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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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1970년대 벌어졌던 워터게이트 사건은 현역 미국 대통령의 불명예 퇴임까지 이어졌기에,
역사상 최대의 스캔들에 해당하고 그래서 누구나 해당 사건은 얼마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왜 퇴임해야만 했는가를 이야기하면,
오늘날 상당 수의 사람들이 그 사건의 핵심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사건이고, 국가 기관을 이용하여 도청을 했기 때문에 닉슨이 짤렸다는 것이죠.
절반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딱 절반만요.
당시 미국 국민들이 여야 지지자를 막론하고 닉슨에 대해 한결같이 공분했던 것은,
국가 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기 위하여 도청을 감행했다는 팩트 하나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미국 국민들이 그렇게 현역 대통령을 내쫓을 정도로 크게 화를 냈던 것은,
닉슨 대통령이 해당 사건의 내막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모른다"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법대에 진학하여 치열한 노력 끝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닉슨은
본래 무척 소탈하고 직설적이었으며 국민들에게 "솔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서민형 정치인이었습니다.
대략 트루먼, 카터, 닉슨 대통령은 한국의 노짱과 비슷한 레벨의 가난한 농부 출신의 서민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죠.
닉슨의 라이벌이었던 케네디가 백만장자의 아들로 화려하고 화사한 이미지로 포장되었던 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민들은 최소한 닉슨의 솔직함을 믿었고, 서민의 편에 서서 노력하는 정치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한 서민 출신의 대통령 닉슨이 "거짓말"을 한 겁니다.
국가 기관의 잘못을 잘 알면서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대응을 했죠.
그리고 국민들의 시각은 "도청 사건"에서 닉슨의 "거짓말"로 이동하였고,
닉슨의 거짓말에 스캔들의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열화와 같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닉슨이 짤린 진짜 이유는,
도청 사건이 터진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잘못을 알면서도 "잘못했다"라고 솔직히 말하지 않고 "난 모른다"라고 잡아떼며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대한항공 사태를 보면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닉슨을 떠올렸습니다.
처음 잘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어떻든 처음 잘못은 빌어서라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건의 초점은 땅콩 가지고 진상질을 저지른 재벌3세의 최초의 무개념 행위보다도,
그 잘못을 덥기 위해 거짓 증언을 강요하고 조직을 동원하여 협박한 것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최초의 잘못을 덥기 위해 자기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조직을 동원하여 피해자에게 거짓 증언을 강요하고,
거짓말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한 것이 스캔들로 번지고 있는 형국이죠.
재벌 3세가 진상질을 한 것은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거짓 증언을 강요한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위력으로 거짓 증언을 하고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조직에 몸 담고 있다면,
이건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만한 곳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닉슨은 처음부터 자기가 나서서 잘못한 일도 아니었고 밑에 사람들이 잘못한 사안이었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알면서도 모른다"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짤렸습니다.
이번 대한항공 사태는 순전히 재벌 3세가 혼자서 난동 부리며 혼자 잘못한 것인데도,
그 잘못을 아는 사람들에게 회사라는 조직을 동원하여 위력으로 거짓 증언을 강요했고,
세계적인 대기업이 오너 일가 보호를 위해 조직적으로 거짓말을 강요하는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이 정도면 그 내용과 과정이 너무 나쁘고 사악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스캔들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최초에 잘못한 그 행동 자체보다는...
그 최초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로 대응하려고 하다가
진짜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켜 처참하게 침몰하는 모습을 대한항공에서 보게 됩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도청 그 자체보다는 거짓말로 대응한 게 진짜 문제였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처음에는 작게 막을 수 있었던 일을 거짓말로 때우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여 왕창 큰 일로 화를 키워서
개인의 문제를 기업 전체의 문제로 만들어 기업 전체가 통채로 침몰하는 상황으로 만들다니...
일부러 지금과 같이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싶어도 어려울 것 같은데,
이럴 거면 위풍당당 행진곡 틀어가면 수 십 억짜리 광고를 때려대며 노력한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싶기도 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세월 지나면 거짓말이고 살인이고 잊어버리는 사회니까요. 이번에도 그런 요행을 바랐겠죠. 사실 저런 작태가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지금도 어디에서인가 (규모는 작아도) 저런 일이 벌어지겠지만, 대기업은 원래 그렇다며 다들 넘어갈 텐데….
