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악령들이 출몰하는 세상'을 다시 읽다가, 인상적인 인용구를 보아서 옮깁니다.

이성을 무효화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으로 이성에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비이성적으로 이성에 반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 만일 이성적으로 그런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몰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바로 그 원리를 입증하는 셈이다. 그게 아니라 만일 비이성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면(일관성을 유지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이성적인 확신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거나, 이성적인 주장을 했다고 인정 받을 수 없다.

꽤 재미있는 내용의 논증입니다. ~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통에, 모더니즘의 상징인 계몽주의라거나 합리성이라거나 이성적이니 과학적이니 하는 단어들이 상당한 맹공격을 받게 되었죠. 과학철학에 관한 지식이 좀 있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파이어아벤트의 무정부주의적 과학론에 따르면 실제로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는 과학이란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어떤 과학이 그 시대에 더 많은 권력(정부 권력 얘기가 아니라 주류 비주류의 얘기입니다)을 차지하느냐만이 중요하다고 할 지경입니다. 지나치게 신격화된 이성의 맹신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은 신과학/의사과학/사이비과학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과학 너머의 그 무엇과 쉽게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수정 치료나 우주 생명 에너지 같은 걸 논할 때는 '믿어야 보인다'고 말하지, '이성적으로 회의하라'를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는 전문가나 회의론자들 앞에서는 제대로 시연이 불가능하고, 오로지 일반 청중 앞에서 불이 꺼진 어두운 방 같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시연이 가능해지는 '관찰자 효과'라는 말 마저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험이나 검증을 요구하기는 힘들지요.

분명 이성을 맹신하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할 일입니다. 본인도 옛날 일기장에 쓴 글을 보니까 '이해는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고 써놨더군요. 하지만 최소한 아무리 그게 '기껏해야'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더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가 더 낫지 않는지 생각해봅니다. 과학이란 또 하나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데, 전 그게 솔직히 왜 비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저 말을 뒤집으면 더 진실이 가까워집니다 : 종교도 하나의 과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가 어떤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자 시도했을 때, 바로 그 시도 자체를 과학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물론 종교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께서 중력의 천사들에게 그렇게 명했든, 사물의 본성이 지구 중심을 향해 끌려가게 되어 있든, 만유 인력의 법칙에 따라 중력이 작용하는 것이든, 모두 나름대로 하나의 설명이고 그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든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다만 어느 것이 더 믿을 만 한지는 그 다음의 문제인 동시에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천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에노키안 주술로 중력의 천사의 이름을 불러서 실제로 중력을 조정해 보일 수 있다면 저 믿음이 훨씬 믿을만 한 것일 터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전에 사이비과학에 대해 논할 때도 말한 것과 유사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요 : "좋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 간에 자유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더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열에 시달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입니까? 안수 기도입니까? 푸닥거리입니까? 해열제 주사입니까?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면, 그 결과 또한 믿음에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개개인의 믿음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믿음이 오로지 당신 뿐 아니라 당신 주위의 사람들, 혹은 다른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안수 기도를 행해서 아이를 구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믿음의 책임입니다. 오, 물론, 해열제 주사로 아이를 구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믿음의 책임이지요. 어느 것이 더 일어나기 쉬운 일인가를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느 것이 더 믿을 만 한지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이 현실을 결정하는 플레인 스케이프의 세상이나 WoD의 마법 패러다임을 둘러싼 승천 전쟁 한복판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 너머에 어떤 현실 같은 무언가가 있고, 그것에 어긋나는 믿음은 대체로 자꾸만 현실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믿음이 현실을 결정한다면 아마 믿는 그대로 현실이 고정되어 버렸어도 별 상관이 없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가 실제한다고 믿어도, 루돌프가 초속 5천km로 달려야만(그것도 수십억개의 점을 잇는 최단 거리를 찾아서) 전세계 모든 아이들에게 하룻밤에 선물을 나눠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믿음이 대체 어떻게 실현될지 가망이 잡히질 않는 군요. 에이즈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에이즈 균을 투여해 보면 됩니다. 여태까지 의학사의 위대한 발견 중에 그런 희생은 드문 것도 아니었지요. 황열병 균을 실험하고 죽은 의학자도 있고, 장티푸스가 소화기로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보이려고 설사를 한 컵 들이킨 의학자도 있으니까요. '에이즈 환자는 성적으로 비도덕하고 타락하다'는 편견은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이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이즈 환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저러한 편견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항목은 따로 발제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예시로만 들겠습니다)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