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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하기에 너무 거대한 당신, 아니, 외계 우주선이로군요.]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우주 탐사물입니다. 우주 탐사물답게 당연히 우주선이 등장하는데, 소설 제목인 라마가 바로 우주선을 가리키죠. 그런데 사실 라마는 전형적인 우주선보다 오히려 거대 구조물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우주선은 운송 수단, 그러니까 탈것입니다. 탈것은 모름지기 사람과 화물을 운반해야 합니다. 자동차든 선박이든 항공기든 탈것의 기본적인 목적은 사람을 태우고 어딘가로 떠나는 겁니다. 라마 역시 머나먼 우주를 떠도는 중이므로 분명히 탈것이지만, 규모가 워낙 거대합니다. 그래서 운송 수단보다 거주 시설, 거대 구조물에 가깝다는 느낌이 더 강해요. 애초에 작가 아서 클라크도 그런 느낌을 노렸을 테고요. 차라리 이 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우주선은 인데버입니다. 탐사대와 각종 장비를 싣고, 지구를 떠나서 라마와 랑데부하고, 일종의 전초 기지 및 연구실 역할을 하고, 무사히 탈출하고 귀환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우주선이 두 개 등장합니다. 하지만 진짜 우주선은 인데버가 아닌가 싶어요.


아쉽게도 인데버의 인지도는 라마에 밀립니다. 아마 소설을 읽은 독자라도 인데버가 뭔지 까먹기 십상일 겁니다. 라마의 위용이 너무 압도적인 나머지 인류 탐사대가 뭘 타고 왔는지 잊어버릴 수 있죠. 차라리 <2001 우주 대장정>의 디스커버리는 사정이 낫습니다. 아무리 할 9000과 스타게이트가 대단해도 디스커버리의 이름을 까먹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SF 소설에서 우주선은 항상 주인공 비중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우주선이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하죠. 소설 <우리들>을 보면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우주선이 등장합니다. 기술자들은 '인체그랄'이라고 부르는데, 당국은 우주선 완공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소설 주인공 역시 수학자이자 인체그랄 기술자입니다. 결국 우주선을 완성하고, 일련의 사람들이 탑승하지만, 인체그랄의 운명은 좀 기묘합니다. SF 소설에서 우주선의 역할은 요람 같은 지구를 떠나서 미지의 외계로 향하는 인류의 동반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서 인체그랄은 그런 전형적인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오히려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고향에 속박된 사람들의 면모를 상징하거든요.


<우리들>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책이고, 작중 배경은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단일 제국이라고 부르죠. 독재를 혐오하는 시민들은 단일 제국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뭐, 우리 나라의 자각 있는 시민들이 헬조선을 떠나느니, 킹찍탈이니, 이민을 간다느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나마 우리나라 시민들은 이민을 갈 수 있지만, <우리들>에서 단일 제국을 벗어나기는 보통 어렵지 않습니다. 단일 제국은 막가파 방식으로 시민을 통제하지 않고 초첨단 기술을 응용하거든요. 그래서 자유 혁명군들이 선택한 방법이 인체그랄입니다. 여타 SF 소설의 우주선이 미지의 탐사를 상징한다면, <우리들>의 우주선은 탈출과 도피를 상징합니다. 여타 우주선들이 목적지를 중시한다면, 인쩨그랄은 (어디에 도착하든) 떠난다는 개념 자체를 중시합니다. 작가 예브게니 자마친이 하필 주인공을 우주선 공돌이로 설정한 까닭도 그것 같습니다. 덕분에 인체그랄은 정작 비중이 그리 없음에도 인상적인 우주선이었습니다. 그래봤자 결국 맥거핀에 불과하지만, 우주선을 이러한 상징으로 써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아마 암울한 소련 작가라서 이런 상징을 쓴 게 아닌가 싶어요. 흠, 미국 작가가 이런 걸 못 쓸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편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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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선은 비단 탐험의 낭만일뿐 아니라 도피와 혁신의 열쇠죠.]


