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 하나가 갑자기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작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수면이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확산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랄만한 사실이다.



따라서 다가브 시의 최연소 웨이트리스에게서 시작된, 이른바 '수면증'은 쿠와르 행성 전체를 경악시키고 있었다. 그날 저녁 뉴스가 방송될 때는 이미 저항력이 약한 어린아이들을 시작으로 다가브 전체 인구의 약 60% 이상이 수면증의 피해를 입었으며, 그 범위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3~4시간 이내로 전 인구의 80% 이상이 수면증에 감염될 것으로 보이며, 다가브 시는 오늘중으로 모든 업무가 마비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자, 그러면 다시 한번 이 수면증에 설명해주시죠, 박사님?"

"에.. 강력한 수면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물질은 많습니다만, 이번에 미르 사에서 취한 방법은 좀 독특한 형식입니다. 즉, 식량에 특수 중금속을 합성시켜 만들고 이것을 체내에 축적시켰다가 만약의 경우에는 오늘처럼 2차 독소를 뿌려 수면증을 유발한다는 거죠. 각각의 화합물은 모두가 인체에 무해하고, 원소 질량도 작아 정화 필터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선진국에서는 2중 독소는 물론 3차 화합물과 같은 유해물질도 모두 체크하기 때문에 안전하지만, 쿠와르 행성과 같이 비교적 식품 검열기준이 열악한 곳에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겠죠.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이틀정도만 푹 자게 만들어도 전쟁에서 이기기엔 충분하니까요."

"그렇다면 미르는 왜 개전 초기에 이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국제사회의 비난과, 미르 사의 식품들이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서였을 겁니다. 아무리 검열을 통과한 안전한 식품이라고 해도, 일단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가격이 떨어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지금은 갤럭시 로테이션 병력도 다 철수한 상태고, 게다가 행성 통신위성은 미르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니까, 행성 점령이 끝난 후에는 철저하게 언론 통제를 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죠."

"네, 그렇군요. 하지만 수면증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닐텐데요?"

"물론 고급 정화필터나 산소발생기를 사용하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가능합니다만... 아하아아암... 불행히도 우리 쿠와르 행성엔... 그런 시설이... 쿠울..."

"아, 그러면 여기서 잠시 마이크를 넘겨 해방전선... 사령부로... 연락을... 하아암..."



고개를 숙이는 아나운서를 감추려는 듯이 화면이 황급히 바뀌며 집단 수면실로 변해버린 방어 통제센터를 비추었고, 카림은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코를 골며 자고있는 해방전선의 지휘관들을 보며 말했다.



"미르사의 입장에서도 그냥 물러서지는 못하겠다는 거군요."

"음. 미르는 어디까지나 원주민 착취를 통한 식량 대량 생산을 통해 이윤을 만들어내는 회사니까. 쿠와르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미르 산하 전 행성에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나저나 언론 통제라... 그게 가능한건가요?"

"불가능하지는 않아. 요즘엔 국가 통신위성이 유일한 통신망인 경우가 거의 없기때문에 상당히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쿠와르 행성이 바로 그 흔치않은 케이스니까. 쿠와르 해방전선이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르 사의 비인도적인 노동력 착취 기술은 통신검열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든. 그러니 확실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겠지. 뭐, 어디까지나 쿠와르 행성의 민간 정보통신망이 약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만."

"하지만 그마져도 물건너 가버렸겠군요."

"그렇지. 내가 있으니까 말이야."



라제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쓴 기사를 스캐너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본사에 송신 완료. 결국 미르는 국제적으로 물 먹게 된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상당히 위험해지겠는데요. 분명히 미르에서도 쿠와르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생각 못한 건 아닐텐데요. 재수 없으면 끌려가서 세뇌당할 수도 있다구요."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에.. 하지만 이건 조심해서 피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카림은 풀이 죽은 채로 가리킨 창 밖의 하늘에는 이미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한 미르의 전투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스타 파이터에 대항하는 대공사격이 펼쳐졌지만 도시는 전반적으로 '잠들어'있었고, 미르 사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가죠.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잡히겠어요."

