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균형을 이룸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테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자중의 하나로 꼽히는 Khan Montavel의 말이다.



실제로 이 세계는 다섯가지 색깔을 근본으로 하는 마법력의 순환에 의해 그 형태가 유지된다. 창조의 청색, 성장의 녹색, 파괴의 적색, 죽음의 흑색, 정화의 백색... 그리고 이러한 균형이 일시라도 깨지는 경우 다른 네가지 색깔이 서로 작용하여 최대한 깨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연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이는 그 범위를 크게 줄여서, 마법사 개개인의 문제로 놓고 보더라도 별다를 것이 없다. '균형을 맞춘다는 것', 즉 마나와 인구, 겔드, 군대의 세력, 주변 국가들의 형평성 등, 이 모든것들이 어느새인가부터 마법사들에게 하나의 불문율로 적용되었고, 이 법칙을 무시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균형을 깬 마법사는 그만큼의 댓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광경 역시, '마나의 균형'이라는 요소를 맞추지 못해서 생긴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꾸에엑!"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실제로 내장을 까뒤집으며 쓰러지는 놈도 있었다) 수많은 좀비들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육체를 그나마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던 마나의 흐름이 끊기자 그들의 허약한 몸은 단 몇분을 지탱하지 못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시체가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약간의 시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저주와 흑마법에 완전히 물든 좀비의 근육과 내장은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썩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한다. 아마도 최소한 몇달정도는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길 것이다. 때문에 좀비들이, 그것도 한두마리도 아닌 거의 십만에 달하는 좀비들이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쓰러지며 악취를 풍겨대는 모습은 아무리 흑마법을 연구하며 볼것 못볼것 다 보아 온 나로써도 그렇게 즐거운 풍경으로 비추어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직접 좀비들이 사라지는 자리에 나온 것은...



"친애하는 국민들에게 알린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 나라가 아무리 흑마법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라 할지라도 그 구성원은 바로 국민임에 틀림없다. 즉, 이 나라는 흑마법이 아닌 여러분의 힘으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마법의 힘을 사용해 영사된 나의 영상은 서쪽 국경지역 전역에 걸쳐 보일만큼 거대했고, 나의 음성 또한 영토의 서부 전역에 걸쳐 울려퍼졌다.



"때문에, 이웃 나라의 위선자들이 호시탐탐 우리를 침범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상황속에서, 나의 군대를 이루는 가장 강력한 좀비 병사들을 다시 흙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좀비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생겨날 수 있는 주민들의 불편 사항을 감안할 때, 차라리 내가 전투의 최전선에 서서 나의 영혼을 팔아가면서 마법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군대의 규모를 감축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와아아아아~!!"



내 말을 듣고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실제로 좀비들이 자신의 주거지 곳곳에서 흐느적대며 걸어다니는 모습은 그들의 눈에 좋게 비칠 리 없었고, 외관상의 이유 뿐 아니라 위생상의 이유에서도 주민들은 내 군대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좀비들을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는 않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조치는 그들에게 커다란 환영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당분간은 서부 지역의 좀비 숫자를 증가시키지 않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한다. 그러나, 단 한가지, 이번 군대 감축으로 인하여 생기는 부산물들, 즉 마나의 공급이 끊어진 시체들 만큼은 여러분이 자체적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이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조치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거주지 주변에 쓰러진 좀비들을 한군데 모아 땅 속에 묻어버리거나 아예 불태워버릴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이라고 했지만..."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하나의 주문을 떠올렸다. 서서히 모이는 암흑의 마나, 그리고 강렬한 저주와 파괴의 기운.



"죽음과 쇠퇴"



나즈막하게 읊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습을 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들린 이 한마디의 말이 나오자, 내손에 모여있던 검은 기운의 마나는 서쪽 지역의 가장 큰 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다른 마법들처럼 화려한 효과는 없었다. 백마법처럼 환한 빛도, 적마법처럼 하늘끝까지 치솟는 불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의 수풀이 가득하던 산이 빠른 속도로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모습은, 그리고 산속에 살던 모든 산짐승, 날짐승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오며 나의 마법에서 도망치려다가 끝내는 참혹한 모습으로 말라 비틀어지며 죽어가는 모습은 그 어떠한 마법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이라고는 했지만, 만약 앞으로 일년 이내에 전염병이 일어난다거나, 미처 묻히지 못한 좀비가 스켈레톤이 되어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띄게 되면... 내 영향력에서 벗어나길 희망하는 불순 세력으로 간주, 가차없는 응징을 내릴 것이다."



