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 폭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명상을 했지만... 명상이 끝난 직후부터 오늘까지. 약 사흘이 넘는 기간동안 평소의 여섯배가 넘는 전투가 벌어졌다. 언제나 흑마법사들과 원한관계에 있던 백마사들을 필두로 하여, 녹마사, 청마사, 심지어는 같은 흑마법사에 평소에는 전쟁을 걸어 올 염두도 못 내던 적마사들까지...



이를 예상하고 모든 국력을 좀비 생산에 돌렸을 뿐 아니라, 여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희생 제의'까지 걸어 가며 병력 증강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내는 부질없는 발악이었을 뿐. 사흘간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투는 급조된 병력만으로 막을 수 있을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초반에는 그럭저럭 방어가 가능하던 것이, 점차 피해가 누적됨에도 불구하고 병력 복구는 커녕 전쟁에 쓸 공격 마법에 필요한 마나의 충전마저도 여의치 않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자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는 양상을 보였다.



"크아악!"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한줌의 재가 되어 쓰러지는 공포의 기사. 레벨 17의 최상위급 영웅이었기에 얼마 전에 막대한 겔드를 들여 영입했건만... 결국 연이은 전투끝에 살해되고 말았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은색의 갑옷과 암흑의 오러(Aura)도 절대적인 힘에 의해 갈가리 찢겨 재로 변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젠장! 죽이려면 좀 저레벨의 영웅을 죽이던가, 아니면 최소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계약하는 놈들을 죽이란 말이다! 들어온 지 일주일도 채 안된, 그것도 가장 비싼 영웅을 죽여버리면 어쩌란 거냐!"



나는 울분을 토하며 공포의 기사를 덮친 불꽃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을 온몸에 붙인 채 나를 마주 노려보는... 새대가리.



"하하... 너무 그러지 말라구. 피닉스는 본능적으로 악을 파괴하는 새야. 아무래도 가장 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상대를 우선적으로 공격하게 마련이지"



빌어먹을 새대가리 뒤에서 슬금슬금 나타나는, 한층 더 빌어먹을 마법사... 이번 전투의 원흉, '끊임없는 성장의 숲'의 주인, 라피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긴 금발에 흰 살결. 그리고 길다란 귀.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놈 생긴 것과 성격으로 종합해 봐서는 엘프와 마황자의 혼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간만이군.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말이야."

"이봐, 마스터 'N', 너무 그러지 말라구. 우리 사이에 말이야."

"큭. 이, 이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하지 말란 말이다! 뭐가 '우리 사이'냐, 뭐가!"

"벌써 잊은 건가? 네가 새로 연구한 '화염의 칼날' 마법을 시험해본다면서 내 숲을 엄청나게 태워버렸잖아. 그정도면 충분히 친밀한 사이지, 안그런가?"



젠장, 속좁은 놈 같으니라구. 도대체 언제적 일을 끄집어내서 들고 나오는 거야? 분명 이놈 부모중 하나는 틀림없이 마족이라니까...



"끊임없이 성장하는 숲의 주인답지 않게 속좁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아크메이지 연대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일을 지금까지 품고 있었단 말인가?"

"닥쳐!"



갑자기 화를 내는 라피스놈. 아크메이지가 화를 내자 그에게 조종받는 피닉스들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선 차칫 잘못하면 피닉스의 버스팅 화이어로 인해 너나할 것 없이 재로 변해버릴텐데...



"네놈이 뭘 알아! 자식처럼 길러온 나무들이 단번에 재가 되어 쓰러지는것을 당해본 적이나 있어? 수많은 내 동족들,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들까지도 모두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다 불타버렸다! 그것도, 단순히 마법 실험을 하겠다며 덤벼든 한 미치광이 때문에 말이다! 그런 일을... 그런 끔찍한 일을 내가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내 영토에다가 화염의 칼날을 시전하리? 그랬다간 정말로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지. 화염계 마법을 실험해 보는 것이니 불에 타기 딱 좋은 나무들이 많은 곳에서 시전하는 게 당연하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피스 녀석을 더 흥분시켰다가는 내 코앞에서 폭발 직전인 피닉스가 진짜로 자폭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기로 했다.