"하지만.. 상처, 괜찮겠어?"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이니까요. 파워 슈츠를 입으면 좀 낫겠죠. 자, 다른 짐은 내버려두고 빨리 뜨자구요."

"아, 하지만 통신장비는..."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이 행성을 탈출할 거잖아요. 나머지 기사는 뉴로다이브 본사에 직접 갖다주라구요!"



카림은 라제스의 손을 끌어당기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미 거리는 흰색 제복을 입은 미르 사의 병력들이 쏟아져 나오며 완전한 점령을 시작하고 있었다.



"쳇. 안좋아.. 아주 안좋다구."



재빨리 파워슈츠를 걸친 카림이었지만, 온라인 모드로 들어서자마자 뜨는 '부스터 완파, 장갑 손실률 30%'라는 디스플레이는 충분히 좌절시키고도 남을 멘트였다. 게다가 상대는 미르 사의 정규군. 아무리 군사력이 약한 미르라고 하더라도 세력 67위의 거대 성간국가의 군대인만큼 쿠와르 해방군과는 격이 다르다.



"어쩌지? 차라리 그냥 항복할까? 이미 기사는 다 보내놨으니 기억조작을 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저야 상관없지만.. 라제스는 뉴로다이브 기자니까 그냥 세뇌정도로 안 끝날걸요. 뉴로다이브에서 역추적으로 뇌 스캔을 하면 조작된 기억정도는 금방 복구시킬 수 있을테고, 더 중요한건 미르 역시 이 사실을 알고있다는 거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다시 햇빛보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넌 참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표정하나 안 바꾸고 잘도 하는구나."

"어라? 제 표정이 보여요? 헤드셋에 가려서 안보일텐데?"

"뻔하지. 네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자, 자... 농담은 그만하고. 일단 어떻게 다가브 시를 빠져나갈지부터 생각하는게 좋겠네요. 도시 외곽지역으로 빠져나갈수만 있다면 탈출용 수송선과 접촉할 수 있을테니까요."

"좋아.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미르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느냐일텐데..."

"강행돌파. 그 방법밖에 없어요."

"에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경계선은 더 강화될테니까. 아직 포위망 구축이 완료되지 않은 지금 치고나가는 수밖에 없거든요. 자, 준비됐죠?"

"주, 준비라니?"

"좋아요, 갑니다!"

"자, 잠까아안!"



카림은 라제스의 비명소리에는 아랑곳하지않고 손목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고, 당연히 미르 사의 경계병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정지! 정지하지 않으면.."

"어쩔건데?"



대답과 함께 날아온 한줄기 광선이 병사의 상반신을 관통하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뉴트럴 컴퍼니? 젠장, 용병인가! 일단 모두 후퇴해! 뒤는 전차에게 맡기라구!"



카림의 파워슈츠에 새겨진 마크를 알아본 장교가 소리치자 바리케이트를 지키고 있던 다른 병사들 역시 황급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그 빈자리를 메꾸듯이 소형 전차가 밀고 들어왔다.



"쳇. 역시 상황판단이 빠르네... 이래서 정규군은 상대하기 껄끄럽다니까..."

"저.. 카림? 우리를 겨냥하는 것 같은데... 저 전차 주포."

"그렇겠죠. 우리 말고는 마땅히 다른 표적도 없으니."

"파워슈츠의 장갑이 전차의 직격탄도 막아낼 수 있어?"

"아뇨. 아무리 운이 좋더라도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무사하기 힘들죠. 뼈와 내장이 골고루 섞일테니까."

"그렇다면..."



'어쨰서 그렇게 여유만만이냐'라고 말하려던 라제스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을 노려보던 전차의 주포가 포성을 울리며 포탄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꽂히는데도,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포탄의 궤적과, 이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이십여년간의 지난 생애를 바라보며 라제스는 '이것이 주마등이라는 건가'라는 심각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파워슈츠의 어깨부분에 달려있던 원통형의 물체가 회전하며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몇미터 앞부분에서는 투명한 진동형 파장으로 형성된 벽이 만들어졌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던 105mm 전차의 주포는 그 파장을 통과하며 대부분의 속도를 잃어버렸고, 카림은 비실비실 떨어지는 포탄을 그대로 걷어차며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이, 이건?"

