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이 대학 수시 원서를 넣는 때인데요, 제 고3인 사촌동생이 갑자기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학생부 종합 전형을 넣겠다 해서 자소서 쓰는걸 도와주러 이모댁에 다녀왔습니다. 수시를 거쳐보셨거나 그런 자녀를 두신 부모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자기소개서라는건 답이 있는 서술형 문제입니다. 지문은 생활기록부고 문제는 학교의 "인재상"이죠.


아무튼, 1년적 기억을 더듬어 사촌의 주작과 약팔이 자소서 구성을 돕고 있다가  3번의 봉사활동 관련한 항목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사촌이 말한 제안한 바는 이러했습니다. "..전에 8.15 광복 기념행사에 참여했다가...중략...무한도전에서 하시마 섬에 대해 다룬걸 봤는데 너무 화가나는 거야. 그 뒤에 학교에서 관련주제로 조사해서 발표도 했어...". 정확히는 기억 안나지만(몇일 뒤에 동아리 개총이었는데 그때 마신 '소백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대략 이런 맥락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굉장히 섬뜩했습니다. 우리 세대가 앞선 세대에 비해 사회 상식이나 역사에 대해 깊이가 얕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그 빈자리를 대중매체에 의한 역사가 채우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 이게 요즘 내 또래 중 대다수가 역사를 알게되는 방법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니 정말 등골이 오싹하더라고요.


물론 방송에 의해 역사를 접하는 것이 나쁜것만은 아닙니다. 히스토리 채널로 대표되는 훌륭한(간혹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역사 다큐맨터리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방송들은 대중에게 교과서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함과 몰입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 너무나 느리게 수정되는 기성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훌륭히 보충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한도전은 예능 프로그램이지 다큐맨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능이 역사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를 의미합니다. 우선 역사적 사실이 너무나 감성적으로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언급한 하시마섬 관련 방송을 예로 들자면 그 방식은 이렇습니다. 인기있는 연예인들이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거고 경험자의 설명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공감을 연기하며 안타깝다, 슬프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류의 문구를 말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춥니다.


예능이라는 한계에 의해 감정적 구호 이상의 무언가가 전달되지는 않으며 이런 일이 왜, 무엇을 위해 일어났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역사속에서 마치 한민족은 지난 수천년간 핍박만을 받은듯 묘사되고 우리에게 있었던 비극들이 마치 이유없이 불어닥친 재난인것처럼 넘겨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들이 정당하고 절대적으로 옳은것 마냥 대중의 뇌리를 뒤덥어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일들은 우리의 손 밖에 있었어, 우리는 착한데 악마들에 둘러쌓여있을 뿐이야" 라고 말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그런 방송들이 깊이가 없기는 하지만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준다고 말입니다. 네, 만일 우리의 공교육이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준다면 이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훌륭한 역사에 대한 이해로 승화시켜줄 제대로 된 교육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교육은 불과 1년전에 수능을 준비한 사람으로서 증언하건데 역사교육보다는 사실의 나열에 가깝습니다. 지금의 너무나 모자른 수업 시간의 제한속에서 역사 교사들은 넓은 시험범위에서 물어볼 많은 '사실'들을 교육하기에 바쁩니다. 그 결과 역사적 사건들의 개연성, 그 일이 과거의 어떤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고 또 그 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공교육에서 배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공적인 역사교육 실패와 이를 매워버린 예능적 역사에 의해 한국의 젊은 대중들은 역사는 기억하지만 그걸 반복하지 않는 법에는 무지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종군 위안부와 같은 일이 있었음을 알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며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지만 자신들에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외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역사에서 나당전쟁, 병자호란, 신미양요, 거문도사건, 여진에 대한 예방전쟁은 빠져있는것만 같습니다.


중국과 같이 대중의 분노를 물고기로 고양이 길들이듯 다룰 수 있는 국가라면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큰 문제가 아닐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국가는 자랑스러운 민주공화정입니다. 지난 겨울 수백만명이 광장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사실을 외쳤을때 우리는 스스로 민중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그들의 대리인보다 현명히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대중의 정치개입, 좋은말로 직접 민주정의 발현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임을 알이는 신호탄이며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지금, 역사를 감정적 소비 대상으로만 삼는 우매한 대중의 군상에서 벗어나 권력의 주체로서 역사를 더 나은 정책을 위한 지문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대중들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끝에는 파멸만이 기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고살기 바쁜 일반 시민들, 특히 작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요구이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가혹한 결과보다는 훨신 나을것이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ps. 작년에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수시라는건 훌륭한 사기꾼을 양성하는게 목적이 아닌 이상 좋은 방법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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