다만, 이번에는 항공기 회항이라는 엄청난 변수가 있었고, 안일에 빠져 그런 변수까지 보지 못한 탓이겠죠. 다른 때처럼 거짓말로 대충 넘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걸린 격이라고 할까요.
닉슨이 지시한 것은 '도청' 자체를 하라고 지시했던 게 아니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닉슨이 "FBI의 조사를 방해할 것을 CIA에 지시"했던 겁니다.
최초에 도청 행위 자체를 지시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FBI의 조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되어 테이프에 고스란히 담겼고,
그 테이프가 나중에 "닉슨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고 조사를 방해했다"는 증거로 제출되어버렸죠.
닉슨은 국민들 앞에서 "나는 아예 몰랐다"라고 잡아 뗏고 계속해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며 버티다가,
그 테이프의 존재가 부각되자 국회에서 탄핵이 추진되었고 결국 자진 사퇴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진 사퇴를 선택하면서 그 테이프가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만큼은 간신히 막을 수 있었죠.
올리버 스톤 감독이 제작한 영화 <닉슨>에 사건의 전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래 "인간 닉슨"은 그렇게까지 사악하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붙일 수 없지만,
도청 사건이 터졌을 때 선거를 의식하여 국민들 모르게 덥으려고만 하다가 화를 키우는 과정과
그 가운데 닉슨이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모습이 상당히 상세하고 절절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자진 사퇴를 선택하면서까지 끝끝내 테이프의 대중 공개를 막았으니
그것으로 잘 마무리 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라스트 씬은...
처량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꼭 지켜내야 하는 가치였는가 생각하게 합니다.
닉슨 행정부 당시 정황상.. 닉슨이 일이 붉어지기 전에 도청사실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 정설로 압니다..
닉슨이 도청을 지시했다는 것의 신빙성은 모르더라도, 워터게이트가 터지기 이전에도 이미 도청사실은 알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최소한 도청에 대해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실 어떤 중대한 잘못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들이 있지요. 저 순간에 닉슨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래요 내가 했습니다고 당당하게 나서는 것은(혹은 시키진 않았지만 알고서도 묵인했습니다.) 아마 정치적인 환경상 불가능 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걸 인정했다 하더라도 닉슨이 사퇴를 피할 수 있을 지는 굉장히 미지수인데, 무얼 근거로 저 엄청난 정치적 스캔들이 진실을 밝히는 것 만으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고 탄핵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본질과 위법성, 그 과중함은 행정부의 수반이 정부의 자원을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불법적으로 염탐한 데에 있는 것이고, 그게 드러난 이상 상대측은 닉슨이 어떤 말을 하건 간에 원하는 프레임에 집어넣어 몰아붙일 수 있었을 껍니다.
그리고 닉슨 개인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좋은 인간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본인 자체가 상대의 공산주의 의혹을 별로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렌 더글라스를 순수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매카시즘을 이용하여 매장시킨 걸 감안해 봤을 때, 닉슨 개인이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상대를 파멸시키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인간이라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 거짓말은 동물이 숨을 쉬는 그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임기 동안 실책을 저지른 사람들은 역사상 셀수도 없이 많고, 그 실책을 거짓말로 덮거나 모면하려 했던 사람 수도 전자에 수렴할 정도로 많습니다. 르윈스키 스캔들의 클린턴 또한 거짓말을 했고 사퇴압박까지 받았지만, 레임덕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끝난 예도 있지요. 이 경우는 워터게이트에 비하면 급이 낮은 스캔들이지만, 거짓말로 상황을 키웠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왔죠.
거짓말이 정말 사건 자체만큼, 사건 자체보다 큰 문젯거리였다면 스캔들의 종류가 무엇이었는가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겠죠. 그런데도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면, 그럼 그 거짓말 이후의 대응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아까 뉴스 포털을 여니까 비행기에서 내리라고만 했고 비행기를 게이트로 돌리라고는 안 했다는 '변명'이 새로 나왔더군요. 크...대단합니다. 이러길 바랬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