"에너지 쉴드예요. 이것때문에 무장도 변변칞은 가디언 타입이 이렇게 비싸지만, 그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해주죠."



의뢰인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해주며 사격을 하는, 영업자세로는 훌륭하지만 사격자세로는 매우 불성실한 그 태도에도 불구하고 오차의 상당부분을 자동으로 보정해주는 최고급 라이플의 도움에 힘입어 전차의 전면 장갑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클러스터 미사일 한발. 어찌보면 미사일이라고 불러주기도 미안한, 겨우 주먹크기의 조그만 물체가 날아가더니 전차의 앞부분에서 폭발했고, 마치 아이들 폭죽과도 같은 조그만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러나 그 조그만 불꽃이 닿는 부분은 그대로 구멍이 뻥뻥 뚫리며 녹아버렸고, 이미 장갑의 대부분을 손실한 채 기본 차체만 남아있던 전차 역시 빗방울 떨어진 자국 패이듯 구멍이 뚫리며 고온의 파편을 전차 내부에 흩뿌렸다.



"자, 이제 몇분정도는 여유가 있을테니 빨리 도망치자구요."



전차의 연료와 탄약이 폭발하며 주변 빌딩까지 삼키는 대형 화재로 이어지는 광경을 뒤로 한채, 카림은 라제스를 거의 들쳐메다시피 하며 황급히 후퇴를 시작했다.



"일차 경계선 정도는 어떻게든 뛰어넘었지만, 중형 전차나 스타 파이터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이런 빈약한 무장의 파워슈츠로는 대응하기 힘드니까요."

"빈약한 무장? 이게?"

"가디언 타입은 어디까지나 주요인사 보호용이라구요. 하다못해 헤비 어썰트 타입 정도만 되었어도 저런 선발대 쯤, 싹 쓸어버리는건 문제도 아닌데.."

"미안하게 됐네요. 내가 그렇게 고급 장비를 렌탈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아니라서."

"뭐, 할 수 없죠. 어디까지나 일이니까요."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시집도 안 간 처녀를 꼴사납게 옆구리에 끼고 갈꺼야?"

"좀 기다려요. 보통 인간의 몸으로는.."



갑자기 카림이 라제스를 끌어안으며 옆 건물로 뛰어들자마자, 아슬아슬한 차이로 그들이 서있던 자리가 기관포탄에 의해 깨지며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서는 반사신경이 따라주지 않는다구요."

"그, 그렇구나.."



출입문을 부수며 서로 껴안고 쓰러진 상태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기에, 카림은 쏜살같이 일어나며 윗층으로 올라갔고, 라제스 역시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어째서 올라가는 거야?"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일단 반격은 하고 가야죠!"



2층으로 올라간 카림은 곧바로 창 밖을 향해 남아있던 클러스터 미사일을 아낌없이 날렸고, 사라진 목표물을 찾기위해 저공비행을 감행하던 무장 헬리콥터는 거의 무방비의 상태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불의 비를 맞아야 했다.



처음에는 로터가 발악하듯 돌아가며 클러스터 폭탄의 불꽃을 튕겨냈지만 그것도 잠시, 견딜 수 있는 온도의 한계를 넘어선 로터가 녹기 시작하자 헬리콥터는 급격하게 중심을 잃고 도로 위로 추락해버렸다.



"나이스! 이렇게 잡아놓으면 적들도 일단 경계를 하면서 서서히 접근하거든요. 그 사이에 우리는 도망치면.."

"카림, 위험!"



당당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자랑하던 카림은, 그녀의 놀란 표정에 의아해하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또 한대의 헬리콥터. 기관포가 회전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황급하게 총구를 들어올렸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태였다.



"빌어먹을. 미르의 녀석들은 항상 윙맨이 붙어다닌다는 사실을 깜빡했어."



신음처럼 내뱉는 중얼거림을 묻어버리며 기관포의 귀를 찢는듯한 소음이 건물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