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는 한 편지에서 요트의 갑판에서 일광욕을 하며, 그리스 섬들의 해안선을 바라보고 싶다고 토로한 적 있다. 사람은 음식이나 마실 것을 갈구하는 것처럼 경험을 갈구하는 법이다. 런던 빈민가에서 태어난 셸리를 생각할 수 있는가? 글래스고의 고벌스에서 태어난 바이런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래도 셸리나 바이런의 삶은 그나마 덜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튼과 옥스퍼드에 다녔고, 향후 10년 동안 유럽을 방랑했다. 키츠의 경우,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이런의 경우는 일정한 수입이 있었고, 아름다운 애인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운이 좋지 않은 아웃사이더의 경우는 어땠을까? 러브크래프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미국 북부의 주에서는 많은 돈이 없으면, 아름다운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다. - <정신기생체> 서문 중에서


 

 

 

작년 이맘 때즘이었죠. 정확히는 12월 5일이라고 하는데, 영국의 유명한 저작가인 콜린 윌슨이 사망했습니다. 아마 SF 독자들 중에서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노동자 출신 작가라는 꼬리표가 종종 달리는데, 본인은 상당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먹고 살기 힘들어 온갖 잡일을 떠돌았고, 궁핍해서 이리저리 전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간신히 데뷔 저작이 잘 팔려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렸죠. 그러한 데뷔 저작 <아웃사이더>는 사회 기득권층을 비판하기 때문에 자신이 노동자의 한계를 깨고 상류층에 진입했다는 인상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웃사이더 작가들, 그러니까 먹고 살기 힘들고 굶주리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콜린 윌슨은 기이한 소재를 차용하는 작가입니다. <아웃사이더>, <살인의 심리>, <풀리지 않는 세계의 불가사의> 등등 이름만 들어도 뭔가 오묘한 책들을 썼죠. 어렸을 적에 자연 과학에 심취했기에 SF 소설도 약간 썼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정신기생체>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정신 세계를 빨아먹는 놈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괴물로서 저 깊은 의식 속에 심해 생물처럼 잠겨 살죠. 설정을 듣고 보면 어딘지 크툴루 신화가 생각나죠. 사실 러브크래프트의 정신적 후계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슨이 어느 날 우연히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을 읽고, 거기에 감명을 받아 다른 작품들도 파고 들었습니다. 그 결과 크툴루 신화에 반했고, 그래서 절반쯤 장난으로, 절반쯤 자기 특유의 현상학 철학을 접목한 것이 <정신기생체>입니다. 자기 색깔과 러브크래프트 색채를 기묘하게 결합했어요.

 

 

 

윌슨은 소설 첫머리에 어쩌다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러브크래프트에 관한 비평도 약간 남겼습니다. 윌슨은 러브크래프트가 '불운한 천재'인 동시에 '궁핍했기에 크툴루 신화를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마디로 돈이 없어서 그런 글을 썼으며, 만약 경제적으로 풍족했다면 좀 더 우아하고 품격 높은 작품이 나왔을 거라는 말입니다. 인육을 먹거나, 시체를 탐닉하는 등의 싸구려 펄프 요소는 없어지고, 크툴루 신화를 한 차원 높은 위상으로 끌어올렸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러브크래프트는 굶주리는 작가였습니다. 돈을 벌 방법은 <위어드 테일즈> 같은 잡지의 원고료와 아내에게서 받은 생활비가 전부라고 합니다. 이건 푼돈에 불과하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기에 부족했죠. 피폐한 생활은 불만족으로 이어지고, 소설 전반에 나오는 음산하고 기이한 설정은 여기서 기인했다는 뜻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으며, 러브크래프트가 부유한 작가였다면 어땠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콜린 윌슨의 가정처럼 재산이 많았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도 러브크래프트가 유럽의 아름다운 대도시를 떠돌며 여행을 다녔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여행으로 마음을 치유했다고 해서 작품 활동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 시체 잡아먹는 구울이나 인신 공양하는 다곤 밀교를 만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죠. 그 대신 우아하고 서정적인 판타지에 몰두했을 수 있고요. 하지만 그런 '펄프 잡지의 폭력적이고 싸구려로 보이는 요소'가 없었다면, 과연 크툴루 신화가 오늘처럼 번성했을지 의문입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시체 탐닉이나 인육 시식 같은 설정을 좋아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독자에게는 그런 요소가 설정을 더욱 해괴하고 무섭게 보이는 장치였을 겁니다. 좀 더 우아해졌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사람을 휘어잡는 마력은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어요. 

 

 

 

한마디로 러브크래프트는 배를 곯는 작가였기에 크툴루 신화가 오늘날과 같은 인기를 누린다는 겁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결코 밑바닥까지 어두운 작품을 쓰지 못한다고요. 물론 전적으로 그런 건 아닙니다. 돈도 잘 벌면서 심각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도 있을 겁니다. 비단 소설가만 아니라 만화가, 영화 제작자, 음악가 중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누리는 동시에 기괴한 분위기를 쏟아내는 예술가가 많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작가라고 해서 무조건 암울한 이야기만 쓰는 것도 아닐 테고요. 작가의 경제 상황이 작품 색체와 항상 반비례하는 건 아니겠죠. 다만, 그럴 확률이 좀 더 높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체감한 작가가 자기 경험과 문제 의식을 살릴 수 있겠죠. 러브크래프트가 묵직한 신화를 만든 이유는 외부 접촉을 꺼리는 개인 성향이 우선했겠지만, 생활고도 한몫 했을 겁니다. 궁핍하게 사는 와중에 뭔가 희망차고 따스한 결말을 보여주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렇다고 러브크래프트 소설이 죄다 껄끄럽고 차가운 건 아니지만.

 

 

 

러브크래프트는 불행하게 살다가 단명한 작가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힘들게 살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창작가도 많습니다만. 여하튼 그런 상황이 크툴루 신화라는 걸작을 남겼고, 그게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사악한 고대신이니, 촉수 괴물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도 각종 소설, 영화, 게임에서 쏟아지니까요. 자기 삶을 희생한 대신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까요. 아마 저런 소설, 영화, 게임에서 조금씩 로열티만 받아 챙겨도 상당한 갑부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러브크래프트의 유산을 볼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작가 개인이 행복했다면, 작품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과연 그것이 어거스트 덜레스에게 극적인 영향을 끼치고, 사악하고 음흉한 크툴루 신화를 정립하고, SF 공포물에 획기적인 선을 그을 수 있었을지…. 한 개인의 불행으로 인류는 그나큰 정신적 부를 얻었는지도 몰라요.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년에 나오는 던전탐사물 중에 <다키스트 던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로그라이크 기반의 인디 게임입니다. 크툴루 신화라는 말은 없지만, 기괴한 고대신이나 촉수 괴물, 해변가의 이상한 생명체 등이 나오는 거 보면 뻔하죠.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부터 소규모 인디 게임 <다키스트 던전>까지, 러브크래프트의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몇 십 년이나 지나도 아직도 수많은 설정에서 뻔질나게 쓰이다니요. 작가 본인이 이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생전에 인정을 못 받았으니 좋아할지, 아니면 자신의 심오한 문학적 성취를 게임 따위로 망친다며 화를 낼지. (평소 성격을 보면, 아무래도 후자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