나의 거대한 투시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연설을 끝내며 왠지 흡족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공포감은, 특히 나라는 존재로 인해 생성되는 그 거대한 공포감은 영토 전역에 걸쳐서 건설된 노드가 고순도의 마나를 응집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언제나 명심하라... 빛은 어둠의 안식을 방해하는 침입자일 뿐... "



점점 희미해지는 내 목소리의 마지막 말이 그다지 길지는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길게 느껴졌을 내 연설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마스터,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공포 효과를 조성하기 위해 거대한 마력을 소모한 관계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내 뒤의 그림자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걸어나오며 말했다.



"갑자기 내 뒤에서 튀어나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텐데, 켄톤..."



내가 거느리고있는 사신, 일명 '영혼 사냥꾼'이라고 알려진 "KenThon of Faerun"이었다.



"후훗... 용서하시길... 하지만 제가 지날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사라져. 네놈이 거느린 영혼들의 울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쁘단 말이다"

"이거 좀 섭섭한데요... 뭐, 어쨌거나 좋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이번 좀비 해제로 인해 여기저기서 말이 많아서 말이죠..."

"여기저기라니...?"

"대표적으로 몇군데만 짚어보자면... 두군데가 가장 신경쓰이는군요... 하나는 신성기사단장이 지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 흑마법사 연합에서 떠들어대는 것입니다만..."

"신성기사단? 그놈들이야 무슨 말을 했을지 뻔하군.. 죽은자에 대한 모독은 신에대한 불경 어쩌구 저쩌구하며 칼을 갈고 있겠지. 안그래도 쳐들어올 명분을 찾고 있던 놈들이니.. 그건 됐고, 흑마 연합에서는 왜 또 난리래?"

"좀비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해제시키는 것은 좀비에 대한 인식을 안좋게 만들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흑마법 전체를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올 수 있다는군요"

"(미)친 놈들이군... 좀비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질 거라도 있었던 것처럼 지껄이고 있잖아... 어차피 그쪽도 세력을 넓히는데 내 영지가 방해가 되니, 침범할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 뿐이야. 뭐, 그정도 녀석들에게 전쟁에 져서 영토를 빼앗기는 일은 없을거다. 할말은 그것뿐인가?"

"마스터... 그런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번거롭게 인간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신 겁니까? 물론 그들의 공포감으로 인해 고순도의 마나를 얻을 수 있었지만, '죽음과 쇠퇴'마법에 소모된 마나를 계산하면 별로 얻을 것도 없었는데요..."

"뭐, 어차피 좀비 해제시킬 것.. 생색이나 한번 내고, 또 가장 중요한 건 해제된 좀비들의 사후 처리였으니까.."

"그 시체들을 처리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이봐, 하나만 묻지. 흑마법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되는 마법이 뭔가?"

"그, 글쎄요..."

"내가 생각할 때 가장 강력한 마법은 '흑사병'이야. 잊혀진 고대 마법을 제외시킨다면 말이지."

"흑사병?"

"그래... 내가 이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을 때, 실수로 30%정도 완성된 마법이 폭발해 버렸지. 내 영토에 흑사병이 번지기 시작한 거야. 비록 그 위력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과는 굉장했어. 당시 인구의 절반이 죽어나갔고, 모든 가축과 농작물이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지."

"그런데 그것과 이번 연설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잘 들어둬. 흑사병을 인위적으로 시전하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거리마다 시체가 넘쳐난다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자연적으로 흑사병이 발생한단 말이다. 가장 강력한 저주 마법이 내 영지에 떨어지는 꼴이지. 때문에 약간은 협박을 해서라도 뒷처리를 깔끔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더 할 말 있나?"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음산하게 울리는 목소리만을 남긴채 켄톤은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지면서 남긴 약간의 냉랭한 바람으로 인해 촛불이 흔들린 것만 제외한다면 어떠한 기척도 없이 물러간 셈이었다.



"신성기사단과 흑마 연합이라... 흠.. 한두번 정도 침입한다고 큰일이 벌어질만한 상대들도 아니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방어 아이템을 몇개 더 사놓는 것이 좋겠군..."



그다지 크지는 않은, 기껏해야 의례적으로 몇번 투닥거리다가 흐지부지해질 그러한 전투라도 분명 전쟁은 전쟁이다. 국지전이라고 해도 분명 희생자는 생길 것이고, 무익한 싸움을 위해 사라져간 희생자들의 피는 또 한번 내 땅을 적시게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피를 본지도 꽤 오래 된 것 같군..."



약간은 설레임으로, 약간은 흥분에 젖은 마음으로 앞으로 다가올 유희를 기다리며 나는 이번 조치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그래... 며칠 후엔 전쟁이다...