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멘션 홀.



인간의 머리로 정의내린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절대적인 힘은 자신의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잘게 부수어 씹어먹으며 몸부림쳤다. 수많은 폭발을 양념으로 갤럭시 로테이션의 순양함 두척을 삼킨 디멘션 홀은 도시 외곽의 모래와 대다수의 전함을 섞어서 디저트로 빨아들인 후에야 만족했다는 듯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초현실적인 위력에 짓눌려 망연자실하게 텅빈 하늘을 바라보는 초라한 모습의 사람들 뿐.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환희의 함성,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비명과 함께 다시 사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보유한 화력을 전부 쏟아붓는 쿠와르 해방군. 그리고 그들에게 뒷다리를 물려 절름거리며 도망치는 갤럭시 로테이션 함대(이제는 함대라고 불러주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의 패잔병들이었지만)의 상황은 바로 십여분 전까지만해도 양쪽의 입장이 정반대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라제스의 관심은 이미 이 전쟁의 결과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오르비탈 캐논이 움직인다니, 믿을 수가 없어! 그것도 2세대 오르비탈 캐논이 말이야. 이 사실은 그야말로 앞으로의 전쟁사에 거대한 하나의 획을 그을만한 중대한 사건이라구!"



그녀는 흥분에 겨워 환성을 지르며 쉴새없이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 오르비탈 캐논을 촬영하고 있었다.



"확실히 오르비탈 캐논이 움직인다니.. 믿기 힘든 일이네요."

"뭐야, 그 반응은. 좀더 마음껏 놀라도 된다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무기가 갖고있는 의미는 움직이지 않던 것이 움직인다는... 그 정도가 아니야, 지금까지 계속되던 함대 중심의 우주전이, 이제는 지상전으로 그 중요도가 되돌아온다는 거라구."

"헤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아니야. 생각해봐, 어떤 소행성이라도 오르비탈 캐논 한두대만으로 행성 위성궤도의 방어가 가능하다면, 이제 함대의 역할은 기껏해야 공역의 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앞으로는 오르비탈 캐논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의 지상군 물량공세만이 행성을 점령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겠지."

"그, 그렇게 들으니까 마치 우리가 역사의 중요한 한장면을 보고있는듯한 느낌이 드네요."

"맞았어.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건 전투의 배경이 다시 지상으로 넘어오는 역사의 한 장면이야."



라제스가 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전투를 감상하며 감동적인 어조로 말하자, 카림이 약간은 불안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라제스. 이제 우리도 슬슬 자리를 떠야할텐데요. 저런 '역사적인' 신무기를 촬영했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쿠와르 해방군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걸요."

"조금만 더 있다가. 저거, 봐. 오르비탈 캐논이 다시 분리되기 시작했다구. 저걸 못 찍으면..."

"어이, 거기! 당신들 뭐하는 건가?"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니까'라며 투덜대는 카림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7~8명 정도의 군인들이 모래언덕 저편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황색의 사막형 위장복을 입고 손에는 구식 소총을 든, 전형적인 쿠와르 해방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중 가장 계급이 높아보이는 사내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는 통제구역이다.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게다가 파워슈츠로 무장하고 있다니 쿠와르 인은 아닌 모양인데... 일단 모두 연행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너명의 군인들이 총으로 카림을 경계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카림, 어, 어쩌지?"

"그러게 왠지 빨리 돌아가고 싶더라니... 뭐, 이것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 후우..."



길게 내쉰 카림의 한숨소리가 스피커의 필터링을 거치며 파워슈츠의 시동음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중얼거림. 그러나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은 어조의 그 혼잣말을 들은 쿠와르 해방군의 병사들은 마치 얼어붙는듯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어떻게, 내가 입고 있는 것이 파워슈츠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지 그정도 숫자의 보병만으로 '연행'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거지? 아무리 쿠와르 해방군이 파워슈츠를 운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고는 해도, 이 갑옷이 어떤 물건인지 최소한의 교육도 안시킨다는 건가? 것 참 이상하네.. 나중에 본사로 돌아가면 이곳의 전투 교범을 한번 구해보기라도 해야겠어..."

"뭐, 뭐야, 지금 그 말은! 반항하겠다는 건가?"

"반항?"



끝이 약간 올라가는 어투로 카림이 되묻고, 그와 동시에 뒷쪽에서 약간은 방심하고 있던 무전병의 머리가 단번에 녹아내렸다. 처음엔 뭔가가 번쩍하고 사라진 것에 의아해하던 다른 병사들은 자신의 등뒤에서 흘러나오는,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를 느끼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림은 어느새 꺼내든 저격용 광학 라이플의 가열된 총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동네에서는 '반항'이라는 단어가 '일방적으로 전멸시킨다'는 뜻인가?"

"이자식! 사격개시!"



병사들의 총구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연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앞의 목표에 대한 사격. 당연히 백여발에 이르는 탄환은 하나도 남김없이 초당 800m이상의 속도로 파워슈츠에 명중하며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를 냈다. 하지만 단지 그 뿐.



"어, 어떻게 이럴...!"



그 요란한 사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1차 장갑의 코팅만 약간 벗겨진 파워슈츠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어투로 중얼거리던 쿠와르 해방군의 병사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며 쓰러져야만 했다.



"말했잖아? 일방적으로 전멸시킨다고."

"으아아아! 후퇴! 전원 후퇴!"

"늦었어."



무미건조한 카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끝나버렸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카림과 라제스, 그리고 한결같이 몸 어딘가에 매끈하게 녹아내린 지름 15cm가량의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진 여덟구의 시체뿐이었다.



"자, 라제스. 일단 정찰병들은 처리했지만 이제 잠시 후면....?"



라이플을 집어넣고 라제스에게 말을 걸던 카림은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물을 보며 의아해했다.



"어, 어이... 라제스... 설마 '너무해! 죽이지 않고 끝낼수도 있었잖아! 잔인해!'따위의 대사와 함께 울음을 터뜨릴 생각은 아니죠? 당신, 그런 순정 캐릭터의 모습을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구요."

"정말..."



라제스가 입을 여는것과 동시에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사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는 것이었다.



"대단해! 이렇게 압도적인 위력일줄은 정말 몰랐어! 감동적이야..."

"에에?"

"아니, 화상자료를 통해 객관적인 방어력과 화력의 데이터는 본 적 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역시 비싼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무기구나.. 파워 슈츠는. 정말로 감동이라구. 눈물이 날 정도라니까?"

"하아?"

"뭐, 뭐야. 그 눈초리는... 그러면 설마 명색이 종군기자인 내가 시체, 그것도 군인들의 시체를 보면서 구역질이라도 할거라고 생각했던거야?"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가만히 서 있던 카림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정찰병들을 몰살시켰으니 잠시 후면 쿠와르 해방군의 포위망이 이쪽으로 좁혀들어올 거예요. 일단 제가 그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테니, 라제스는 조용히 숨어있다가 그 틈을 타서 다가브 시내로 숨어들어가세요."

"미끼가 되겠다는 거네. 위험하지는 않을까?"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이니까요."



헤드셋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 특유의 '모든 것을 체념한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라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카림이 부스터를 가동시키며 쏜살같이 달려나갔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파워슈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제스는 그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림의 예상대로 고속 이탈하는 정체 불명의 파워슈츠에 정신이 팔린 쿠와르 해방군의 경계선은, 언덕으로 대피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한 여성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고, 덕분에 라제스는 피난민들의 복귀행렬에 섞여 안전하게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카림,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