"아, 알았어. 진정하라구, 진정.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라피스도 지금 피닉스가 버스팅을 했다간 그 불안정성으로 인해 피닉스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몽땅 타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원래 내 마음같아선 네놈과 나, 둘중에 하나가 이 테라에서 소멸할 때까지 싸우고 싶지만... 나는 원래 파괴를 극도로 혐오하는 종족. 평화적으로 해결 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피는 보고싶지 않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새로 뽑아놓은 좀비의 삼분지 일을 홀라당 태워놓고도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네가 전에 불태운 땅과, 그 때 사라진 모든 생명들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녹지 400에이커를 보상해라!"

"4,400?!"



농담이 아니야! 400에이커면 뼈빠지게 개척을 해도 한참을 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땅이란 말이다! 이자식이 정말...



"라피스..."

"왜?"

"400에이커라는 땅을 요구하기엔 네가 끌고 온 병력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나? 물론 피닉스는 강력한 존재임에는 틀림 없지만, 지금 있는 숫자만으로 나를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렇다. 피닉스는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자연적인 존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몰라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정도의 병력만으로는 400에이커라는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



"이봐, 이봐... 흑마법사들이 자신의 영지에 그다지 애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주위를 잘 둘러보라구. 언제부터 저곳에 저런 숲이 자라기 시작했는지 기억 나나?"

"숲? 설마?"



분명히, 라피스가 가리킨 곳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숲이 자라나 있었다.



"바로 그 설마다."



트리언트. 그 무식한 나무들... 어지간한 공격은 모두 몸으로 받아내며, 나무 뿌리로 적을 얽어매고, 나뭇가지로 적을 휘어 감는다. 그들에게 한번 붙잡힌 생물은 그대로 땅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결국 트리언트의 재활용 에너지로 변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 보이는 저 나무들은...



"식물 생장까지 걸어놨군 그래."

"아, 그건 내 친한 샤먼 친구의 도움이 컸지. 어때, 400에이커 정도는 충분히 숲으로 만들고도 남을 트리언트 아닌가?"

"네놈이 그러고도 평화를 사랑한다는 숲의 종족이냐..."

"훗, 가끔씩은 나무도 시체를 비료로 쓸 때도 있는 법이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전투를 치뤄야 할 상대는 라피스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적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 일반적으로 싸워서 이길지 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소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원하나?"

"잘 생각했네, 마스터 'N'. 자네의 사죄의 마음을 받아들여 내가 그 죽음의 땅을 훌륭한 숲으로 가꾸어놓도록 하지."

"헛소리는 그만해. 어느쪽 땅을 원하냐고 했다."

"음, 글쎄..."



라피스의 손에 들린 수정 지팡이를 통해 마법 영상이 나타났다. 철저히도 준비했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어때, 불만은 없겠지?"

"불만이 있다면, 받아줄건가?"

"하하하, 물론 아니지"



욕심도 많은 놈. 가장 비옥한 지역을 쏙 골라놨군. 녀석은 만족한 웃음을 띄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언제 한번 들르라구, 멋진 꽃밭을 보여줄테니까."



나는 라피스의 병력이 서서히 철수하는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좋아, 그 웃음이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보자구. 나는 라피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곧이어 재정 관리 담당인 상인,Chantiel Drystan을 불렀다.



"드리스탄."

"네, 마스터..."

"기름병을 준비해"

"네? 설마?"

"라피스놈이 불러낸 피닉스는 다시 정령 차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피닉스만 없다면 트리언트 따위와는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마스터는 벌써 영토 이전의 계약을 끝내신 것 아닙니까?"

"계약서 따위, 쓰지 않았다."

"아크메이지 사이에서는 말만으로도 충분한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아는데요. 구두로 맺은 계약이라도 파기하면 그에 상응하는 인과율이 작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훗. 난 어느 곳을 원하냐고 했지, 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잔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기름병을 준비해라."