사실 미국 SF 우주선은 희망과 낭만, 모험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나타낼 때가 많죠. 미국이야 개척(을 빙자한 학살)로 태어났고, 처음부터 줄곧 모험과 탐사를 지향했으니까요. 유럽 역시 16세기 이후에 원양 항해, 개척, 식민 등에 열을 올렸지만, 태생부터 개척을 지향한 미국과는 이미지가 좀 다르죠. 그런 낭만이 잘 반영된 소설 중 하나가 <스페이스 비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만 보면 찰스 다윈의 비글 탐사선처럼 학술적인 분위기가 풍기지만, 사실 내용은 인류 탐사대의 괴물 쌈박질에 가깝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괴생명체는 모두 4종류인데, 예전에도 말한 것처럼 괴물 살쾡이 쿠알이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괴물들이 훨씬 강하지만, 쿠알은 뭐라고 할까요. 좀 더 전형적인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우주 속에 둥둥 떠다니며 정신파 공격을 하는 도깨비불보다 거대 식인 살쾡이가 좀 더 전형적인 괴물 아니겠습니까. 어느 괴물과 싸우든 스페이스 비글은 위험한 우주를 방랑하는 탐사선으로 명성이 드높습니다. 이런 부류의 우주 탐사 소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 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우주선이 스페이스 비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별을 쫓는 사람들>이라는 청소년 소설의 우주선도 기억납니다. 낯선 행성의 생태계를 탐사하는 전형적인 청소년 SF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작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장식한 책이라서 언급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스페이스 비글>보다 <별을 쫓는 사람들>을 더 재미있게 봤거든요. 지금 봐도 뭔가 두근거리는 우주 탐사의 낭만이 잘 살아있더군요. 추억 보정이겠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추억의 우주선이 하나쯤 있지 않겠어요. 다만, 이 소설의 우주선은 이름이 없습니다. 원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그냥 '우주정'으로 부릅니다. 원래 이름이 나오는데 제가 까먹었는지, 아니면 정말 이름이 없는지…. 이렇게 비중이 큰 우주선치고 이름이 안 붙은 경우도 드물 듯하군요. <별을 쫓는 사람들>과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또 다른 우주 탐사 소설이 <우주 소년 케무로>였는데, 이 소설에서는 우주선 비중이 아예 개미 눈꼽만합니다. 사실 전형적인 우주 탐사물이 아니라 행성 로망스에 가깝거든요. 아무리 우주를 떠도는 설정이라고 해도 배경 무대가 우주냐 행성이냐에 따라 우주선의 비중이 달라지죠.


이 외에도 유명한 우주선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SF 소설의 우주선은 저 세 가지(인데버, 인쩨그랄, 스페이스 비글)가 우선 떠오릅니다. 인데버는 전형적인 탐사선이지만, 정작 라마의 인지도에 밀립니다. 인체그랄은 여정이 아니라 탈출구에 가깝다는 점 때문에 특이합니다. 스페이스 비글은 그야말로 우주 탐사물과 스페이스 오페라의 표본 같습니다. 비단 우주선이 아니라 'SF의 탐사선' 자체로 따지면, 그 외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요. 가령, 노틸러스는 우주선에 맞먹는 로망을 자랑하죠.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만능 운송 수단이라는 점에서요. 솔직히 아무리 수많은 우주선들이 나와도 노틸러스의 고전적인 명성을 뛰어넘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비록 19세기 스팀펑크 잠수함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에 스며든 여행의 참맛과 신비로운 생태계와 강력한 성능 등은 아무리 떠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 물론 우주선이든 잠수함든 육상 전함이든 공중 항모든, 그런 게 SF의 정수가 아닌가 싶어요. 최신 기술을 이용해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낭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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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우주선의 전형적인 낭만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