」
「니나......아니에요. 전 죽었어요. 아니 살아있던 적도......큭. 없었.......흐흑.」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를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산 적도 없으니까. 그래서 도망쳐야 했다. 결혼식이 다가올 수록 초조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약혼도 했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창조의알‘이 필요했던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의 끝에는 늘 좌절만이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했다.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은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떠올라버리고 만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제발. 제발.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난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야. 넌 살아있어.」
니나의 말은 따뜻했다. 그녀의 품도, 그녀의 마음도. 나에게 전해져왔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슬펐다. 나에게도 온기가 있을까. 나에게도 인간의 온기가 있을까.
「아아아아!」
오열했다. 그녀는 나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격한 울음으로 들려진 나의 눈에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얼어붙은 툰드라의 대기를 가르며 그것이 날아가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선체는 중력을 뿌리치며 허공을 갈랐다. 분명 차가운 바람이 선측을 찢을듯 불어오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프로펠러가 선미에서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구름처럼 날아가는 비행선. 전에 타본 적이 있던 그것이었다.
「네오나치의 비행선이야. 링마스터가 다시 돌아왔어.」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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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챕터 링커 편 끝났습니다.
내일부터는 2챕터 폐곡선 편이 시작됩니다. ^^;;;
21.
그녀는 드레스 위로 숄을 걸쳤다. 바들거리는 손의 움직임은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니라 경악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한동안 숄 끝자락을 매만지다가 문득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다. 그녀는 손가락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어서 말해. 어떻게 그 약을 구한거지? 뺐었나? 훔쳤어? 아니.......왜 약을 먹은거지? 네가 어째서.」
아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링마스터인 그녀가 그 약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왜 제레미를 쫓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왜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했다.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퍽. 주먹이 날아왔다. 배를 맞은 탓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포핀스의 주먹에는 가감이 없었다.「대답을 잘해야 할꺼야.」라고 하는 그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있었다. 링마스터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마! 그 약은 여분이 얼마 없었어. 어떻게 그 약을 구할 수 있었던 거지? 설마......유실자에게서 받았나?」
「유실자?」
「그 찢어죽일 도망자들 말이야! 그 녀석들만, 그 녀석들만 아니었다면 원대한 계획이 이미 완성되었을......아. 설마 그렇게 된 거였나?」
그녀의 표정이 찰라 얼음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키득거리는 작은 웃음에서 곧 폭소가 되었다. 얼음조각이 부서져버릴까 걱정될 정도로 웃어제끼던 그녀는 시작처럼 갑작스럽게 웃음을 그쳤다. 여전히 웃음의 잔재가 남아있는 입가로 그녀가 말했다.
「유인책이었군.」
「.......」
「오. 놀라워. 누가 나치차일드 아니랄까봐. 궁한 가운데서도 영악한 머리를 굴렸군. 하하. 그래. 내가 쫓아올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곧 깨달았다. 유인책. 링마스터는 제레미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링마스터의 추적수단이 그 약을 먹은 사람을 추적하는 것이기에, 나를 유인책으로 썼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인 것일까?
순간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나. 그러나 딱히 어느쪽도 아닌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분지을 수 없었다.
나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연신 제레미의 행동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못 쫓아올거라 생각했단 말이지. 아니 알면서, 시간을 끌려고 했던건가? 상관없지. 어차피 손바닥 안인데 도망칠 수 있을거라 여겼다니......날 무시해도 유분수지. 좋아. 그랬단 말이지.」
그녀에게 있어, 유인책을 쓴 것보다 자신을 무시한 것이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관심밖인 듯 하다. 나무에 온몸이 엉킨채 무시를 당하고 있자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제발 이 나무만은 어떻게 해주었으면. 발목부터 어깨까지 길게 뻗어있는 나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후우.」
나뭇가지에 뻗어있는 자그만 입사귀 하나가 코를 간질이는 통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 행동을 본 포핀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짓이냐.」
「이 나뭇가지 때문에.......」
「너란 녀석은......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거냐? 널 이대로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고작 생각하는 게 그런것이냐?」
포핀스의 말이 맞았다. 나뭇가지에 신경 쓸 재간이 아니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제서야 그녀도 나의 상태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무가 만든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링마스터는 손을 내밀어 나무를 쓰다듬었다. 애무하듯 나무를 매만지던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 나무에서 피어난 꽃가지 같다. 그리고 그녀는 감정을 고르며 물어왔다.