"네, 네..."



드리스탄이 가져온 기름병을 깨트리자 뿌연 기름의 안개가 쏟아져 나와 라피스의 트리언트 부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점화 준비는 끝났군. 저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라피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짓이야! 땅을 넘겨준다고 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준다고는 안했어. 어딜 원하냐고 했을 뿐."

"이, 이 악마같은 놈!"

"그것 참 듣기 거북하군, 난 악마는 아니라구. 그저 네크로맨서일 뿐이지."

"좋아, 피닉스가 사라졌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본데,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텔레포트!"



텔레포트를 이용해 순식산에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 라피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기름병에서 흘러 나온 마법의 기름은 안개가 되어 녀석의 트리언트를 충분히 적셔놓았다.



"총 공격! 모두 불태워 버려라!"



좀비와 구울로 이루어진 언데드 군단이 트리언트가 이루고 있는 숲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받아라! 파이어 볼!"



내 손 위에서 뭉치기 시작한, 이글거리는 불의 공. 비록 크기는 조그마한 파이어볼이지만 내 마법 레벨이 레벨인 만큼, 온도 하나는 장난 아니게 뜨거운 마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불타는 마법의 구가 기름에 적신 나무 조각들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성공이군. 라피스, 올 겨울엔 좀 춥겠어. 땔깜을 미리 다 태워버려서 말이야."



크기는 작지만 초고온의 파이어 볼. 분명 점화용으로는 안성 맞춤이다. 그런데...



"이럴수가! 저것은?!"



트리언트 무리의 한가운데를 향해 곧바로 날아가던 파이어볼은 크게 선회를 하더니, 끝내 엉뚱한 곳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스펠 로어! 저자식, 샤먼뿐만이 아니라 현자까지 데리고 왔었군."



그제서야 나는 라피스의 묘한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트리언트와 좀비의, 힘의 대결. 저쪽에 피닉스가 없는 이상 지지는 않겠지만 이긴다 하더라도 병력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안돼... 빨리, 가능한 한 빨리 끝내지 않으면.."



'빨리 이 전투를 끝내지 않으면 이겨도 이긴 싸움이 아니게 된다.'



트리언트로 인해 비료가 되어가는 좀비들을 보며 다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언데드 군단 또한 라피스의 트리언트를 조각조각내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승리는 분명했지만... 비료가 되어버리는 언데드가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비료가 되는 언데드가 많으면 많을수록 다음 전투에서 패배할 확률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파이어볼만 명중시킬 수 있어도..."



그러나 이는 부질없는 생각일 뿐. 스펠 로어, 즉 마법 흘리기의 기술을 가진 상위 현자가 저족에 있다면 마법을 이용한 불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젠장, 자연 발화라도 일어나주면 좋을텐데!"



내가 중얼거린 순간.



"화르륵!"



트리언트 부대의 뒷편에서 갑자기 거센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 좋았어! 어찌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이 붙었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까지 붙은 트리언트는 이제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쳐라! 단번에 끝내버려!"



실제로, 질질 끌게될 것 같았던 전투는 단번에 종결되고 있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나무는 어디까지나 나무일 뿐. 라피스가 끌고 온 거대한 숲은 거의 다 재로 변하고 라피스 자신도 허둥지둥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안됐네, 라피스. 미안하지만 자네가 구경시켜주겠다던 꽃밭은 당분간 보기 힘들 것 같군.크크크.."



허겁지겁 텔레포트를 해서 전장을 빠져나가는 라피스를 보내며 한 말이었다. 그러나...



잠시동안 내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은, 라피스가 텔레포트한 언덕 뒤에서부터 솟아올라오는 거대한 생명체로 인해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군... 내가 던진 파이어볼이 살아 남아서 불을 붙인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100피트가 넘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그리고 그런 거대한 몸집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며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테라 최대의 재앙, 레드 드래곤이 내 영토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