「조슈라고 했던가. 재미있는 남자로군. 어때? 포핀스. 난 처음 보았을때부터 이 자에게서 그의 모습을 떠올렸어. 닮지 않았어?」
「아가씨......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분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포핀스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링마스터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진한 제비꽃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녀의 눈에 나의 모습이 비쳐졌을 때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분명 닮았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머나먼 기억을 더듬으며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뒤에서 포핀스가 슬며시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망설이던 그는 그녀의 숄을 목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목숨을 바쳐서 미래를 산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포핀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조슈.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다른 어떤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어느덧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순식간에 급변하는 그녀의 감정에 대응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 급격한 변화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아. 그는 늘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야. 넌 그가 아니구나. 그래. 그랬지.......」
「아가씨.」
포핀스가 말했다. 링마스터는 다가오는 포핀스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그녀의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꿈과 생명을 맞바꾼다면 그것은 괜찮은 교환일까?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꿈이라고 해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뿐인 생명을 소비할 수 있을까? 난 공감할 수 없었어. 지금도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지. 그런데 그는 그렇게 했어. 그리고 죽어버렸지. 그토록 말렸는데 말이야.」
‘목숨을 바쳐서 미래를 산다’
그녀의 말에는 깊은 수렁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하지만 슬픈 감정만은 가슴에 닿았다. 나의 머나먼 심장에 슬픔 하나가 콕하고 박혀버린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서 슬픈 빛이 사라지고 점점 일그러진 미소가 자라났다. 미소라고 불리기에도 부적합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는 앙주먹을 쥐었다. 나무를 부술듯 내리쳤다.
「그를 보고 싶어. 알아? 무슨 말인지?.」
그녀의 말에 나는 한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수께끼의 소녀. 놀랍게도......니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링마스터의 반지 하나가 눈 가득히 들어왔다. 붉은 빛이 도는 섬세한 반지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내밀어 나의 눈 가까이에 내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시야는 그 반지로 모조리 가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당신을 죽여도 되겠지?」
화염이 뿜어나왔다.
22.
가장 먼저 짙은 먼지 냄새가 떠오른다. 다음으로는 미지근한 물의 감촉을 느낀다. 그 물 속에서 나는 끝없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증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소리같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래서는 실패인지, 성공인지 알 수가 없군.」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실패입니다.
「아니지. 내가 원하는 것은 완전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정도면 성공이겠지.」
아니요.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실패입니다. 당신은 실패했어요.
「그래. 마침내 성공했어.」
그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성공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껏 떨리고 있었다. 무슨 감정에 비교해야 할까. 그래. 혐오감. 그것은 혐오감이었다. 나는 그것에 공감했다. 혐오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둬야 할까.」
제발. 그대로 죽여버리세요. 그것을 살려두면 안됩니다.
「그래. 그건 너의 선택에 맡겨야겠다.」
가혹합니다. 나는 그런 선택은 하지 못합니다.
「언제든 나를 찾아와라. 그녀라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는 알아서 살아라. 앞으로는 너의 자유다. 모든 것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가혹합니다. 잔인한 자유라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이대로 버려두면 난 어떻게 살아가라는 겁니까.
「알겠지? 나의 피노키오.」
제발. 죽여버리세요. 제발......
23.
「하아!」
숨이 터져나왔다. 모든 생명이 처음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숨을 터뜨렸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멈추지마. 계속 숨을 쉬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가 나를 계속 다급하게 불렀다. 누구인것일까. 눈을 뜰수 없었다. 주위는 모두 어둠에 휩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따스한 손길이 다가왔다. 그 손길은 나의 얼굴을 쓸었다. 나는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어떤 것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새까맣게 타버린 조각들이 벗겨지자 눈이 부셨다. 마치 처음보는 세상처럼. 희게 번뜩이는 시선이 곧 초점을 되찾았다. 나는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나. 그녀였다.
「니나......」
「일어날 수 있겠어? 우리는 빨리 움직여야 해.」
「니나 나는......」
「괜찮아. 나도 알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억나고 말았다. 기억저편에 자물쇠를 채워두고 잊어두었던 가라앉은 기억. 쓴 기억. 아픈 기억. 그것이 떠올라 버리고 말았다. 나는 격한 숨을 몰아쉬며 니나를 끌어앉았다. 니나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니나. 니나......」
「그래. 조슈. 떠올라버리고 말았구나. 괜찮아. 괜찮아.」
「나는......크흑.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안겨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을리 없는 마음이었지만 그녀에게 안겨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정말로 괜찮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떠올라버리고 만 것일까.
「미안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것입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자 니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된거야......‘창조의알’이 그를 살렸어.」
「니나......아니에요. 전 죽었어요. 아니 살아있던 적도......큭. 없었.......흐흑.」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를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산 적도 없으니까. 그래서 도망쳐야 했다. 결혼식이 다가올 수록 초조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약혼도 했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창조의알‘이 필요했던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의 끝에는 늘 좌절만이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했다.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은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떠올라버리고 만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제발. 제발.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난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야. 넌 살아있어.」
니나의 말은 따뜻했다. 그녀의 품도, 그녀의 마음도. 나에게 전해져왔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슬펐다. 나에게도 온기가 있을까. 나에게도 인간의 온기가 있을까.
「아아아아!」
오열했다. 그녀는 나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격한 울음으로 들려진 나의 눈에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얼어붙은 툰드라의 대기를 가르며 그것이 날아가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선체는 중력을 뿌리치며 허공을 갈랐다. 분명 차가운 바람이 선측을 찢을듯 불어오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프로펠러가 선미에서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구름처럼 날아가는 비행선. 전에 타본 적이 있던 그것이었다.
「네오나치의 비행선이야. 링마스터가 다시 돌아왔어.」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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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챕터 링커 편 끝났습니다.
내일부터는 2챕터 폐곡선 편이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